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학 칼럼] 사람이 희망입니다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영원한 방송인 이금희 씨
방송인 이금희 씨
“초등학교 4학년 때 <누가 누가 잘하나> 동요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친구 따라갔다가 방송국을 구경하게 됐습니다. 사회자 언니가 얼마나 친절하게 어린이들을 대해주는지 나도 커서 저런 예쁜 언니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것이 제가 아나운서 길로 접어들게 된 첫 번째 동기였습니다.” 방송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중고교 시절 그를 방송반으로 이끌었고 결국 KBS에 입사했다. 방송국에 입사한 뒤 맡게 된 첫 프로도 운명처럼 <누가 누가 잘하나>의 후속인 ‘전국어린이동요대회’였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그는 아나운서를 꿈꾼 뒤 14년 만에 그 꿈을 이뤘다.
방송인 이금희 씨는 드라마 제목처럼 ‘불광동 오자매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비록 넉넉지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는 화목했다. 말단 경찰관이던 아버지 월급으로 생활이 어려워 어머니는 집에서 부업을 했다. 그녀는 일하는 어머니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재롱을 부리며 귀염받는 방법을 체득했다.
어린이 이금희(왼쪽 사진)와 대학 시절 모습
그렇게 열망했던 아나운서 생활은 어땠을까. “제가 방송을 좋아하고 그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되돌아보면 평탄하게 직장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초년병 시절에는 실수도 많았고 무엇보다 어리바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당신 아나운서 맞아?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어?’하는 불호령이 떨어져 남몰래 화장실에서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입 시절의 혹독한 노력이 오늘의 이금희를 만들었다
국민 아나운서, 한국을 대표하는 방송인, 긍정의 아이콘. 모두 그에게 붙은 수식어다. 사람들은 그가 정제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정감있게 말하는지 감탄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한 내레이션은 프로그램을 빛나게 한다.
35년 차 베테랑이지만 지금도 마이크를 잡으면 신입 아나운서처럼 가슴이 뛴다고 한다. <6시 내고향>과 <인간극장>, <사랑의 리퀘스트> 등 KBS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그녀가 내레이션을 맡은 <한국기행>을 보기 위해 매일 저녁 사람들은 EBS에 채널을 고정한다. 2020년 시작한 유튜브방송 <마이 금희>도 평균 조회 수가 15만을 넘었다.
그녀는 일로 승부하는 방송인이다. “직장에서 방송으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신입 시절 아나운서실이 아주 좁았고 제 의자조차 없어서 라디에이터 위에 앉아 방송원고를 수없이 읽었습니다. 아마 그때의 혹독한 경험이 저를 강하고 독한 사람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모든 삶은 방송에 맞춰졌다. 삶이 없었다. 아니 방송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라디오 음악프로를 진행하기 위해 매일 서너 시간 전에 미리 FM 사무실에 올라가 누구보다 꼼꼼하게 원고를 점검했고 방송에 나갈 음반을 미리 들었다.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하면 메모했고 신문을 읽다 청취자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내용이 나오면 스크랩했다. 목표는 한 가지, 방송 잘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TV는 사랑을 싣고>, <아침마당> 등을 진행하며 국민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에게 기억에 남는 가장 위급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라디오 <가요산책>을 진행하던 1990년 여름날이었어요. 한강이 크게 불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 시작 3시간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택시로 마포대교 앞까지 겨우 갈 수 있었지만 한강유람선이 마포대교에 걸리는 사고 때문에 여의도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차는 꼼짝 못 하고 방송 시간은 재깍재깍 다가오고 정말 피가 말랐습니다. 결국 원효대교 앞까지 갔다가 택시에서 내려 다리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자동차 한 대가 멈췄고 이 차를 타고 기적처럼 생방송 2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합니다.”
하이힐을 신고 긴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원효대교를 달렸던 열정이 오늘의 이금희를 만들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잊히지 않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물었다. “2000년 8월 15일 이산가족상봉행사입니다. 북한에서 온 인사 100명을 만나기 위해 남한 측 400여 명이 코엑스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50년 만에 꿈에 그리던 혈육을 만난다는 기대와 열기로 차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1시간이 넘게 상봉식이 지연되고 있었어요. 모두 숨죽이고 있는 순간 갑자기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북에서 온 100명의 인사가 행사장에 입장하면서 반세기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혈육을 귀신처럼 찾아내는 걸 보고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나누는 삶
이금희 씨는 1999년부터 22년 동안 모교인 숙명여대에서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일했다. 2012년 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바쁜 방송일을 하며 어떻게 학위까지 받을 생각을 했느냐고 묻자 “박사 논문을 쓴 것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였어요. 8할의 커피와 2할의 초콜릿 덕분이었습니다”하고 웃는다.
수업 시간에 유명 방송인 선배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22년 6개월 동안 2,250명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코로나 전까지 1,500명의 학생과 1대 1로 30분씩 티타임을 가졌습니다. 한 학생이 저 몰래 녹음한 면담 내용을 나중에 들어봤는데 놀랍게도 그 친구가 거의 대부분을 말하고 저는 주로 ‘그래, 얼마나 힘들었어’, ‘잘될 거야’ 이런 말만 했다는군요.”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 “불교도인 어머니는 무엇이든 이웃에게 나눠주시곤 하셨어요. 조계사 근처 상점에서 승복을 만들다 남은 회색 천 조각을 얻어서 에코백이나 파우치를 만드는 것이 취미셨고요. 테두리나 가운데 형형색색 예쁜 조각보를 붙인 가방은 이웃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어요. 어머니는 고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런 영향을 제가 받지 않았나 합니다. 후원하는 곳이 현재 20여 개에 이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바람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아요.”
어머니와 함께한 이금희 씨
이금희 씨는 몇 해 전 판화작가 이철수 화백, 도종환 시인과 함께 ‘호아빈의 리본’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베트남 어린이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호아빈은 화평, 평화라는 뜻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으로부터 고통을 당한 오지마을에 사는 어린이가 대상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후원받은 꼬마가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됐다. 사각모와 검은색 졸업가운을 입은 청년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빛났다.
이금희 씨와 푸르메재단의 인연도 아름답다. 그녀가 진행하는 <아침마당>에 2009년 11월 출연했다. 치료가 필요한 장애어린이의 현실을 설명했다. 2016년 4월 다시 <아침마당>에 출연해 꿈꾸던 병원이 지어졌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푸르메재단의 후원 천사가 됐다. “저는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조카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가 아픈 것은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푸르메를 후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금희 씨는 매년 유명인 친구들과 물품을 모아 온라인 바자회를 열고 유튜브방송 <마이 금희> 구독자와 함께 기금을 모아 전달한다.
백경학 상임대표가 이금희 씨가 진행하던 방송에 출연하며 이금희 씨와 푸르메재단의 인연이 시작됐다.
푸르메가 나갈 방향도 제시해줬다. “푸르메재단은 지향하는 목표와 사업이 분명합니다. 사업을 시민에게 잘 알리고 설득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취지에 공감하는 의식 있는 사람들의 정성을 푸르메재단이 잘 모아야지요.”
누구나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상처받은 이들조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방송인 이금희 씨가 전해준 작은 울림이었다. 괴테의 말처럼 젊은 시절에 소망한 일들이 나이 들어 풍성하게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글= 백경학 상임대표
*사진= 이금희 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