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린이가 알려준 세상
신용카드사회공헌재단 희귀난치어린이 지원사업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초린이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하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2층 운동치료실. 치료사가 어두운 얼굴로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치료가 잘 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얼마 후 몸이 축 늘어진 채 활동지원사의 품에 안겨 들어온 아이. 치료사가 아이를 건네받아 옆으로 뉘여 어깨를 살살 돌리는 찰나, 기력 없던 아이의 몸이 바르르 떨리더니 구토를 할 것처럼 입이 벌어집니다. 얼른 가슴을 다독이는 치료사. 하지만 곧 같은 증세가 반복됩니다. 긴 속눈썹 아래 커다란 아이의 눈이 초점 없이 먼 곳을 향해있습니다.
5살 초린이는 올 4월부터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6개월 일정이지만 초린이 엄마 정현아 씨(42)는 “끝까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대발작으로 뼈가 부러지는 일이 반복돼 초린이는 정해진 재활 기간을 채워본 적이 없습니다.
“경기의 증상은 천차만별이에요. 경기인지 모를 정도로 멍한 상태가 반복되는 미세경련도 있지만, 초린이는 이를 꽉 물어 피가 철철 날 정도로 강한 발작이 오기도 해요. 이가 다 흔들리고, 뼈가 부러질 정도예요.”
경기가 무서운 이유는 그간의 발달과정을 원점으로 돌려놓기 때문입니다. 경련으로 축 늘어진 아이는 재활치료를 받을 힘이 없고, 누워만 있으니 뼈가 약해지고, 그 상황에서 대발작이 일어나면 뼈가 부러져 결국 재활을 중단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는데 대발작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면, 그때의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너무 예뻤던 딸이라... 그래서 더 미웠어요.”
2남 2녀 중 셋째인 초린이는 아들만 둘이었던 현아 씨가 간절히 원했던 순간, 선물같이 찾아온 딸이었습니다. 제때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조리원에 들어간 지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아기가 숨을 못 쉬면서 온몸이 파래졌어요.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신생아에게 가끔 보이는 증상이다. 약을 먹으면서 조절하면 된다’고 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보다 어렸을 때 밝았던 초린이의 모습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아든 것은 초린이 생후 10개월 즈음이었습니다. 한번 시작한 발작은 종일 멈추지 않았고, 초린이를 안고 병원으로 내달린 엄마가 받아든 것은 ‘레녹스가스토증후군’이라는 희귀난치질환 진단이었습니다. 약물로 조절하기 힘든 원인불명의 뇌전증이 지속되는 질환입니다.
“그때 초린이가 너무 미웠어요. 돌잔치도 안 해줬어요. 제일 예뻤던 딸이라 더 미웠나 봐요. 하필 친정엄마까지 파킨슨병과 암 진단을 받으셨던 때였어요. 아이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누구든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초린이를 향했던 것 같아요.”
잠깐 찾아든 미움을 뒤로 하고, 엄마는 초린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습니다. 유명한 병원과 의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온갖 한방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어 아이의 이름을 바꾸고, 굿까지 해봤습니다. “결국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더라고요.”
초린이가 알려준 세상
위류관 시술로 입이 아닌 위에 직접 특수분유를 주입해야 하는 초린이
현아 씨에게 우울증이 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힘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너져버린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인 청년의 휠체어를 끌고 있는 한 어머니를 본 적이 있어요.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으신 거예요. 왜인지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그때부터 병원에 갈 때는 밝은색 옷만 입고 활짝 웃고 다녀요. 누군가 우리를 불쌍하게 보지 않았으면 해서요.”
동시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집 바로 옆에 장애인콜택시 주차장이 있다는 것을 초린이가 아프고 난 후에야 알았어요. 푸르메재단의 존재도, 손을 내밀어주는 이들의 존재도 초린이 덕분에 알게 됐어요.”
신용카드사회공헌재단의 지원으로 고가의 특수분유를 당분간 걱정 없이 채워넣을 수 있게 됐다.
외벌이인 아빠의 수입으로는 여섯 명의 가족이 생활하기에도 힘겹습니다. 초린이의 의료비와 재활치료비는 물론, 위류관 수술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특수분유 비용까지 감당하는 것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올해 신용카드사회공헌재단의 지원은 큰 희망이 됐습니다.
“초린이에게 유일하게 맞는 특수분유를 당분간 소진될 걱정 없이 쌓아놓고 먹일 수 있게 됐어요. 거의 포기했던 재활치료도 다시 시작하고요. 덕분에 다시 희망을 키워나갈 힘을 얻게 됐어요.”
현아 씨는 여전히 발작을 멈추지 않는 초린이와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는 부모님을 함께 돌보는 버거운 일상에도 가족들을 위해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때때로 찾아오는 극심한 무기력에 모든 걸 놔버릴 때도 말없이 지켜봐 주는 가족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초린이가 알려준 이 세계를 몰랐으면 좋았겠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장애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푸르메재단을 알았으면 좋겠고,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주는 이들이 늘 있다는 사실을 어려운 처치의 장애인 가족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어요.”
*글, 사진= 지화정 대리 (커뮤니케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