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는 다시 자라잖아요!
김용해 (예수회 신부,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1998년 독일 남부 뮌헨의 여름은 무척 더웠다.
8월 어느 날 잘 아는 분이 전화를 걸어, 어제 황혜경씨가 영국에서 뮌헨 대학병원으로 옮겨왔으니 함께 방문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세 달 전 영국 여행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영국 시골 병원에서 세 번의 수술 끝에 한쪽 다리를 온전히 잃게 되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녀와 남편 미카엘씨 그리고 딸 민주, 일가족의 갑작스런 불운에 뮌헨 한인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이들 부부는 한인사회에서 가장 행복한 젊은 부부요, 남을 위해 돕는 일에 가장 앞장 선 가정으로 여겨졌다. 미카엘씨는 한국 언론재단의 지원으로 독일통일문제를 공부하러온 기자였고, 황데레사씨는 서울시 전문직 공무원으로 휴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 독일에 왔다. 두 분이 뮌헨에 오고 나서 한인 교회공동체와 한인사회는 이 분들 덕분에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미카엘 씨는 독일의 통일이나 지방자치체의 문화에 대한 공부 뿐만 아니라 남독일의 다양한 역사, 문화에 대한 취재 의욕이 넘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혹은 집에 초대하여 토론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 데레사씨를 가까이서 보면, 남편과 함께 기꺼운 마음으로 손님을 잘 대접하고 기쁘게 토론에 참여했다.
▲ 독일 뮌헨에서 ...
그리하여 어느덧 2년여 기간이 지나 연수기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남편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부인에게 멋진 유럽 여행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고대하며 떠난 여행이었는데, 나는 며칠 후 전화로 미카엘 씨의 떨리고 다급한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영국의 북쪽 지방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부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아찔하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몇 시간 후 나는 급히 독일인 원장 신부님께 사정을 알리고 런던을 경유하여 글라스고우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기를 가까스로 잡아 탔다. 굉음과 함께 캄캄한 밤하늘을 가르는 비행기에 피곤한 몸을 맡기고 눈을 붙이면서 이 가족의 운명에 대해 걱정했다.
행복한 삶의 자리를 뿌리채 뽑힌 모습으로 망연자실해 있을 이 부부에게 도대체 우리는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함께 붙들고 울음이라도 나누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뮌헨 병원 병실에는 벌써 많은 한인들이 독일 병원의 병실에 와 있었다. 함께 병실에 들어 간 몇 명의 부인들이 “민주 엄마, 이럴 수가......” 하면서 말을 잊지 못하고 곧 울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담담하게 누워있는 그녀의 손과 몸을 어루만지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 영국 병원 중환자실. 딸 민주와 함께.▲ 독일 집을 방문한 수녀님과 함께
잠시 후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에 계시는 분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였다.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완성시키시는 하느님, 갑작스러운 불행한 사태에 저희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아직은 우리가 어떤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지만, 장차 당신의 창조경륜 안에서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이 사랑하시는 어린이들, 민주와 난이가 이 슬픔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것을 방금 표현했듯이 저희 또한 믿고 희망합니다. 민주 엄마의 다리가 빨리 자라날 수 있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도와주십시오!”
하느님이 인간을 피조물 중에 가장 존엄하게 창조하셨고, 따라서 나무나 도마뱀 지체의 재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방법으로 재생시키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6년 후인 지난 2004년 8월 17일 이었다. 이날 프레스 센터에서 장애환자 재활병원 설립을 위한 푸르메재단 발기인대회에 이사로 참석하던 나는 불현듯 지난 7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 가족의 고통을 상상해 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그러면서 불현듯 6년 전 민주가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 말대로 데레사 씨의 다리가 빨리 자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영국의 글라스고우 근처 시골 병원, 다시 독일 뮌헨의 병원 그리고 귀국 후 서울의 한 병원에서의 치료와 재활교육을 받는 이 부부를 계속 지켜보았는데, 무엇보다 이 부부가 자신들의 삶의 뿌리를 흔들고 지나간 폭풍 속에서도 이성과 사랑으로 수많은 난관을 버텨냈고, 삶의 희망의 끈을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더욱 견고한 부부애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형태로 이 부부에게 도움이 되어 주었으며, 이 부부는 또 함께 한 이들로부터 얼마나 깊은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이 부부는 7년 전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않는 장소에서 또 예상치 않는 일을 하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더 삶을 기쁘고 행복하게 이웃과 더불어 잘 살고 있지 않는가. 간혹 나는 데레사씨를 위해 특별히 설계한 일산의 집에 놀러 가는데, 늘 아늑한 독일의 시골 마을에 온 기분이고, 이웃들도 넉넉한 마음으로 함께 하면서 음식도 나누고, 기도도 함께 하며 즐기는 시간들이 여간 감동스러운 것이 아니다.
▲ 푸르메재단 발기인대회 (2004.8.17)
이번 주말에는 민주와 데레사, 미카엘 씨는 물론이고 민주 네와 더불어 살아가며 참생명을 나누는 벗들도 오랜만에 보고 싶다. 그리고 나의 민주네 식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 하며 전해달라고 자필로 서명해준 한 시인의 책 선물도 전해주어야지.
더군다나 데레사씨가 얼마 전 가해자측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피해보상 선급금과 미카엘씨가 회사를 운영하며 가지고 있던 주식을 재단 출연금으로 내놓고, 나머지 받게 될 피해보상액을 출연하기로 하여 장애환자를 위한 재활전문병원을 설립해 우리나라의 열악한 재활의료 여건을 개선해 보자고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꿈 많고 상상력 풍부한 민주가 아빠와 협상 끝에 한국의 대안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잘 성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은 참으로 오묘하구나!’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이 부부의 운명을 지켜보며, 인간은 불행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인식하게 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의 지평이 열린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영원한 존재를 보게 된다고 하였다. 데레사씨 부부는 오히려 다리를 잃고서야 영원한 걸음걸이를 힘차게 내딛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세상에는 풀리지 않는 문제란 있을 수 없다.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견디어 내면 이웃과 사회는 어느덧 벗이 되어 함께 한다. 어디 그 뿐이랴. 고난을 이겨낸 분들이 오히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 대한 연대성을 더 굳건하게 갖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창조적 조언과 봉사를 하는 태도는 사회와 이웃에 빛이 되어 빛난다. 인간은 물리적인 다리를 재생시켜 얻을 수는 없더라도, 충분히 적응 가능한 새 현실을 얻게 되고 주위의 협력과 사랑이 건강한 다리가 되어 줄 수 있으며, 그리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더 큰 생명은 우리 안에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