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호흡’ 가족의 행복한 주문

[푸르메인연] 권은영 어린이 가족 기부자


 


“눈...감...아...봐...”

조금은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은영이의 지시를 눈치 빠른 오빠 영진이는 즉시 따랐습니다. 다같이 “하나 둘 셋!”을 외치자 스케치북이 펼쳐졌습니다. 엄마 노효선 씨와 아빠 권형주 씨는 “구슬에 물감 묻혀 굴리고 색칠했구나”하고 은영이가 말하려는 것을 완결된 형태로 표현해 줬습니다. 할아버지 노준한 씨와 할머니 강임순 씨도 다정한 눈길로 은영이를 바라봅니다. 호흡이 척척 맞는 이 가족. 나눔에도 한마음인 기부자 가족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든든함


영하 11도까지 떨어진 한파를 기록한 지난 1월 14일, 은영이네 집은 추위를 무색케 하는 포근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휠체어를 밀어준 친구, 인사를 주고받는 고학년 언니, 학예발표회까지. 학교 가는 걸 무척 좋아하는 천진난만 1학년 신입생의 신나는 학교생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 장애어린이들의 꾸준한 재활치료를 위해 정기기부로 함께하고 있는 권은영 어린이와 가족들.


보행이 불편한 은영이는 푸르메재활센터가 문을 연 2012년부터 매주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를 받아 왔고, 얼마 전부터는 음악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대학병원 외래 진료며 어린이재활병원 수치료 등 거의 날마다 받아야 하는 재활치료로 일주일이 금방 지나갑니다. 초등학교 첫 겨울방학을 맞았지만 치료는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일입니다. 노효선 씨는 두 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방학이 평소보다 분주합니다. 은영이 치료 일정에 영진이 학원 시간을 맞춰 놓고,  치료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돌아오는 동안 잠시라도 혼자 있게 될 영진이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봐 주십니다. 빽빽이 적힌 달력 옆에는 지원군을 자처하는 친정 부모님의 달력이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힘을 보태는 이유…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날짜도 잊을 만큼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푸르메재단 행사 때 본 영상이었습니다. 남들은 망설이는 어린이재활병원을 왜 세우려는지 자세히 알게 된 노효선 씨. 희귀난치병을 가진 아들과 철인3종경기에 도전하는 ‘은총아빠’ 박지훈 씨의 강연에 온 가족과 참석한 날, 은영이 엄마와 아빠는 두 아이의 이름을 더해 기부신청서 4장을 써냈습니다. 며칠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기부에 동참하면서 3대가 함께 푸르메재단의 정기기부자가 되었습니다.




▲ 2012년 푸르메작은음악회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은영이와 영진이(오른쪽 / 푸르메재단 DB).


권형주 씨는 “어린이재활병원은 가장 절실히 와 닿은 문제였기 때문에 당연히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노효선 씨는 “앞으로도 병원을 다니게 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거였어요. 소액이지만 십시일반 힘을 모으면 어린이재활병원이 빨리 지어질 거라는 믿음이 컸죠. 또 병원이 건립돼도 운영이 잘 돼야 치료사들도 안정적으로 일하고 어린이들도 꾸준히 치료받을 수 있으니까요”라며 힘을 보태고 되고 싶은 이유를 말합니다. 재활센터 엄마들에게도 적극 알린 덕분에 몇몇 엄마들이 기부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온 가족이 푸르메재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총출동합니다. 남매가 노래・춤・연주 실력을 뽐낸 작은음악회, 어린이재활병원 기부자 초청행사, 엄홍길 대장과의 걷기행사, 이지선 홍보대사의 토크콘서트까지. 함께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풍성한 기억으로 자리합니다. 영진이는 “보통 치과 장비는 어른 아이 다같이 쓰게 되어 있지만 어린이재활병원은 어린이가 훨씬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인상적”이라며 병원 방문 소감을 전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친구들과 한강을 따라 걷고 그만큼 기부하는 활동도 하고 싶다고 덧붙입니다.


변화를 위한 우선순위 ‘제때 재활치료’


“올해는 걸을 수 있을 거야”라며 손녀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강임순 씨의 말처럼 몸에 힘이 없어서 잘 넘어졌던 은영이는 재활치료를 통해 팔로 짚고 일어서는 게 가능해졌고 다리를 지탱하는 힘도 훨씬 좋아졌습니다. 치료사들의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치료 받은 덕이기도 하지만, 집에서의 재활 연습도 한몫했습니다. “뒤에서 골반을 잡아주고 앞에서 무릎 펴기를 도와주면 걷는 자세가 좋아집니다”라는 노효선 씨의 말을 듣고서야 보조신발, 스탠더, 재활 자전거 등 집안 곳곳 ‘상시 대기’ 중인 치료기구가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 집에서도 재활 훈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되어 있는 치료기구들.


노준한 씨는 꾸준한 재활로 다시 걷게 된 기적을 몸소 겪었습니다. 불과 1년 전, 갑작스레 사지가 마비되는 희귀질환을 진단받고 병원을 전전하며 입원치료를 받았습니다. 남은 생애 걷는 게 소원이라던 할아버지는 물리 치료와 작업치료를 통해 60% 가까이 회복된 상태. “재활은 끝이 없어요. 개인의 힘만으로는 평생을 감당하기 힘들죠.” 오늘도 한 발 내딛기 위해 노력하는 손녀와 수많은 장애어린이들에게 재활치료가 큰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은영이.


어디를 가든 불편한 상황과 맞닥트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불쾌한 시선을 감내해야 합니다. 바퀴 색깔이 알록달록해 유난히 돋보이는 모델로 은영이의 휠체어가 바뀐 이유이기도 합니다. 은영이에겐 “예쁜 아이가 예쁜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쳐다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미국 동부 가족여행 때 대중교통과 엘리베이터 탑승 시 미국인들이 여유롭게 기다리는 모습에 놀랐다는 권형주 씨. “장애인은 비장애인처럼 평범한 사람으로서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죠. 외국보다 한국이 더 낫다는 말을 언제쯤 하게 될까요?” 그러면서 아이가 아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일들에 대한 시야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합니다.




▲ “나눔은 행복입니다!” 은영이의 또래 친구들을 위해 나눔으로 함께하고 있는 가족들.


“어릴 때 치료를 받으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성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데, 정부 정책에서 재활치료는 늘 우선순위 상 뒤로 밀려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전국에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더 많이 생겨나길 간절히 바란다는 가족들. 나눔은 “행복”임을 가족들의 환한 얼굴로 보여주는 은영이네는 앞으로도 ‘우리 가족’을 넘어 또 다른 장애어린이 ‘가족들’을 위해 다채로운 색으로 행복의 그림을 그려나갈 것입니다.


*글, 사진=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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