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장애를 받아들이고 극복한 빌 메이져스 목사/ 영락교회


 지난밤 하얗게 눈이 내렸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든 눈은 이내 녹아내려 도로에 꽁꽁 얼어 붙었다. 눈 소식에 기뻐하던 사람들은 빙판길에 짜증을 낸다. 기쁨은 실망이 되기 쉽고 야망은 절망을 동반한다. 사춘기 선교사가 되겠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동양의 타국에 헌신했던 외국인이 그 길에서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었다. 빙판길처럼 꽁꽁 얼어 버렸을 그의 마음을 녹인 건 무엇일까?


25년 전 외국인 선교사로 들어와 이제는 한국인 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미국출신 선교사 영락교회 빌 메이져스 목사를 만났다. 한국말을 잘한다고는 들었는데 아무래도 짧은 영어 실력 탓에 마음이 불안한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인터뷰는 시작됐다.



어떻게 선교사가 되셨어요?


중학교 때 처음으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교회 여름수련회에 갔다가 강사로 오신 분이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사업가가 되고 싶은 사람?" 해서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었지요. 마지막으로 선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 손을 들라 하셨는데 손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때 그 분이 "대통령이 되고 사업가가 되는 일도 소중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일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감동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영어로 짧게 건넨 질문에 유창한 한국어 답변이 돌아왔다. 안심이다.


 



한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선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빨리 선교지에 나가일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디서 오라는 곳이 없는 거에요. 그래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가 한국사람이었는데 어느날 한국 청소년단체에서 여름방학 동안 영어를 가르칠 선생님을 구한다는 거에요. 나는 한국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했더니 이 친구가 한국에는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에요. 그래서 서둘러 비행기 편도표만 끊고 한국에 오게 되었지요. 2달 일정으로 처음 온 도착한 때가 1982년 6월 이었으니 어느새 25년이 다 돼 가네요.


광주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의정부 성신보육원에서 4년동안 일을 했습니다. 당시 같이 일했던 여성과 결혼을 했구요. 저를 한국에 소개한 룸메이트의 아버지가 지금 극동방송 사장이신 김장환 목사님이세요. 그게 인연이 돼 영락교회에서 예배 동시통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분의 권유로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현지에서도 한인교회 학생부를 맡아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행사를 준비하다가 4~5m 높이의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어요. 바로 응급실로 실려가서 뇌수술을 받고 11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죠. 사고 이후 집중력이 약해져서 심할 때는 책을 읽어도 내용을 기억할 수가 없었어요.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교수님들이 저의 약점을 보지 않고 잘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어요. 학업을 지속하고 학위를 마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죠.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으셨을 때는 심정이 어떠셨어요?


처음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 의사 질문에 한국말로 대답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의사가 한국어를 알 리가 없으니 헛소리를 한다고 진단을 했죠. 아내가 들어와보니 제가 의사에게 한국말로 계속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언어를 관장하는 부분은 멀쩡해서 대화에 지장이 없었던 거죠. 불편한 부분이 있지만 지금은 장애를 잘 극복하고 큰 불편없이 살고 있습니다.

사고를 통해 잃은 것 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당시 저는 성격이 강해 아내가 고생이 많았는데 사고를 통해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어요. 신앙의 측면에서 전에는 합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를 다치고 나니 감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영적으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풍성한 경험들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힘든 시간이셨을 텐데 한국에 다시 돌아오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사고 이후 치료기간 동안 제가 다니던 한인교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평생 일하고 싶은 교회였거든요. 저를 미국에 보냈던 분으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가 자기 책임이라고… 죽음을 경험하고 나니 다시 내가 걸어갈 길이 분명해지더라구요.


이즈음 그의 눈가가 붉어지는 듯 했다. 누구에게든 어려운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은 지나고 나면 아름답기 마련이다.


한국의 장애인을 위한 환경은 어떻습니까?

미국과 비교해서요? 제가 기억하는 건 20년 전 일이라 그런 질문은 지금 막 들어온 미국인들에게 하시는 게 낫겠네요(웃음)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처음 한국에 올 때 쯤 미국은 횡단보도에 턱을 없앤다든지 하는 장애인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어요. 한국은 그보다 많이 늦은 것이 사실이에요. 산업화되는 기간 동안 그럴만한 여유를 갖지 못한 거죠. 그러나 20여년 전 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늦은 만큼 빨리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욱 좋아지겠지요.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렵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선진국 외국인에 대해서는 호의적입니다. 80~90년대 까지만해도 선진국의 외국인에 대해서는 선생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해외여행이나 연수도 많이 다녀오고 해서 외국인을 친구로 생각하는 문화가 많이 자리잡힌 것 같아요. 반면 아직도 후진국 외국인에 대해서는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죠. 한국은 빠르게 국제화되고 있어요. 앞으로 인구의 10%가 외국인이 되는 시간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외국인 노동자나 산업연수생의 자녀들이 한국 학교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폭이 더욱 넓어졌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계획은 어떤 것이 있으세요?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가끔 아이들이 다 성장하고 우리 부부만 있게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봐요. 미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막상 한국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이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돼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 모국어보다 더 익숙해진 언어와 습관들, 나도 모르게 한국인이 되어버린 것이죠.


할 수 있다면 이 곳에서 제 역할은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가이드가 되는 일인 것 같아요. 선진국 출신이건 후진국 출신이건 외국인은 그 사회에서 아무래도 마이너리티일 수 밖에 없어요. 그들에게 실질적인 정보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이버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어요.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이고 게다가 백인이라면 누구나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살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40대 한국남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47세. 그에게도 한국사회에서 40대가 느끼는 벽은 여전히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문제인 듯 하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이제 아기예수가 이 세상에 내려온 성탄절이다. 아기예수가 세상에 온 이유는 아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랬기 때문일거다. 사춘기 시절 꿈을 실현하고 있는 그를 보면 현실이 어땠든 행복해 보인다. 우리가 선한 뜻을 가졌다면 하늘은 우리의 선한 꿈을 이루기 위해 도와줄 것이다. 아기예수가 이 땅에 내려온 이유가 그렇듯 말이다.


만난사람=푸르메재단 최병훈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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