발달장애인, 작가를 꿈꾸다
<너와 함께라면> 김유리 · 김영아 작가 인터뷰
<너와 함께라면> 책 저자인 김영아 작가(왼쪽)과 김유리 작가
“발달장애인과 장애인재활상담사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같은 꿈을 꾸는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의 꿈을 이뤄주자는 마음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너와 함께라면>는 발달장애를 가진 김유리 작가와 김영아 장애인재활상담사가 함께 꿈꾸고 이뤄낸 결과물입니다. ‘글쓰기’를 주제로, 둘의 만남부터 각자의 삶과 그 삶을 대하는 태도, 감정과 그 감정을 대면하며 만들어온 자신만의 철학까지 한 권의 책에 오롯이 담았습니다. 내용과 별개로, 글 자체에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는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책에서 김유리 작가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발달장애인, 작가를 꿈꾸다
김영아 작가는 2009년 발달장애인 영화 동아리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김유리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나는 글이라면 딱 질색인데 그 긴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니, 심지어 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발달장애인이 글을 쓰고 싶다니.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 P13, 김영아 작가
김유리 작가에게 글쓰기는 ‘잘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부해도 실력이 늘지 않던 다른 과목들과 달리 글 쓰는 것은 쉬웠어요. 한글도 빨리 익혔고 받아쓰기도 늘 100점을 받았어요.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작가를 꿈꾼 것은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한참 후의 일입니다. “2017년, 한 장애인 복지관에서 글쓰기 수업의 결과물로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제 이름이 적힌 책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책 같이 써볼래요?
뜻밖에 먼저 작가가 된 건 ‘글이 질색이었다던’ 김영아 씨입니다. 2021년, 장애인재활상담사로서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선물합니다. 실패할 권리>를 내놨습니다.
“2018년, 친한 동료의 부탁으로 시 필사 모임에 참여하면서 우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930일을 매일 시 한 편과 짧은 단상을 써서 단톡방에 올렸지요. 그렇게 남의 글만 따라 쓰다가 어느 순간 내 글이 쓰고 싶어졌어요.”
김영아 작가의 출간 소식을 들은 김유리 씨가 직접 산 책과 꽃 한 송이를 들고 와서 축하를 건넸습니다. ‘저도 제 책을 내고 싶어요’라는 속마음도 밝혔지요. 고민하던 김영아 작가가 어느 날 김유리 작가에게 제안했습니다.
"유리 씨, 우리 책 같이 써볼래요?"
글을 쉽게 쓰는 것도 용기예요
‘따스한 소통’을 보여 주려 시작했으나 결론적으로 이 책엔 ‘미지근한 불통’이 담겼습니다. - p140, 김영아 작가
책을 함께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발달장애로 보이지 않는’ 유려한 글로 대중을 사로잡고 싶은 김유리 작가와 쉬운 글로 ‘발달장애인 독자에게 닿고 싶은’ 김영아 작가의 생각이 끊임없이 부딪혔습니다.
“저도 첫 책에는 은유적이고 있어 보이는 글도 썼어요. 그런데 ‘글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는 미후지 작가님의 조언이 컸어요. 쉽게 쓰여진 책도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발달장애인들에게 글 쓸 용기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리 씨에게 그걸 이해시키는 게 쉽지 않았지요.”
나 이렇게 글 잘 써요 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을 쓰면서 힘겹고, 불안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 주는 게 중요해요. 불만이 아닌 불안이 보이는 글을 써야 해요. - p116, 김영아 작가
출판사와 글쓰기 수업 등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김유리 작가에게 쉬운 글은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글’처럼 생각됐습니다. “김영아 선생님은 맞춤법 다 틀려도 되니 글을 고치지 말라고 하셨어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하셨죠. 처음 들어본 말이라 처음엔 이상하고 어색했어요. 이제는 어렵게 쓰라고 해도 못 써요. 덕분에 글 쓰는 게 너무 편해졌어요.”
장애는 슬프고 외로운 것
“초등학생 때 친구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다가 장애 진단을 받은 건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그때는 잘 몰랐어요. 엄마가 왜 슬퍼하는지, 친구들이 장애인 카드로 지하철 타는 나를 왜 이상한 눈으로 보는지...”
김유리 작가에게 장애는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얼마 전, 엄마랑 여동생 둘이 해외여행을 다녀왔어요. 이모하고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는데 왜 셋이서 안 갔냐고 물어보셨나 봐요. 엄마가 ‘자유여행이라 유리를 데려가면 힘들 것 같아서 못 데려갔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장애가 없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더니 유쾌하게 덧붙입니다. “그런데 둘이서만 여행했는데도 엄청 힘들었데요.”
그녀에게 글은 슬픈 현실에서 '죽지 않으려고, 살기 위해 쓴' 구원이었고, '말보다 편한' 자기표현의 수단이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직장인으로 떳떳하게 살아가게 해준' 고마운 재능이기도 합니다.
발달장애인이 글을 쓴다는 것
김영아 작가는 “발달장애인들에게 글이라는 표현 수단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글이라는 것을, 방법으로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장애를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하는 언어적 표현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고백하자면 이 인터뷰는 편견에서 시작됐습니다. 글을 쓰는 발달장애인이 있을까, 있다면 그 글에는 어떤 생각들이 담겨 있을까? 그 어리석은 질문을 따라가다가 <너와 함께라면>의 저자 김유리 작가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답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푸르메소셜팜 발달장애 직원들과 대면하면서 찾았던 사실을 멀리 돌아 다시 확인한 셈입니다.
덕분에 얻은 확신도 있습니다. ‘느린 학습자’라 불리는 발달장애인들에게 글쓰기는 잘 어울리는 소통수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말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고르고 문맥에 맞춰 작성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죠. 느리게 흘러가는 그 과정 속에 자신의 진짜 생각과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글이라면, 발달장애인들이 장애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자신의 생각을 제 속도에 맞춰 온전히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말보다 글이 편한 저에게 글쓰기는 세상과의 연결고리이자 안식처입니다. - 김유리 작가 소개 중
<너와 함께라면> 김유리와 김영아 지음, 지식과감성, 2023년 8월 4일 출간
김유리 작가는 자신의 생을 담은 책을, 김영아 작가는 또 다른 발달장애인 화가와 함께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달랐지만, 꿈을 함께 이룬 두 사람은 이제 같은 곳을 보고 나아갑니다. 그들이 향하는 그곳이 발달장애인의 다채로운 생각이 분출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시작점이기를 기대해봅니다.
*글, 사진= 지화정 과장 (마케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