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나가는 곳”을 알려주마 [시각장애인밴드 4번출구]

 



4번출구.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분명 연습실이 있는 곳이 지하철 역 4번 출구 앞일게다. 그러나 교대역 14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는 찾아오는 길 설명에 의아해졌다. 14번출구를 줄여서 4번 출구인가?  


밴드 4번출구의 멤버 다섯 명은 모두 살다가 장애를 가지게 된 중도 장애인이다. 시각장애는 2~3년 전까지 남 부럽지 않게 회사원이나 학생으로 생활하던 멤버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세상의 빛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선고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4번은 死번이다. 빛과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었다. 그렇다고 그 절망 속에 계속 머무를 수도 없는 일. “비상구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출구로 나가야한다, 죽음 같은 좌절에 빠진 다른 이들이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줄 출구가 되고 싶다.” 이렇게 밴드의 방향은 정해졌다.


 



1. 베이스 기타를 치는 고재혁 씨(30).

아직까지는 약시이지만 시각 장애는 진행 중이다. 고등학교 시절 락을 좋아해서 기타를 배우게 된 전형적인 기타 키드(Kid)출신이다. “전자기타를 사기만 하면 묵직한 전자음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띵띠리~’ 소리밖에 안 나더라”면서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를 회상했다. 눈이 안 좋아 질 것이라는 것은 어릴 적부터 알았지만 약 2년 전부터 급격하게 나빠져 지금은 안마사 수련원에 다니고 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그에게 20대에 이루고 싶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못다 태운 열정은 아직 남아서 앰프에서 증폭되고 있다.


2. 기타를 치는 김남동 씨(32).

그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은 듯 했다. 이펙터(기타의 음색을 바꾸어주는 보조 장치)를 가져오지 않아서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아쉬워하셨다. 전자기타는 앰프의 세팅에 의해서 워낙 소리가 많이 변하기 때문에 눈이 좋은 사람들도 적절한 소리를 잡기 힘들다. 남동 씨는 손과 귀에 의지하여 10개 가까운 노브(손잡이)를 돌려가며 아름다운 소리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저 많은 지판들을 몸으로 다 익히셨는지 솔로 연주도 멋들어지게 선보이셨다.


3. 키보드를 담당하는 김대성 씨(46).

그는 아주 조금은 볼 수 있다. 그러나 피아노 건반들을 다 구별해내기는 힘들다. 거의 귀에 의존해서 3개음, 4개음으로 어려운 화음들을 소화해내었다. 볼륨 조절도 능숙하게 하면서 솔로 연주까지 해내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주관적 시각으로 봤을 땐 연예인을 하셔도 될 만큼 외모가 출중하셨다.


4. 드럼을 맡고 계신 큰 형님 황태연 씨(50).

열정적인 연주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나중에는 웃통을 반쯤 벗으시는 진정한 락커의 영혼을 보여주셨다. 눈이 조금은 보이시는데 요즘 술을 많이 드셔서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고 걱정하셨다.


5. 밴드의 보컬과 리더를 맡고 계신 한창수 씨(47)(오른쪽).

3년 전만 해도 한국 타이어에서 근무하던 잘 나가는 산업역군이었다. 또한 대학교 때는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하는 잘 나가는 엔터테이너였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 경우처럼 갑자기 찾아온 장애는 그에게서 직업을 앗아갔고, 취미로 즐기던 음악은 그에게 새로운 탈출구가 되었다.


이렇듯 색다른 밴드 4번출구의 시작은 실로암 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악기를 가르쳐주던 프로그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각장애인 선생님들에게서 악기를 배우던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진 수강생들이 자발적으로 밴드를 결성한 것이다. 복지관 이름을 딴 ‘실로암 밴드’는 2005년 결성된 후 ‘4번출구’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면서 2006년에만 8차례 공연을 치러냈다.


2년동안 한 번도 해체의 위기가 없었다. 처음 결성할 때부터 실력보다는 희망에 대한 신념, 끝까지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결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예상하듯 쉽지 않은 길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 역사에서 10명도 안 되는 관객 앞에서 공연 한 적도 있었고, 비 때문에 행사가 취소되어 힘들게 찾아간 행사장에서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들의 꿈의 크기는 어디까지 일까? 자신들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노래도 만들고 자선 공연을 상시적으로 해서 좌절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도 주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즐거움을 선사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쯤에서 -고백 아닌 고백이 되겠지만- 한 때 음악을 조금 했던 필자의 판단으로 이들의 연주에 점수를 매겨본다면?


솔직히, 헤아리기 힘들다. 사실 박자가 잘 맞는 것도 아니고 멋진 선율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악보도 필요 없고 기호나 설명이 필요 없는 ‘그들만의’ 음악은 이미 자유의 영역에 있는 듯하다. 음악 안에서 만큼은 한 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그들이 밴드를 하는 속 깊은 이유가 아닐까?


불편함의 정도가 다를 뿐, 나도, 다른 그 누구도,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 -신체적으로든, 사회에서든, 가족에서든, 정신적으로든- 을 뛰어 넘고 싶어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이 땅에 널리고 널린 밴드 중에 많은데 이들의 합심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단지 장애를 이겨내고 음악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쉽게 박수를 쳐주고는 진정 존경심을 가지고 경청하거나 감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시각장애인의 밴드라는 꼬리표를 떼버리고 평가할 때, 그들의 음악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음악에 그들만의 감수성이 배어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얘기하는 희망은 다른 밴드들이 말하는 희망과는 원산지가 다른 술이요, 그들이 느끼는 자유는 다른 밴드들이 느끼는 자유와 흘러가는 높이가 다른 구름이다.


귀로 들은 음악에 대해서 글로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려운 일인지. 이쯤 되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궁금할 만도 할 것 같다. 궁금증을 풀고 싶다면, 그들만의 진한 감수성을 느껴보고 싶다면, 달리기는 안 해도 되니깐 그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4월 21일 올림픽 공원 행사장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글,사진 / 성용욱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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