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에게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발달장애인의 읽을 권리> 마지막화
저는 12월을 참 좋아합니다. 가족 기념일과 크리스마스 덕분에 설레고 신나는 시간을 가지는 동시에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있으니 지난 1년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돌아볼 수도 있으니까요. 선물처럼 다가오는 새로운 한 해를 향한 기대로 더욱 충만해지기도 합니다.
한 달 내내 이런 저런 ‘올해의 OO’ 목록을 만들어보는 것도 12월의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그 목록 중 올해의 힐링 포인트 1등을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푸바오입니다. 저는 가족과 지인들 모두 인정하는 푸바오 열성팬입니다. 가족들은 이제 제가 조용하다 싶으면 ‘푸바오 영상 보고 있군’ 하게 되었고, 갑자기 눈물이 글썽이면 ‘또 푸바오 보내는 날 상상하나 봐’라 짐작합니다. 집중력이 흩어지거나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할 때 자동적으로 핸드폰을 들고 푸바오 영상을 찾는 제 모습에 스스로 놀랄 때도 있습니다.
에버랜드 판다 푸바오.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제공
이쯤 되니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작은 중국 네티즌들이 다른 나라에 나가 살고 있는 판다들의 생활을 비교하다 한국의 푸바오는 중국에 데려올 필요없이 아주 잘 지낸다고 인정했다는 인터넷 기사에 자긍심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푸바오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갔고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와 영상들을 보고 또 보며 덕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 푸바오 안에는 제가 훅 빠질 만한 이야기가 여럿 담겨 있다는 것, 그리고 푸바오를 통해 제 안에 자리잡고 있던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우선 저희 집에는 고양이 엠마가 있습니다. 푸바오처럼 까맣고 흰 털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는 짓도 비슷합니다. 예측불가의 개구장이인데다 사람과 밀당을 잘하고 가끔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저를 위로하기도 하죠. 말로 다 표현 못 할 그 사랑스러움은 지친 일상에 큰 활력을 줍니다. 종이 다른 털복숭이 생명체와 언어가 필요 없는 깊은 교감을 나눠 본 저는, 푸바오와 사육사 할아버지 사이에 흐르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다.
사진=에버랜드 공식 유튜브 채널 캡처
푸바오를 업어주는 사육사의 모습에서, 직장에 나가는 딸을 대신해 외손녀를 업어 키우신 제 할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푸바오와 보내는 시간을 더 잘 남겨놓기 위해 문예창작과 전공까지 하신다는 사육사님의 블로그와 브런치 글을 읽으며 정교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문장들을 읽는 행복을 만끽합니다. 거기에 종족보존 관련법상 푸바오를 곧 중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상실감에 애틋함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면식도 없던 타자의 이야기에서 내 마음에 있던 어떤 기억과 감정이 들썩이며 나와 내가 애정하는 것들의 존재를 강하게 느껴보는 순간은 경이롭습니다. 푸바오 덕분에 저는 올해 그런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노력과 적절한 상황이 어우러져 수많은 판다들 중 한 마리에 불과했을 지도 모를 푸바오가 지금의 자리에 있습니다. 고유한 서사가 가진 강력한 힘을 느낍니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 안에는 발달장애인 개개인이 가진 다양한 이야기에 푹 빠져볼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특정 이미지로 대표되는 집단화, 타자화의 정도가 가장 심한 대상일 것입니다. 저는 이 사회가 발달장애인 개인이 가진 고유한 서사를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더 많이 만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아들의 이야기로 책을 쓰게 된 이유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지적장애인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그런 모습만 있지는 않다고, 이 아이는 더 다양한 모습, 더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에 등장한 한 발달장애 아이의 이야기에서 아주 많은 것을 읽어냈습니다. 그분들은 발달장애인과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봤을 것입니다. 이런 활동들이 쌓이고 확장하여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해상도가 높아졌으면 합니다. 저 같은 주변인이 나서서 할 수도 있고, 독서할 권리를 찾고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발달장애인 당사자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가올 AI 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데이터와 패턴을 기반으로 학습하는 AI 안에 보다 더 다양한 발달장애인 개인의 서사를 포함시킴으로써 편향을 줄이고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차별화된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외된 그룹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경험에 대한 인식을 높여 사회적 포용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립고 좋은 것들을 되새기게 하는 다정한 이야기를 자주 만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발달장애인 개개인의 이야기를 더 찾고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모두 해피뉴이어!
*글= 조윤영 대표 (도서출판 날자)
*사진= 에버랜드 공식 유튜브, 게티이미지뱅크
조윤영은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이자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도서출판날자'의 대표입니다. 걱정이 많은 아들 예준이의 일상 에피소드로 「걱정이랑 친구할래?」를 펴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그를 통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으로 읽고, 듣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