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발달장애인 지원의 핵심은 '이것'이다

<독일은 어때요?> 2화


 




"독일은 어때요?" 칼럼니스트 민세리가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독일에서 16년 넘게 거주하며 특수교육학자, 장애인복지전문가, 통번역가 그리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이번 연재칼럼에서는 독일 발달장애인의 일과 삶에 대하여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달하고자 한다.



독일에서 슈퍼마켓을 방문하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하나 있다. 특히 한국인은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다. 슈퍼마켓에는 보통 계산대가 네 군데 이상 있는데, 대부분은 한두 군데에만 계산대 직원이 앉아 있다. 직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도 있고, 직원들은 매장 내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담당하기 때문에 손님이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에는 상품 진열 같은 기타 업무에 매진하는 탓에 계산대를 비워두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계산대 줄이 한국보다 훨씬 긴 편이다. 대기줄에 10명은 기본이고 30명 넘게 서 있는 모습도 독일에서는, 특히 베를린에서는 아주 흔한 광경이다. 필자가 동네 슈퍼마켓에서 가장 오래 대기한 시간은 무려 15분이다. 그것도 달랑 오이 2개를 사기 위해…


그런데 참 희한하다. 대기줄이 아무리 길어도 줄 선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마트 직원에게 불쾌하게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 물론 가끔 큰 소리로 그러나 공손하게 "계산대 더 열어주세요"라고 외치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99 퍼센트의 사람들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나라와 같은 '빨리빨리' 사회에서는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희한한 광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업무에 미숙한 신입 직원이나 직업훈련생이 계산대에 앉아 있으면 대기시간이 더욱 오래 걸리기 마련인데, 이때에도 불만을 표시하는 고객은 없을뿐더러 계산이 늦어져서 죄송하다며 고객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는 직원도 필자는 독일에 16년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고객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고 직원은 침착함과 당당함을 겸비한다. 


베를린의 어느 슈퍼마켓 계산대 모습베를린의 어느 슈퍼마켓 계산대 모습


독일 발달장애인의 일과 거주와 관련해 장황하게 슈퍼마켓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다음 사례를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필자가 정기적으로 찾는 어느 슈퍼마켓에는 발달장애가 있어 보이는 20대 여성 직원이 계산대에 근무하고 있다. 실제로 발달장애인인지는 백 프로 장담할 순 없지만, 다운증후군 외모와 비교적 늦은 업무 속도로 미루어 보아 발달장애인이라고 짐작해 본다.


여성 직원의 계산 속도는 다른 직원들에 비해 2배 정도 느리지만, 아무리 계산이 오래 걸려도 여성 직원을 향해 불평하는 고객은 없다. 줄을 선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또는 대기줄이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대기줄이 아무리 길어도 여성 직원은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사실 여성 직원은 고객들과 눈맞춤을 잘 못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도 미숙하지만, 침착하게 자신만의 속도로 계산에 전념하는 모습이 늘 인상적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대기줄에는 10명 정도 서 있었고 필자는 계산을 위해 5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이날 따라 가게에는 유독 10대 청소년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옆 계산대의 대기줄이 확연하게 빨리 줄어드는 것을 눈치챘지만 줄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끼리 수다 떨며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계산을 마쳤을 때 여성 직원에게 "좋은 하루 보내세요!" 또는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여성 직원은 고객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고객의 인사에 반응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의 계산대를 거쳐본 고객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가 자신만의 속도로 최선을 다해 일한다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베를린의 어느 슈퍼마켓 계산대 모습. 발달장애인 여성 직원과는 무관한 이미지베를린의 어느 슈퍼마켓 계산대 모습. 발달장애인 여성 직원과는 무관한 이미지


기다림은 독일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기다림은 여유로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처음 독일을 방문하는 한국인은 독일 사회 전역에 스며든 여유로움에 감동을 받는다. 독일인의 발걸음조차 여유롭다며, 택배기사도 결코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일한다며 감동을 받는다.


그러다가 인터넷 속도가 느리고, 음식점에서 밥이 늦게 나오고, 이곳저곳에서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나라 같았음 벌써 사람들이 항의하고 난리 날 텐데"라고 하면서 독일의 여유를 서서히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독일에 수개월 살다 보면 독일 속도에 적응하게 되고, 이제는 한국의 '빨리빨리'가 어지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베를린의 어느 공원에서 사람들이 여유롭게 산책하는 모습. 독일의 여유로움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공원이다.베를린의 어느 공원에서 사람들이 여유롭게 산책하는 모습. 독일의 여유로움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공원이다.


어느 사회이든 그 사회가 '정상'이라고 정한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연령대에 비해 특정 신체적·인지적·정서적·사회적 능력 발달이 상당히 지연되어 사회가 '정상'이라고 정한 학습·근무·생활 속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경우 이들을 '발달장애인'이라고 분류하고 이들을 지원하고자 각종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 '빨리빨리 문화'로 유명한 한국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다. 속도에 매우 민감한 나머지 인내와 기다림이라는 가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여유롭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느린 발달장애인을 침착하게 기다리는 법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독일은 다르다. 기다림은 독일 발달장애인 지원의 핵심이다. 지난 몇 년간 필자는 연구 목적으로 독일의 수많은 장애인작업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독일의 장애인작업장은 일반노동시장 진출이 어려운 장애인, 주로 발달장애인이나 중도중복장애인이 종사하는 곳이다. 그런데 어느 장애인작업장을 방문하든 작업장 관계자들의 입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말이 있다. 장애인 개인의 능력과 속도에 맞춘 업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자신만의 속도로 일하도록 비장애인이 침착하게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장애인작업장을 방문하면 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작업장은 애초부터 장애인의 개별 능력과 속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업무 단계를 최대한 세분화하여 각자 능력에 적합한 직무를 제공하기 때문에 시간 압박이 없다. 장애인은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오후 4시에 퇴근할 때까지 자신만의 속도로 일하면 된다. 한 봉지에 나사 10개를 채워 넣는 작업이 30초가 걸리든 1분이 걸리든 5분이 걸리든 상관없다. 장애인의 근로생활을 동행 지원하는 비장애인 직원들도 언제나 침착하고 여유롭다.


독일 교육에서 수시로 인용되는 문장이 있다. Kinder dort abholen, wo sie stehen. 직역하면 아동이 서 있는 곳에서 데리고 오기. 즉, 아동이 지닌 특성과 능력, 발달속도 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여 거기에서 교육이 출발한다는 의미이다. 독일 교육의 출발점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장애인 지원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은 철저하게 장애인의 개별 능력과 발달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하여 이를 바탕으로 개별 맞춤형 지원을 실현한다. 즉, 장애인은 자신의 속도를 인정받는 가운데 교육을 받고 일하고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 베를린 슈퍼마켓에 근무하는 발달장애인 여성처럼 말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베를린의 어느 공원에서 사람들이 여유롭게 산책하는 모습. 독일의 여유로움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공원이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습. 독일에는 기차역이나 버스정류장에서도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한국 정부는 내년 3만 3,546명의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자리 중 슈퍼마켓 여성 직원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근무하는 일자리는 과연 몇 개나 될까? 그리고 발달장애인의 느린 업무 속도를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는 비장애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발달장애인의 느린 업무 속도에도 불구하고 발달장애인에게 "고마워요" 또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넬 비장애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한국은 선진국의 제도를 벤치마킹하는 데 있어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의욕이 넘치는 국가이다. 실제로 독일 장애인복지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오는 한국인의 열정과 부지런함을 보고 독일인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이때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선진국 제도를 도입하기 앞서 그 제도가 탄생하고 번창할 수 있었던 문화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러한 배경을 마련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문화라는 땅을 일구고 난 다음에 제도라는 씨를 뿌려서 그 씨가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발달장애인 지원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이 증명하듯, 기다림 문화는 발달장애인 지원에 있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비옥한 땅을 일구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발달장애인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그래야만 우리나라 발달장애인 지원 정책이 꽃을 피울 수 있다.


*글, 사진= 민세리 칼럼니스트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