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아요! 캠페인] 홍명보,내가 멈출 수 없는 이유


언젠가 우연히 들어간 인터넷 사이트에서 저에 대한 프로필을 보게 됐습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라는 수식어 아래 있는 선수 경력 등을 보면서 그동안 지나왔던 기억들이 하이라이트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선수시절의 저를 기억해주시는 많은 분들과 그들로부터 과분한 평가를 들으며,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해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대표 경력과 수상 기록은 제가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듯, 누구에게나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의 시기가 존재하며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저 공차는 게 좋아서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작고 왜소했던 체격 조건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물론 타고난 체격 조건만으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갈고 닦아야 훌륭한 선수로 거듭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살 나이차에도 주눅 드는 것이 어린 시절이 아닙니까. 동기들보다 작고 초라한 제 체격 조건은 운동을 하면서 넘기 힘든 장애물이었습니다.


축구대회에 나가 경기를 하다보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떡 벌어진 어깨와 한 뼘 이상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 그리고 두 달음은 더 달려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보폭이 넓은 롱다리들이 항상 제 앞에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같은 나이, 같은 또래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는 선수들이었습니다. 저에게 너무 큰 시련이었습니다.


저와 마주쳐야하는 상대에게 저는 작은 꼬마선수였고, 언제라도 밀어낼 수 있는 별 것도 아닌 존재였는 지 모릅니다. 그때는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병원에서 꼼꼼히 처방을 해주고 도움을 주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신체에 대한 핸디캡은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힘껏 그들과 부딪혀도, 온 힘을 다해 점프해 봐도, 체격 조건이 좋은 친구들과는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쓰러지고 부서지는 것은 항상 저였습니다. 평생 이런 상대들과 축구를 해야 한다면 저는 축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고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서 시작한 운동이었고, 열심히 참고 견디며 최고가 되겠다는 열정은 누구보다 많았습니다. 키 크는 것은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것에서 앞선다면 나는 그들보다 나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를 채찍질 했습니다.


몸싸움을 하면 항상 쓰러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이 접근하기 전에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우리 선수에게 정확한 패스를 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똑같이

점프해서 이길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한 걸음 달릴 때 두 걸음 이상을 뛰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매일을 달렸습니다.


프로 선수가 되고, 대표 선수가 된 이후에도 홍명보는 수비수로서 대인 마크가 약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월드컵을 4회 연속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다른 부분들, 예를 들어 패스 능력이라던가, 경기를 보는 시야, 볼의 방향과 위치를 먼저 읽고 선점하는 부분에 대해 당시 감독님들이 높게 평가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저를 선발한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더욱 노력했습니다.


저는 제가 최고 선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2년 이룩한 월드컵 4강 신화는 감독님비롯한 스텝들, 혼신의 힘으로 그라운드를 내달린 선수들, 열정적으로 응원한 국민들의 성원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제게 2002 월드컵 브론즈볼이라는 영광이 주어진 것은 제가 대표팀 주장이었기에 다른 선수들을 대신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 중 천부적인 능력으로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으며 성장하는 선수들도 있지만,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한 선수들이 더 많습니다. 펠레 이후 가장 주목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축구천재 마라도나는 170cm 남짓한 작은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월드컵을 제패한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마라도나 역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며 음악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스티비 원더는 흑인이라는 인종차별과 가난한 환경, 그리고 시각장애인이라는 세 가지 장애를 극복하고 하모니카 연주와 노래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그가 성공하는데 타고난 재능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과 장애를 극복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삶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단지 어떠한 특정 분야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 일들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신체적인 단점을 극복하고 선수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저에게 급작스럽게 찾아온 부상으로 운동을 멈춰야 했던 때와 사실과 다른 소문 때문에 괴로워해야 했던 순간은 지금 돌아봐도 가슴이 아픈 추억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 목표를 향해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열정과 의지는 어려움을 뛰어 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단한 노력은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대표팀 코치로 있는 저는 현재 제가 운영하는 장학재단과 축구교실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느끼는 세상은 그라운드를 달리며 느꼈던 세상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열정과 의지로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은 없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축구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그리고 또 다른 목표를 위해 달리는 사람으로, 홍명보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치지 않는 열정과 의지가 있는 한 저는 언제나 달리고 또 달릴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꿈을 향해 달려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홍명보


고려대 시절 수비수로 주목받기 시작해 90년대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로, 세계 올스타와 FIFA선수위원에 뽑혔다. 90년 2월 노르웨이전으로 A매치에 데뷔한 이후 한국선수로는 가장 많은 A매치 135회 출장기록을 남겼고, 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아 아시아 선수 최초로 'FIFA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2004년엔 FIFA 창립 100돌을 맞아 '현존하는 세계 축구 100대 스타에 선정됐다. 2002년 11월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 현재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으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홍명보 장학재단'과 '축구교실'을 운영하는 등 지도자로서 축구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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