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메 십년지기

권은영 가족 기부자 인터뷰


 


‘친구’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로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일반적으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주고 어려운 순간에 기꺼이 도움을 주는 이를 진정한 친구라고 하지요.


은영이와 효선 씨(가운데)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은영이 가족은 푸르메재단의 십년지기입니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은영이는 ‘유전성 강직성 하반신마비’라는 희귀질환으로 5살부터 푸르메재활센터(현 푸르메어린이발달재활센터)에서 7년, 2016년 개원한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소아재활 2년과 청소년재활 1년까지, 길고 힘겨운 재활생활 10년을 푸르메와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10년간 푸르메재단의 손을 놓지 않은 고마운 기부자이기도 합니다. 2012년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 건립 소식에 은영이 엄마인 효선 씨는 가족 네 명의 이름으로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뒤이어 양가 부모님까지 가족 3대가 장애어린이 지원군으로 총출동했지요. “병원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어요. 은영이만이 아니라 모든 장애어린이가 대기 없이 꾸준히 치료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를 결심했어요.”


완공 후 문을 연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의 기부벽에서 은영과 영진 남매는 자신과 가족들 이름을 볼 때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효선 씨는 “이제껏 다닌 재활시설들과 달리 넓은 공간에 빛이 가득 들어찬 것을 보면서 이 멋진 병원을 짓는 데 타일 두세 개쯤은 보탰다고 생각하니 참 뿌듯했다”며 그때의 행복을 추억합니다.


또 다른 복지 사각지대 ‘청소년 재활’  


박성관 사진작가의 재능기부 프로젝트 '푸르메사진관'에 참여해 사진을 찍은 은영이박성관 사진작가의 재능기부 프로젝트 '푸르메사진관'에 참여해 사진을 찍은 은영이


지난해 중학생이 된 은영이는 새로운 문제를 마주했습니다. “이제껏 어린이 재활이 가장 소외되고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청소년 재활은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에요.”


은영이처럼 운동성 장애를 가진 이들은 청소년기의 급격한 성장으로 근육 변형과 함께 여러 근골격계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어 이 시기의 재활치료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린이 재활치료기관에서는 청소년 재활을 다루지 않고 성인 재활치료는 다수를 차지하는 후천적 장애 위주의 치료라 선척적 장애를 가진 은영이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적절한 기관을 찾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치료에 공백이 생기면, 그 사이 척추측만증 등으로 근육과 골격이 빠르게 변형되면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해요. 오랜 재활치료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좌절감이 크죠. 청소년 재활 분야는 또 다른 사각지대예요.”


국내 복지의 고질적 문제인 통합시스템의 부재는 성장의 중요한 순간마다, 아니 ‘장애’ 판정을 받아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부모에게 짐을 지우고 또 지웁니다. “장애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모가 알아보고 찾아보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해요. 치료와 활동, 학습 등을 통합해서 관리하고 유기적으로 연계해주는 전문적인 컨트롤타워가 절실히 필요해요.”


마음 깊이 간직해온 은영이의 꿈



특수학교가 아닌 특수반이 있는 일반 중학교에 다니는 은영이. 맞춤형 교육을 받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매일 매 순간이 고비입니다. 친구들이 1~2시간이면 끝낼 과제를 은영이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채찍질하며 2~3일간 씨름해야 합니다. 언어소통이 쉽지 않아 앞에 나가 발표를 하는 것도 큰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지요. 장애를 이유로 적당히 타협할 법도 한데, 은영이는 치료와 운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서도 숙제를 마칠 때까지 잠을 자는 법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함에도 제시간에 숙제를 끝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은영아,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1번 공부가 재미있어서, 2번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 3번 그냥?”


씩 웃더니 “2번”이라고 얘기한 은영이. 함께 앉아있던 엄마와 할머니까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은영이의 다음 말을 기다립니다. 힘겹게, 그러나 어느 대답보다 정확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은영이가 내뱉은 단어는 "작가와 화가"입니다.


“시를 쓰고 싶어요.”


은영이의 그림(왼쪽)과 동시 '밀밭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은영이의 그림(왼쪽)과 동시 '밀밭에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가슴 깊숙이 키워온 은영이의 꿈이 처음 세상 빛을 본 순간 ‘장애’라는 현실이 잠시 물러나고 ‘재능’이라는 희망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엄마 효선 씨가 얼굴을 밝히며 “최근에 학교에서 동시를 잘 썼다고 칭찬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시인을 꿈꾸게 됐나 봐요”라고 짐작이 간다는 듯 설명을 덧붙입니다.


2021년,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개원 5주년을 맞아 열린 어린이 그림 공모전에서도 대상을 받았던 은영이. 최근에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7주간 진행한 장애인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 가장 큰 성장을 보인 교육생이라는 평도 받았답니다. “은영이는 상체 근력이 약해서 가로줄 하나를 온전히 그리기도 쉽지 않았는데, 결국 일정 안에 작품 하나를 완성해냈어요. ‘흔들리는 붓선’도 개성이라고 얘기해주는 선생님 덕분에 화가라는 꿈을 키우게 된 것 같아요.”


겨울의 언 땅에 작은 꽃씨가 솟아올라 아름다운 생명을 피워내듯, 은영이는 따뜻한 칭찬 한마디에 장애라는 두터운 갑옷을 뚫고 겨우 얼굴을 내민 여린 꿈들을 강하고 아름답게 키워냅니다.


아름다운, 푸르메의 오래된 친구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자 약속이라도 한 듯 ‘영진’이란 이름과 함께 눈시울을 붉힌 가족들. 은영이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오빠 보고 싶어?”라고 묻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은영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오는 날 외출이 힘든 은영이를 위해 오빠 영진이 대야에 눈을 담아왔다.오빠 영진이 담아온 눈으로 눈사람을 만든 은영이


오빠 영진은 은영이의 유일한 친구입니다. 장애로 또래 친구를 사귀기 힘든 동생을 위해 수업이 끝나면 부지런히 집에 오고, 눈 오는 날이면 은영이를 번쩍 안고 나가 하얗게 덮인 세상을 보여주곤 했지요. 이제는 훌쩍 커버려 안고 나갈 수 없는 동생을 위해 대야를 들고 나가 눈을 담아오는, 여전히 다정한 오빠입니다. 그런 영진의 응원은 은영이에게 늘 큰 힘입니다.


은영이가 숙제와 씨름할 때마다 곁에서 함께 싸워주는 엄마 효선 씨, 그 치열한 삶 속 일상의 구멍을 샐 틈 없이 메꿔주는 외할머니, 할아버지와 은영이를 통해 장애어린이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기부 의지를 불태우는 아빠, 손녀를 위해 고령의 나이임에도 나눔을 결심한 친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의 헌신과 사랑을 거름 삼아 피어난 은영이의 웃음은 여름의 빛처럼 찬란합니다. 오래 생각하고 힘겹게 뱉어낸 말에는 봄꽃처럼 은은한 향이 배어납니다. “꿈이 있어요” “나누면 기분이 좋아져요” “오빠 응원이 가장 행복해요”


은영이(오른쪽)와 노효선 씨 모녀  


‘오래된 친구보다 좋은 거울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름처럼 빛나고, 봄처럼 향기로운 은영이의 가족이 푸르메재단의 오래된 친구라 참 다행입니다. 푸르메도 오랜 친구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이 되겠습니다.


*글= 지화정 대리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지화정 대리, 노효선 기부자 제공


 


권은영 가족의 첫 번째 이야기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