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獨韓)여자, 독일과 한국 사이를 잇다
독한(獨韓)여자 민세리 칼럼니스트 재단 방문
“장애 인식 개선의 답은 ‘자주 만나 익숙해지는 것’이에요. 결국 차별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거든요.”
무더운 어느 월요일, 푸르메재단에 귀한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유학차 떠난 독일에 정착해 16년째 거주 중이라는 민세리 칼럼니스트. 독일의 발달장애인 자립과 일자리에 대해 알고 싶다는 푸르메재단의 문의에 마침 한국 방문 계획이 있다며 강의를 자처한 겁니다. 장애인 재활 분야 선진국인 독일의 정보에 목말랐던 차라 고맙고 반가운 제안이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서너 시간 앞서 와 있었다는 그의 눈빛엔 열정과 에너지가 가득했습니다. 몸을 내밀고 재단의 이런저런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묻는 태도에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엿보입니다. 이력만 살피면 넉넉한 환경에서 부침 없이 살아왔을 것만 같은데, 실상은 가시밭길 그 자체입니다.
가난한 대학생에서 독일에 정착하기까지
재단에 방문해 독일 장애인 복지 소식을 전한 민세리 칼럼니스트
“부모 뜻에 따라 교대에 입학했는데 마치 제2의 수능 같은 임용시험만을 위해 달리는 교육시스템에 흥미를 못 느꼈어요. 그러다 3학년 때 교과목의 하나인 특수교육을 들었는데 ‘이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라는 고민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새로웠어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던 교수님의 ‘독일 대학은 학비가 무료’라는 말씀에 특히 더 마음이 끌렸고요.”
어려운 가정형편에 등록금도 직접 벌어야 했던 민세리 칼럼니스트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가 관련 정보를 얻고, 과외로 1년간 1천만 원을 모아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특수교육을 더 깊이 공부할 계획이었지요. 하지만 계획은 처음부터 빗나갔습니다. 학부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위를 인정받지 못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요. 언어의 벽에 부딪혀 3년의 학사 과정을 4년 만에, 2년의 석사 과정을 3년 만에 마쳤습니다. 돈이 없어 매 끼니를 식빵으로 때우면서요. 독하게 공부했지만 결혼과 육아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지난해야 다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독일의 장애인 복지 소식을 한국에 알렸고요.
“여느 유학생처럼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한국에 비해 모든 게 우수하고 대단해 보였어요. 그런데 10년 넘게 살다 보니 각자의 장단점이 보여요. 이 장점들을 서로 공유하고 접목했을 때의 변화도 예상이 돼요. 그 다리 역할을 해봐야겠다는 꿈이 생겼어요.”
푸르메재단의 연락에 반갑게 응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담아 민세리 칼럼니스트는 푸르메 직원들에게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독일의 깊이 있는 장애인 분야 정책과 현실을 생생하게 전해주었습니다.
민세리 칼럼니스트가 들려주는 독일의 장애인 사회
독일에서 장애인증이 나오는 중증장애인은 전 국민의 10%. 장애등급(GdB) 20~100 중 50GdB 이상인 사람으로, 장애인 정책의 주 대상자입니다.
이들 중 일반학교에 들어가는 비율은 44%. 나머지는 특수학교에 소속됩니다. 73%가 일반학교로 가는 한국의 장애학생과 비교하면, 독일 장애인이 사회와 더 분리돼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국은 특수학교 수가 턱없이 부족해 애초에 선택권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반학교로 가서 특수반과 원반을 오가며 교육받지요. 운 좋게 특수학교에 입학해도 집에서 먼 경우가 많아 차로 등하교할 수밖에 없어요. 말 그대로 차로 학교-집만 오가면서 누군가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죠. 반면, 독일 일반학교는 한 반에서 완전한 통합교육이 이뤄집니다. 또 특수학교는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학생들은 혼자 힘으로 등하교하며 지역주민과 접할 기회가 많고요.
독일에서 특수교육을 마친 학생은 장애인작업장이나 통합기업 (직원의 30~50%가 중증장애인인 일반사업체)에 취업하거나 직업교육기관 (일반사업체 취업을 위해 이론교육과 실습교육을 동시에 받는 곳)을 거쳐 일반사업체에 취업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90% 이상의 발달장애인과 중도중복장애인이 졸업 후 장애인작업장에 취업하고, 이들이 일반사업체로 넘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중증장애인 실업률 역시 비장애인보다 2배 정도 높은 편이고요.
독일 기업은 중증장애인을 5% 이상 고용할 의무가 있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고용하기보다는 고용부담금을 내는 것을 선호합니다. 복지 선진국이라고 해도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는 거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1,2. 베를린 도시청소용역업체 3. 레벨스벨텐 4. 블루멘피쉬 <출처: 민세리 칼럼니스트 제공>
하지만 추천하고 싶은 장애인 일터도 많습니다. 하나는 베를린의 도시청소용역을 담당하는 공공기업입니다.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아이디어와 감각적인 브랜딩으로 청소 업무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를 긍정적이고 친숙하게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지요. 장애인작업장은 ‘블루멘피쉬’를 추천해요. 발달장애인이 그리고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온라인과 베를린의 여러 상점에서 판매합니다. 통합기업으로는 ‘레벨스벨텐’이 있어요. 식당과 케이터링을 운영하는데,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일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
독일의 직업교육과 사업체 내에서 이뤄지는 체계적인 직업훈련은 분명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기업에서 훈련받거나 취업한 발달장애인의 경우 별다른 역할 없이 앉아 있다가 오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독일에서는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훈련합니다. 발달장애인에게 칼이나 공구를 활용한 업무도 주어집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비슷한 비율로 근무하는 독일의 통합기업처럼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근무하는 일자리를 만드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국내에는 비장애인이 대다수인 일터에 발달장애인 일자리를 임의로 만들거나, 발달장애인만을 위한 일터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민세리 칼럼니스트는 그 원인이 교육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분리돼 교육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한 공간에서 만났을 때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
독일에서는 차별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얘기합니다. 낯설고 두려운 상황에서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어릴 때부터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게 인식이 변화하는 시작점입니다. 장애 인식 개선은 거창한 게 아니라, 서로 만날 기회를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익숙하게 소통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글= 지화정 과장 (마케팅팀)
*사진= 지화정 과장, 민세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