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으로 맞는 새벽

김홍식 (푸르메재단 기획실장)


나는 참 바보다. 누군가에게 뭘 부탁해야 하는데 그냥 부탁만 한다. 잘 정의된 조직과 지휘체계 안에 있을 때에는 내가 모르는 사이 그 부탁이 '명령'으로 둔갑해 약효가 있을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부탁할 것에 대해 몇 번을 고민하고 온마음을 다해 부탁하는 것 같은데 방법이 신통치 않다. 거래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뜻이 있으면 길은 있기 마련이고 마음이 있다면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잘 들리지도 않는 배경음악을 '무기'삼아 부탁하지만 별로 약효가 없다. 내 마음이 있다 한들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거래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거래에는 재주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더욱 바보인 이유가 또 있는 것 같다. 아내와의 사랑을 경험할 때 사랑이란 것이 몸과 마음의 구분 없이 빚어낼 수 있는 에너지를 보았건만 삶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랑 일반' 이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를 다른 여러 곳에 쓸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추억이라는 '무덤' 속에 그 에너지의 씨앗을 갇아두고 살았던 나. 이루지 못한 뜻과 여러가지 실패, 그로 인한 회한도 남겠지만 실존이 던지는 장난에 대응만 해왔던 나는 더더욱 바보다.


그렇지만 '사랑 일반'의 씨앗이 메말라 가면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함을 보게 된 것은 참 다행이고 기쁨이다. 아주 작은 곳에서 그 기쁨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



동트는 새벽... 생명의 숨으로



그 기쁨은 동트기 전 아침이 주는 평화에서 시작된다. 잠을 깨면 희미한 여명에 반사된 시각을 확인한다. 대략 4~6시 언저리에 시침이 있고 자시나 축시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누운 자세 그대로 약간씩 몸을 뒹굴어 내 몸에 "나 왔다"고 알릴 겸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땅에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지구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다. 내 몸 붙일 지구라는 어머니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저 푸른 대자연과 들판에서 일렁이는 풀들을 연상한다. 몸을 일으켜 방석 위에 편안하고 올곧은 자세로 앉아 머리 속의 내 모습을 지운다. 푸른 대자연, 어머니 지구에 뿌리박은 초록 생명이 되어 본다.




지금 내 모습은 잊고

마음으로 빚은 한 그루 나무가 되어본다.

한 손은 가슴에 얹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늘 향한 다른 손으론

햇볕으로 기운 차리는 식물처럼

우주에 널린 생명의 숨을 평화로이 초청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여는 세계의 식물이 되어보는 것이다.



태초에 진흙으로 빚은 몸에 숨을 불어 넣어 우리 생명이 태어났다고 하지 않은가.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평화로이 들숨과 날숨의 박자에 내 몸을 맡긴다. 감사히 마시고 편안히 토한다. 어느덪 숨쉬기가 고요해지면 숨기운이 가슴 아래 밑둥으로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뿌리와 맞닿은 그 자리를 마음의 눈으로 비추다가 아예 그곳에 마음을 둔다. 나를 붙들어 주는 고마운 땅. 그 속으로 뿌리를 뻗는다. 부드럽고 고요하게 마음의 뿌리를 아래로 아래로 내밀며 촉촉한 땅의 기운이 밑둥으로 흘러오게 놓아둔다.



마음은 저 아래 밑에 두었으되

아침 바람에

이슬로 화답하듯

하늘과 닿은 머리에 부드러운 바람 일고

잎새 타고 구르는 이슬처럼

잔잔한 전율

구슬되어 흐르네.



사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이 조용한 기적에 초대하고 싶다. 마음으로 시작되지만 몸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음악, 우주라는 이름의 크기도 차원도 없는 방에서 고요하지만 명료하게 연주되는 실내악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아직 못찾았다. 그곳에는 여러 소리가 함께 있다. 사랑이 있고, 생명이 있고 평화로운 힘이 있다. 축복이기도 하다. 나에서 시작되어 자연, 생명, 평화로 퍼져 가는 이 모든 파동의 지휘자는 내 안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몸둥이의 일부가 있고 없고 또 잘 움직여지고 아니고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저 고마운 생명, 감사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충분하다. 만약 내 몸둥이의 일부가 사라지거나 내 말을 듣지 않게 된다면 나는 -고통스럽겠지만- 그렇게 마음의 재활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휘할 것이다. 곁에 함께 해 주는 분들이 있다면 더욱 아름답고 보다 힘찬 협주곡으로 어우러지리라 믿는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하는 출근길



그 힘을 담아 눈 비비고 일어나는 가족에게 던진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집을 나서는 아침. 늘상 보아온 태양이라 새로울 것이 별로 없겠지만, 햇볕이 유난히 따사롭게 느껴지는 아침은 참 좋다. 차가움을 동반하는 아침 기운과 태양의 온화한 기운을 맛보기에 좋은 조금 먼 길을 일부러 택해 걷는다.

뭐랄까 행복감에 젖게 되는 그 때의 기분은 이상하게도 차가운 바람을 타고 따스함이 전해오는 것 같다. 차가움과 따스함이 잘 섞인 자연이 주는 차(茶)를 마시는 것 같다.


그 기운을 출근길과 버스 정류장에서 스치는 이웃에게도 보내본다. 연록 같이 싱싱한 기운을 뿜어내는 청소년들을 스칠 때는 나도 덩달아 싱그러워진다. 경직된 얼굴과 눈빛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몰고 다니는 분들을 만나면 새벽 명상과 틱낫한 스님의 걷기수행중에 담은 긍정적 에너지를 보내본다.



숨을 들이마시며 두세 걸음 걸어라.

걸음을 내딛으며, "들이쉬고, 들이쉬고"라고 말하라.

입으로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발로 말하는 것이다.

발에 사랑의 힘을 가득 실은 다음, 흙에 입맞춤하는 기분으로 그냥 내딛으면 된다.

다시 숨을 내쉬면서 두 걸음을 걷는다.

이때에는 "내쉬고, 내쉬고"라고 말한다.

깨어있는 마음 (mindfulness)으로 온 마음을 다해 흙을 밟아라.

마음이 머리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을 저 아래 발바닥까지 끌어내려라.

발걸음은 점차로 힘을 되찾을 것이다.

이 힘은 다시 몸과 의식에 고루 퍼져 새로운 활기로 태어난다.


틱낫한 스님, 「힘」, 51쪽 (명진출판)



긍정의 힘


평화와 축복에 이르는 길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여러가지 방법 중에 이와 같은 명상과 수련, 걷기수행과 같은 습관을 하나 더 갖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경쟁과 싸움에 찌들거나 바쁜 생계에 지친 이웃들에게 "... 하지 마라"고 접근하기 보다는 "...하자"는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일일 것이다. 더러움을 제거하기 보다는 깨긋함을 생산하는 에너지처럼 긍정은 항상 부정을 감싸 녹여내는 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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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안면도 없는 유명인 한 분에게 이메일도 하고 전화도 드려서 "마음을 함께 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세요"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내 메세지에서 뭔가 거래의 내용과 조건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인지 좀 화가 나신 것 같았다. 바쁜 세상에 누군가의 얘기에 경청한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 말미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평화가 전달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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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마음에 담아두기 아름다운 글 몇 소절을 아래에 붙입니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 잘못된 점만 발견한다면 그건 당신의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 (틱낫한 스님, 힘, 80쪽)


" 평화는 지성이 아니라 가슴이다. 평화는 우리의 폐와 내장에 들어있다. 그래서 평화대학 플럼빌리지에서는 사람들이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평화롭게 숨쉬기, 걷기, 깊이 듣기와 사랑으로 말하기를 가르친다. 이들은 매일매일 이를 닦고 세수를 하듯이 이런 수행을 되풀이한다." (같은 책, 81쪽)


"자신을 향해 짓는 미소는 예의상 웃는 미소와는 전혀 다르다. 스스로에게 미소 짓는다는 것은 이미 당신 안에 깊은 평화가 자리잡았다는 증거다. 당신은 자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예술 작품이 된다. 우리 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을 때, 우리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삶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같은 책,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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