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교통사고전문 재활병원
문병 온 친지들을 맞을 수 있는 공간은 고사하고 작은 병실안에 환자의 두 배가 넘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 및 간병인과 24시간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환자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안정이다. 국내 병원에서 환자가 안정을 찾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 있는 병원에 입원조차 못해 몇 달씩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이다. 그들 눈에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조차 선택받은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교역량 11위의 경제대국에 올라섰지만 의료서비스분야에서만은 중립국을 벗어나 후진국에 가깝다고 본다. 우리와 경제규모가 비슷한 국가들의 의료현실과 비교해 보면 격차가 두드러진다. 유럽 선진국 병원은 더욱이 우리와 천량지차다. 말 그대로 별세계다. 이들 병원에서는 다른 환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18, 19세기 유럽질서를 주도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제국의 수도이다. 과거 헝가리와 체코, 루마니아, 폴란드, 유고,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까지 어우르던 제국은 근대국가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해체되고 두 번에 걸친 세전의 패배 결과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택했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함께 장애인, 노인, 어린이에 대한 사회복지정책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2006년 기준으로 1인당 GNP 33,615달러, 세계 8위의 부국인 오스트리아는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과 함께 세계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발달한 국가로 꼽힌다.
비엔나에 있는 크로스터노이부르크 재활병원(바이세호프 교통사고 전문병원)은 서구유럽의 병원중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재활병원일 것이다. 600년 古都 비엔나를 가르는 도나우강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수백년은 됐을 것 같은 한적한 국도가 나왔다. 이 길을 30분쯤 올라가자 갑자기 웅장한 돔 건축물이 앞길을 가로 막았다. 클로스터호프(Klosterhof)라는 중세수도원이다.
흰색과 노란색으로 채색된 건물이 사관생도처럼 절도 있어 보인다. 수도원이 최근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과 수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병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수도원 정문옆에 작은 글씨로 바이세 호프(하얀 뒷마당) 교통사고 재활병원이라는 작은 표말을 발견했다.
수도원에서 병원까지 이어지는 길은 하늘을 빽빽이 가린 전나무 숲으로 인해 마치 오대산 자락에 들어온 것 같다. 도시 외곽에 이런 울창한 숲이 있다니 부럽다. 숲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갑자기 거대한 초원이 펼쳐졌고 그 중앙에 웅장한 중세성처럼 바이세호프 사고전문병원이 버티고 섰다.
병원 현관에서 우리를 맞은 것은 비뇨기과 전문의인 부원장 메르크 라이문트 박사였다. 비뇨기과 전문의가 비엔나에서 가장 큰 재활병원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다니 놀랍다. 우리의 경우, 재활병원 의료진은 당연히 재활의학을 전공한 전문의일텐데 유럽에서는 소아과나 내과, 외과 등의 각 분야를 전공한 전문의가 다시 재활의학을 공부해 전공분야를 지닌 채 재활병원에 근무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훨씬 더 전문적인 치료가 이루어질 것 같다. 라이문트 박사는 “교통사고는 팔과 다리 같은 외부 기관 뿐 아니라 간, 콩팥, 방광, 전립선 등 내부 기관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한다.
1986년 보험회사에 의해 설립된 바이세호프 병원은 여의도 면적의 절반인 40만평의 초원위에 □자 형태로 치료동과 입원동, 의료진 숙소, 문화시설 등 총 6개 건물이 연이어 붙어있다. 설치된 재활의학과, 신경과, 정형외과, 비뇨기과 외에도 일주일에 하루 외래의사가 와서 내과, 산부인과, 피부과, 안과, 이비인후과 진료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병상은 200개. 200병상의 병원에는 의사 14명, 간호사 80명, 물리치료사 26명, 작업치료사 13명, 언어치료 2명, 음악치료 2명, 환자 상담사 4명 등 모두 309명의 의료진이 일하고 있다니 환자 1명당 1.5명의 의료진이 있는 셈이다.
척수 환자가 이 병원의 입원자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는 뇌질환 환자와 사고로 인한 절단환자, 질병으로 인해 뼈와 근육기능이 저하돼 재활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다. 환자의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지만 인근 국가로도 이름이 알려지면서 헝가리나 이탈리아에서도 온다. 외국 환자의 경우 하루 360유로(40만원), 1달에 1만유로(1200만원)를 내야한다. 오스트리아 국민의 경우 국가와 보험회사에서 장애정도에 따라 병원비는 물론 일상생활에 필요한 안경, 옷, 신발까지 부담하고 있다. ‘국민복지와 사회보장제도가 이런 것 이구나’
4층으로 이루어진 병동은 각 층당 50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다. 병원의 특징은 채광과 환자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해 설계됐다는 점이다. 병실은 물론 지하1, 2층의 작업실과 통로까지 최대한 자연채광을 활용하도록 한 것이 신기하다. 전등 몇 개를 켜면 될텐데 높은 곳에 아름다운 천창을 만들었다. 자연빛이 환자들의 정서에 주는 순기능뿐 아니라 에너지 절약차원에서도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라이문트 박사는 “경사면을 활용해 세워진 이 병원건물은 1층과 2층, 지하 1층 어디서나 환자가 램프를 이용해 병동 주위에 조성된 정원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한 병실을 방문했다. 2인실인데 휠체어에 앉은 청년 혼자 열심히 핸드폰 버튼을 누르고 있다. “질문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양해를 구하자 그는 웃는 얼굴로 “Barum nicht?(왜 안되겠느냐)”라고 흔쾌히 대답한다. 21살 쿠어트. 동안(童顔)의 청년이다. 그는 2006년 10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자동차와 사고가 나면서 척수를 다쳤다. 전신마비가 됐지만 이 병원에서 6개월 동안의 치료 끝에 상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 5개월 더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쿠어트는 “퇴원할 때쯤이면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웃는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그 앞에서 우리들이 숙연한데 그는 밝고 당당하다. 쿠어트의 병실 동료는 6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날씨가 화창하자 아예 병상을 테라스로 끌고 나가 열심히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환자가 침상을 끌고 다니며 햇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이 큰 병원에 외래환자가 하루 고작 2~3명이라고 한다. 주로 척추를 다친 사람들이다. “외래환자 왜 이렇게 적느냐?”고 묻자 라이문트 박사는 “오스트리아는 각 지역마다 재활병원이 있기 때문에 주로 입원치료 중심이며 외래환자의 경우에도 퇴원을 한 뒤 재교육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병동은 벽면과 천장이 모두 나무와 벽돌을 이용해 마치 가정집 같은 분위기가 났다. 각층에는 간호사실과 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형 거실이 가운데 있다. 간호사들은 병실에 연결된 모니터를 통해 환자를 관찰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달려가곤 했다. 병실과 화장실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넓다. 처음에는 한국에 비해 너무 넓다고 생각했지만 병원을 찾아 다니면 다닐수록 환자를 위한 공간은 최대한 넓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인 병실은 대부분 우리로 치면 20평 아파트 한 채와 같은 규모다. 화장실도 10평은 넘을 것 같아 ‘우리 같으면 이곳에 VIP병실을 세울 수 있겠구나’ 하는 우스개 생각을 했다. 사실 환자가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모든 환자가 VIP인 셈이다. 병실 한쪽에는 테라스가 연결돼 있다. 테라스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환자들은 아파서 입원한 것이 아니라 해변에 놀러온 관광객 같다. 70대 환자에게 “왜 여기 나와 있느냐?”고 물자 그는 “이렇게 좋은 날 환자가 병실에 있어야만 하느냐? 나는 가족들과 여기로 소풍 나왔다.”고 대답한다.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AUVA라는 보험회사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정부나 민간기관이 아닌 비영리성격의 보험회사가 병원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보험회사하면 영리법인인데 비영리적 성격이 강하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민간 보험회사가 법정 보험을 대신한다. 국가와 사회보험이 하나의 수레바퀴처럼 국민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독일이나 스웨덴 등 서구선진국의 개인 소득자의 급여중 소득세의 비율이 남편은 40%에 달하고 맞벌이를 하는 부인의 경우 50%를 넘는다. 개인이 내는 세금은 주로 의료와 교육, 연금 분야에 집중돼 사회보장정책의 근간이 되고 있다. 국가에서 의료비를 지급하고 있는 보험회사 특히, 사고를 전담하는 보험회사의 경우 국가 의료정책을 실현하는 곳으로 공적인 요소가 강하다.
“회사재정에 문제가 없느냐?”고 묻자 라이문트 박사는 “책정된 보험료로 충당되고 있으며 병원에서는 환자를 위해 치료만 잘하면 되지. 왜 우리가 병원재정을 걱정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하긴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인데 우리 상황에서는 늘 재정을 걱정해야 하니까? 유럽의 병원이나 장애인시설을 방문할 때 마다 혼란스러운 것은‘이 좋은 시설이 어떻게 세워지고 운영될 수 있을가?’ 하는 것이다. 이때 마다 ‘보험료는 어떻게 책정되느냐? 그 돈으로 적자가 발생되지 않는가?’ 등등의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한결같이 “왜 민간재단에서 이런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병원을 지으려고 하느냐? 시민들 위한 공적인 일인데 왜 지자체나 정부가 나서지 않는가? 왜 정부에서 재정을 걱정하지 않고 당신이 걱정하느냐?”는 대답이었다. 이런 말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아예 국내의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답이 “한국에 단 하나뿐인 아름다운 병원을 지으려고 한다”설명했다.
병원이 가진 또다른 특징은 직업재활치료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치료실과 작업장이 있는 지하1층을 찾았다. 입구부터 나무와 판석, 벽돌 등 서로 다른 소재를 이용해 바닥을 깔았다. 환자의 감각을 일깨우면서 걷는 자세를 교정하기위한 것이라고 한다. 작업치료실에는 교통사고 및 근육무력증 환자가 신체에 맞는 도구를 만드는 공간이 있다. 어깨와 팔을 쓸 수 없다는 한 남자는 과일이나 빵을 자를 때 쓰기위해 손잡이가 부착된 칼을 자신의 손에 맞게 주문하고 있었다. 신체 모양과 근력정도에 맞게 제작된 도구는 앞으로 이들이 살아가는데 손과 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같으면 보호자가 옆에서 모든 것을 해줄텐데 이곳에서는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치료실 맞은편에는 각종 목재, 스테인드글라스, 철제를 이용해 작업을 할 수 있는 넒은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한 남자가 시벌껗게 달구워진 쇠를 모루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 그의 왼쪽 다리가 의족이다.
레오 하예크(53)는 30년전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사고로 왼쪽 무릎위를 잃었다고 한다. ‘진짜 대장장인가’할 정도로 능숙하게 일하는 있는데 실제 직업은 중학교 독일어와 실업교사라고 한다. 새로 의족을 이 병원에서 맞춘 후 몸에 맞는 지 알아보러 왔다고 한다. “7년마다 의족을 새로 교환하는데 이곳에 머무르면서 의족을 맞춰보고 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의족을 몸에 맞추는 적응훈련을 할 예정이다” 절단환자에게 있어 의수족은 생활에 필요한 도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분이다.
새로 구성된 몸의 일부를 적응시키기 위해 원하는 시간에 병원에서 재활훈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모습이다.
유럽의 병원이 그렇듯 이 병원의 수영장도 정말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수치료를 겸해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작은 풀은 항상 29-31도를 유지한다. 몸을 잘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이 수치료를 받는 큰 풀에는 치료사가 요구하는 동작을 7-8명의 환자들이 신나게 따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찡그린 얼굴이 없다. 모두 웃으며 정말 재미있어한다. 우리의 경우 대부분의 환자들이 힘들고 어두운 표정인데 치료를 재미있는 게임을 하듯 웃고 농담하고 떠드는 모습이 내겐 낯설다.
수영장 정면에는 벌거벗은 여성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담은 벽화가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물리치료사인 한스에게 물었다. “특별히 이곳에 여성의 나신을 그린 이유가 있느냐?”고. 한스는 “유명한 예술가가 그린 것으로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는 모두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대답에 “그렇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신체와 성에 대해 솔직한 것이 이들의 삶이 아닌가.
체육관에서는 남녀 젊은이 8명이 두 개의 코트에서 열심히 배드민튼을 치고 있었다. 아마 직원과 환자인듯 했다. 바닥을 제외한 모든 곳을 아름다운 무늬목으로 마감해서 인지 체육관하면 철제와 콘크리트만 연상됐던 나에게 이곳은 거실 같은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설계된 천정과 옆면을 통해 5월의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최근 오스트리아 휠체어 테니스 선수가 세계테니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장애인들 사이에도 휠체어 테니스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사이에도 휠체어 테니스 붐이 일고 있다. 병원에서는 이들을 위해 의족제작과 연구 뿐 아니라 스포츠를 위한 휠체어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고 라이문트 박사는 설명한다.
통상적으로 오스트리아 병원에서는 환자가 3~4주 입원을 할 수 있지만 의료진이 재활효과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환자들은 1년이 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환자가 필요한 만큼 입원할 수 있고 경비를 정부에서 전적으로 부담한다는 것은 환자에게 구원이 아닐 수 없다. 좋은 병원 시설과 재활을 위해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오스트리아는 복지천국이다. 남한 면적에 인구 800만명, 국민소득 3만 3천 달러의 작은 선진국이지만 국민복지의 척도는 아마 우리의 몇 배가 되지 않을까.
10년 만에 찾아온 더위 덕분에 유럽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한다. 4월 한달 내내 25도가 넘는 따뜻한 날씨(?)에 비까지 뿌리지 않는다. 아마 이런 이유로 해서 사막이 없는 스페인의 중앙에는 사막화가 가속되고 있나보다. 예년 같으면 오스트리아 산악지방에는 눈발이 날렸을 시기에 오스트리아는 뜨겁게 달구어져 가로수로 심어진 마로니에는 하얗고 빨간 꽃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병원을 둘러쌓고 있는 수천 그루의 마로니에 나무에는 수만개의 촛불처럼 꽃을 밝히고 있다. 바야흐로 마로니에 신록의 계절이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