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두 스승

이일영 교수 (아주대 의대 재활의학과)



내 인생의 스승이 두 분 계신다.


30년 넘게 재활의학을 전공하면서 때로는 장애인과 웃고, 때로는 그들의 불행과 아픔에 눈물 흘리며 나름대로 삶의 방향을 잘 선택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이 두 분 덕택이다.


해방동이로 태어난 나는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면서 자랐다. 내가 맞았던 청소년기는 전쟁이 빚어낸 가난과 병자들로 거리를 넘쳐났다.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의사가 하나쯤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었고 나 역시 안정된 생활과 조금이나마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직업으로서 주저 없이 의사를 선택했다. 하지만 본과에 올라가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신학에 대한 열정이 생기면서 거대하게 보였던 의학의 목표는 수그러들고 ‘내가 과연 의사가 되어야 하나?’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뉴욕대학 의대 교수이신 하워드 러스크(Howard Rusk) 박사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러스크 박사는 재활의학회를 처음으로 설립하고 관련 재단을 만들어 활동하시면서 재활의학을 중요한 학문 분야로 정착시켜 놓은 선구자였다. 한국 전쟁으로 다리를 잃고, 영양실조로 열병을 앓아 귀머거리가 된 사람들이 '병신' 취급을 받던 시절, “병자들에게 사회는 관심을 보여야 하고 재활훈련을 통해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러스크 박사의 강연은 내게 마치 복음처럼 들렸다. 두 시간 남짓한 강연 동안 그가 보여준 36mm 다큐멘터리 필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방광암으로 하반신을 절단해야 하는 환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 환자가 수술 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의료진이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허리 아래쪽을 절단한 후 생활할 수 있도록 재활훈련을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다. 심지어 절단 후 혼자 기동할 수 있게 운전을 배우고 각종 후유증에 대비해 물리 치료와 정신적인 훈련하는 장면을 보면서 ‘환자가 존경받는 인격체’라는 사실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강의하시던 유준 교수님을 도우면서 내 삶은 더욱 확고해졌다. 당시 한센병균을 연구하고 계셨던 유준 교수님은 한센병을 앓고 있는 장애인 거주지 소록도에 나를 직접 보내셨다. 그곳에서 사회적인 편견과 한센병이라는 두 가지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환자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재활의학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두 분을 통해 재활의학은 의학도로서의 내게 새로운 비전으로 다가왔으며 나름대로 장애인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활동하도록 사명을 부여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강연의 통해 내게 전달되었던 러스크 박사의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생생하다. 러스크 박사는 “의사들이 환자를 위해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손을 털 때 재활의학은 시작된다”고 말씀하셨다.


재활의학을 세운 선구자들은 사회가 포기한 장애인들을 다시 사회로 불러내 우리의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장애는 이전까지 개인이 짊어져야 할 참으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짐이었지만 이들은 동시대인 모두가 같이 나누어야 할 삶의 몫이라고 외쳤고 그 결실이 맺어져 장애인이 인격체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장애는 급격히 진행되는 과정이 끝나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질병이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쟁애인들은 정신적 또는 육체적, 사회적으로 많은 심각한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절단수술을 받아 하루아침에 장애자가 된 사람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몸의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기억력과 운동력이 쇠퇴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는 등 많은 후유증이 나타난다.


나는 좀 더 선진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다. 재활의학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나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1973년 러스크 박사를 찾아 뉴욕대학에 갔을 때 미국 사회는 이미 장애인에 대한 인식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장애인 문제를 사회공동체가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빌딩과 지하철에 장애인용 슬러프와 엘리베이터 등과 같은 편의시설은 없었지만 장애환자를 위해 의사와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심리학자 등이 팀을 구성해 환자의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사회도 뒤늦게 환자 앞에 놓여 있는 정신적, 사회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전문인으로 팀제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제 구성원간 이해관계를 벗어나 환자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마음이며 팀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장애인이 인격체로 대우받고 재활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에 입각해 장애인의 권리회복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 보스턴 척수손상센타에서 근무하던 나는 1984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 외래환자가 거의 없었다. 이유는 장애환자들이 재활교육을 받고자하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집을 나서기가 끔찍했기 때문이다. 인천에 사는 내 환자가 택시를 타기 위해 기사에게 3배의 웃돈을 제의했지만 결국 승차를 거부당하고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 장애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 불이나케 달려갔다. 그가 받았을 상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난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번은 대학생이 추락사고로 중환자실에 실려 온 적이 있다. 무의식 상태로 입원이 장기화되자 결국 부모가 호흡기를 뗄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살림에 병원비는 늘어나고 아들의 병세도 나아질 가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옮겨진 그 학생은 다행히 사망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있다.


장애인이 사회의 일원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인식을 바꿔야 한다. 사회적인 인식이란 내가 장애인의 입장이 되고 그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적인 풍토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장애인의 삶의 질은 변할 수 없다.


미국 사회가 장애인 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같은 장애인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건강한 대통령이 뇌출혈이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변하기위해서는 이제 능력 있는 장애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재활치료를 받으면 짧은 시일 내 회복이 가능한 장애인 뿐 아니라 중증 장애인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정책이 아울러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우리 사회처럼 공공의료 복지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는 물론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시설을 늘리는 것이 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꼭 정부가 운영하는 것보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재활병원과 요양소 등이 더 잘 운영되고 서비스가 높아질 수 있다면 정부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 정부가 꼭 내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민간과 조화를 이루며 유기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재활환자들이 바라는 사회는 편견과 문턱이 없는 완전한 통합사회이며 모든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차별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이다. 외국에는 개인에 대한 대우가 다르다. 장애인이 가장 우대받고, 이어서 어린이와 여성. 그 뒤를 개가 잇고 맨 마지막이 건강한 남성순이다. 미국 남성들은 '개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농담한다.


우리사회에서도 하루 빨리 장애인과 재활환자가 가장 대우받을 수 있고 모든 장애인들이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아주 멀리 느껴지지만 그런 사회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내일도 장애인을 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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