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단어, 어머니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무엇일까. 사랑, 희망, 행복, 평화 등이 아닐까. 그런데 최근 한 영국 단체가 영어권을 제외한 102개국 시민 4만 명에게 물은 결과 <어머니>로 나타났다. 어머니에 이어 열정, 미소, 사랑 순이었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이 지났건만 <어머니>란 단어를 들으면 아직 가슴이 뭉클하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오랜 투병 생활로 백발에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젊고 고운 모습이다.


박점식 회장의 가족박점식 회장의 가족


푸르메재단의 열성적인 후원자 중 한 사람이 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이다. 박 회장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2008년 장애인 가족을 위로하는 특별 행사를 기획했다. 시인 정호승 선생님의 시낭송회였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와 ‘수선화’ 등 정호승 선생님이 당신의 시를 낭송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와 배경을 설명하는 인문학 강연이었다. 광화문 KT홀에서 열린 행사장에는 어린이 손을 잡고 온 가족부터 전동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에 이르기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긴 강연 말미에 정호승 선생님이 ‘바닥에 대하여’란 시를 낭독했다.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정호승 선생님이 “여러분, 인생의 바닥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닥’이 비참하리라는 것은 상상일 뿐입니다. 바닥에 닿으면 그저 그 바닥을 딛고 일어나십시오”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행사가 끝나자 중년의 부부가 찾아왔다. 그 옆에는 휠체어 위에 청년이 앉아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26살 난 제 아들입니다. 근이영양증 장애를 가졌습니다. 모두 20살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줄 알고 아들의 20살 이후 삶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데리고 외국여행을 해보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다르더군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 제도와 정책도 다를수 밖에 없고요.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푸르메재단이 그 역할을 해주십시오.” 박점식 회장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푸르메재단 더미라클스 가입식푸르메재단 더미라클스 가입식


박 회장은 푸르메재단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2014년 고액후원자 모임 <더미라클스>가 발족하자 1호로 가입했다. 푸르메재단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섰다. 어느 날 박 회장이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당신 어머니에 대한 감사 편지 1000통을 담은 <어머니, 내 어머니>였다. 책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회한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흑산도에서 남의 집 품앗이를 하며 가난과 절망 속에서 아들을 키운 호랑이 같은 어머니. 암울한 상황을 견뎌야 했던 어린 아들도 범상치 않았다. 홀어머니와 외아들의 삶은 처음부터 굴곡이 예고됐다. 어머니는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 다섯 살이 되자 뭍을 떠나 섬으로 들어갔다. 목포에서 뱃길로 반나절 거리인 흑산도였다. 흑산도에서 유일하게 셋방살이를 하며 어머니는 아들 하나를 바라보고 키웠다. 어머니는 남의 집 품앗이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아들이 기죽지 않게 늘 새 운동화와 새 옷을 사입혔다. 행여나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들을까 봐 더 엄하게 대했고, 그 결과 아들은 동네에서 가장 매를 많이 맞는 아이였다.


흑산도의 어린시설흑산도의 어린시절


아들은 중학교를 들어가자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과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삐뚤게만 나가던 아들이 3학년이 되자  모질게 매를 들었던 어머니가 갑자기 매를 내려놓았다. 아들을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 테니 열심히 공부해 진학해라.” 박 회장은 이때를 기억하며 “어머니의 말씀이 매 맞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아팠다”고 기억했다. 그날부터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한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명문 목포상고에 합격했다.


뭍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아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고향집을 찾았다. 한번은 친구들과 이웃집 염소를 잡아먹은 뒤 목포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그 길로 아들을 찾아가 정신이 번쩍 나게 야단쳤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내가 바르게 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런 나쁜 짓을 하면서 공부는 해서 무엇하겠느냐.” 어머니는 아들 책을 모두 불태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아들은 구로공단 공원과 백화점 점원을 거쳐 꿈에 그리던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경력이 쌓이자 작은 회사를 창업했다. 회사는 직원 100명이 넘는 큰 세무법인으로 성장했다. 오랜 고생 끝에 ‘징하고 징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스스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목포상고 재학시절의 박점식 회장목포상고 재학시절의 박점식 회장


그가 성공할수록 가족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가장이었다. 근이영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은 커갈수록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부인은 매일 아들을 업어 등하교시킨 후유증으로 앙쪽 무릎 연골이 다 망가졌다. 박 회장은 사업에 바쁘다는 이유로 밖으로 돌며 아내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외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와, 장애를 가진 아들을 간호하며 가정을 꾸려야 하는 아내가 자주 충돌했지만 모른 체했다.


직원들에게도 박 회장은 부담스러운 상사였다. 직원들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눈에서 불똥이 튈 정도로 야단을 쳤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수록 그는 더 날카로워졌다.


정부의 전자세금계산서제도 도입을 계기로 회사의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로 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직원들의 긍정적 사고와 환경 변화라고 생각했다. 종이세금계산서 입력센터를 만들어 기존 업무를 줄였다. 대신 남는 시간을 고객 상담에 집중하도록 했다.


고객과 통화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진상고객’을 직접 찾아가 상담하라니 청천벽력 같은 지시였다. 직원들은 반발했다. ‘직원들 마음을 바꿔야 조직이 사는데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하는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건강하신 어머니와 함께건강하신 어머니와 함께


우연한 기회에 심리학자와 뇌과학자가 쓴 논문을 읽게 됐다. 요지는 ‘하루 다섯가지 감사편지를 쓰면 3주가 지나 스스로 변화를 느끼게 되고, 3개월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변화를 알게 될 것’이라는 요지였다. 뇌가 긍정적으로 바뀐다는 내용이었다. 그날부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나자 스스로 효과를 실감했다. 직원들에게도 감사일기 쓰자고 제안했다. 감사일기 쓰는 직원들이 늘어나자 이번에는 고객에 대한 감사편지를 쓰자고 제안했다. 직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고객을 찾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진상고객에게 감사편지를 쓰라니 기가 막혔다. 감사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더디지만 감사편지를 쓰는 직원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회사 내부통신망에도 감사일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고객에게 감사하고 서로 칭찬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자 고객도 늘어났다.


박 회장은 이때부터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를 향해 1000통의 감사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첫째, 비록 치매에 걸리셨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둘째, 저를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셋째, 경신이 혼미하신 중에도 아들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오면서 어머니와의 좋은 추억을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되돌아보니 어머니는 아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진학의 길을 열어주셨고, 늘 기다려주셨고,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늘 노심초사하셨다. 어려움 속에서 긍정의 힘을 가르쳐주신 어머니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됐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매일 새벽 어머니께 감사의 편지를 썼다.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로 마지막 가족 여행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아들이 운전하느라 술을 마실 수 없으니 그 얼마나 좋으냐”하고 웃으셨다. 자식이 술 못 마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어머니 마음을 썩여 드렸는지 고개가 숙여졌다.


더미라클스 김정호 기부자와 함께더미라클스 김정호 기부자와 함께


어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어머니는 감사편지 1000통을 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630통을 마칠 무렵 세상을 떠나셨다. 박 회장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어머니 영전에 바쳤다. 장례식을 마시자 아들은 남은 370통을 마저 썼다. 1000통의 편지를 쓰면서 아들은 마치 어머니가 뒤에서 안아주시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행복했다.


그는 평생 아들을 돌봤던 부인과 오빠 때문에 늘 모든 것을 양보했던 딸에게 100통의 감사편지를 썼다. 감사의 결과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박 회장 자신이었다. 날카로워 보이던 인상이 누그러지고 대신 편안해 보인다, 젊어졌다는 인사를 듣게 됐다. 결재를 받으러 올 때면 긴장해 사무실 앞에서 여러 번 심호흡하던 직원들이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어머니에 대한 1000통의 감사 편지를 담은 책어머니에 대한 1000통의 감사 편지를 담은 책


2014년 푸르메재단 고액기부자 모임 <더미라클스>가 발족하자 주저 없이 가입했다. 앞서 사회공동모금회의 고액후원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에도 가입했다. 어머니에 대한 감사편지가 그의 모든 것을 바뀌 놓았다. 소설가 김주영은 아들딸이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리는 어머니는 많이 보았지만, 자식이 어머니에게 천 가지 감사를 바쳤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셨고 어려움 속에서 긍정의 힘을 보여주신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을 쓰면서 박점식 회장은 또 다른 삶을 살게 됐다. 어머니가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  더미라클스 가입 문의 : 02-6395-7002 / djdjfk@purme.org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 박점식 회장, 푸르메재단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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