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조용한 힘

세상을 바꾸는 조용한 힘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시민옹호사업 인터뷰


“기차 타고 가요. 자리마다 서로 이야기 나누어요.” 책 속의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는 전경옥 씨. 옆에 앉은 고정순 씨도 문장을 따라 읽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글자로도 씁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글씨를 쓰는 동안 뿌듯한 미소가 번집니다.


“지난번에도 글씨 예쁘게 썼는데! 그 노트는 두고 왔네요. 여기 오늘 쓴 문장, 집에 가서도 꼭 한 번 써보셔요!” 경옥 씨는 정순 씨와 같이 읽고 써본 문장을 다시 새 종이에 적어주었습니다. 정순 씨도 경옥 씨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민옹호인 경옥 씨와 발달장애인 정순 씨는 지난 2022년 처음 만났습니다. 비장애 지역 주민과 장애 당사자가 공동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임을 직접 구성·운영하는 과천시장애인복지관의 주민 참여형 활동 ‘스몰스파크(Small Spark)’에서 인연이 닿았지요. 이후 서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시민옹호사업 활동도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니랑 있으면 재밌고 행복해요! 언니는 제 친구예요.” 경옥 씨를 ‘언니’라고 부르는 정순 씨. 지금 두 사람은 자매 같은 동네 친구로 지내는 중입니다.


발달장애인 고정순 씨(왼쪽)와 시민옹호인 전경옥 씨(오른쪽).두 사람은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시민옹호사업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고정순 씨(왼쪽)와 시민옹호인 전경옥 씨(오른쪽).
두 사람은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시민옹호사업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장애 당사자를 주체로 한 관계 중심의 활동


과천시장애인복지관의 시민옹호사업은 지난 2016년, ‘어떻게 하면 장애 당사자가 지역사회 안에서 더 편안하게 자립하고 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최근 장애인 복지는 보호와 시혜 중심에서 장애인을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며 지역사회에서의 독립적인 삶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시민옹호사업은 이 변화의 중심에서, 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자립하며 구성원으로 지낼 수 있도록 관계 중심의 활동을 지향합니다. 과천시장애인복지관을 시작으로 전국의 장애인복지관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민옹호인 양성 교육을 시작으로 장애인과의 관계 형성, 개별 및 그룹 옹호, 지역사회 참여, 장애인식개선 활동 등 다양한 규모와 운영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장애 당사자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며 응원합니다. 2025년 기준 총 189명의 시민옹호인이 양성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444명의 장애인이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함께 만드는 선한 영향력


경옥 씨와 정순 씨는 주 1~2회씩 꾸준히 만나왔습니다. 동네를 산책하거나 전시회를 보러 가고, 서로를 집에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요. 하루는 글을 읽고 쓰는 데 이어 모음과 자음 블록으로 글자를 만드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정순 씨 이름에 있는 ‘고’ 자예요. 똑같은 글자가 어디 있는지 천천히 찾아봐요.” 비슷한 모양이 그려진 블록들 사이에서 망설이곤 했지만, 이내 정순 씨는 꼭 맞는 블록을 찾아 글자를 완성했습니다.


“정순 씨는 대화하는 걸 좋아해요. 만날 때면 티타임이나 나들이 등 둘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게 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정순 씨가 글쓰기와 읽기도 잘하면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다음 주에는 다른 이웃들도 만나기로 했어요. 그날 무얼 하며 보낼지 같이 정해야 해요.”



지역사회와 주민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경옥 씨는 지난 2020년 시민옹호인 양성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교직에 있던 경력을 살려 2022년부터는 인권 공부 모임 ‘사이너머’의 창립 회원으로서 인권을 주제로 한 시민옹호인 실천 모임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독서 토론, 장애인식개선 캠페인, 체험부스 운영 등 장애인도 함께할 수 있는 개별 옹호 활동으로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시민옹호인 활동을 하면서 제게 더 많은 변화가 찾아왔어요. 내향적인 성향인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더라고요. 공감과 연대가 마음먹은 만큼 되지 않아 실망하는 순간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시민옹호활동으로 장애 당사자는 물론 시민옹호인도 자신감과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시민옹호인과 당사자의 선한 영향력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요.”


 


일상을 나누며 진정한 친구로


국어 공부를 마치고, 정순 씨는 경옥 씨를 향해 종이와 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언니, 이 고양이 그림 같이 그려줘요.” 정순 씨는 자기 가방에서 고양이가 그려진 엽서를 꺼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정순 씨를 위해 이전에 경옥 씨가 준 선물이었습니다. 이처럼 경옥 씨와 정순 씨는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아니어도 서로의 안부를 챙기곤 합니다.


국어 공부를 마친 두 사람은 마트로 향했습니다. 나란히 걷는 길에 카페와 약국이 보이자, 예전에 같이 갔던 곳이라며 반가움을 드러냈습니다. 이어진 빵 가게를 향해서는 이전에 경옥 씨와 갔던 토스트 가게가 더 맛있었다며, 정순 씨는 다음에 또 같이 가자고 말했습니다.



마트에 도착해서는 저녁 메뉴를 함께 고민합니다. “정순 씨는 오이로 어떤 반찬 만들어 먹어요?” “나는 오이냉국 만들었어요!” 경옥 씨는 요리를 좋아하는 정순 씨가 반찬도 맛있게 잘 만든다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시민옹호활동의 선한 영향력은 한쪽으로만 향하지 않습니다. 시민옹호인과 당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뜻을 나누는 동안,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하나 되며 든든한 삶의 기반을 만듭니다. 스스로 약속을 잡고, 안부를 묻고, 일상의 기쁨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이자 이웃이 되어 갑니다.


시민옹호활동 참여를 통해 장애 당사자가 느낀 긍정적 삶의 변화 - 출처 :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시민옹호사업 10년 성과평가 및 발전방안 연구(2026)


시민옹호활동 참여를 통해 장애 당사자가 느낀 긍정적 삶의 변화
- 출처 :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시민옹호사업 10년 성과평가 및 발전방안 연구(2026)


 


시민옹호인과의 관계 형성은 정서적 안정, 자신감 향상, 의사소통 증진 등 장애 당사자에게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당사자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을 겪거나 고립되곤 합니다. 그만큼 지역사회와 주민과의 연결을 통해 정서적인 지지와 자신감을 얻고,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이야기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시민옹호사업은 당사자를 위한 ‘연결’의 장을 꾸준히 마련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지역사회 속 ‘연결’을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푸르메재단이 방문했던 캐나다의 비영리단체 ‘PLAN’(Planned Lifetime Advocacy Network)은 1989년부터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 내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안전하고 좋은 삶을 누릴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장애인과 그 가족이 신뢰할 수 있는 친구, 이웃, 그리고 지역사회 구성원을 모아 네트워크의 기초를 형성하도록 돕지요. PLAN은 이를 ‘Personal Support Network(개인 지원 관계망)’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커뮤니티 커넥터(Community Connector)를 양성해 장애인과 긴밀히 협력하며 의미 있는 관계를 쌓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시민옹호사업은 관계 중심의 활동인 만큼 지역사회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야 하는 과제도 있습니다.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정지영 시민옹호사업 담당자는 “시민옹호사업은 단순히 몇 사람만의 선한 행동이 아니라, 당사자가 이웃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지역사회의 문화를 만드는 일”이라며 “시민옹호인과 당사자의 특성과 필요를 주목하면서, 이들이 동행하는 길이 외롭거나 지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믿음직한 지원군이 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동행은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발맞추어 걷는 일입니다. 부족한 것을 애써 보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일입니다. 용기 내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세상을 바꾸는 조용한 힘을 보여주는 시민옹호인과 장애 당사자의 곁에 푸르메재단도 늘 함께하겠습니다.


글=최고은 대리(마케팅팀)
사진=푸르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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