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바구니

 “1 페니히(6원)이라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모아 주십시오.”





하긴 고인의 속옷 조차 벼룩시장에 내다파는 근검정신의 독일인 아니던가. 깨끗하게 풀 먹인 뒤 예쁜 리본까지 묶여 있는 망자의 속옷을 볼 때 '삶과 죽음이 문화적으로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절감했다.1998년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독일 남부 뮌헨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호반도시 ‘에싱(Eching)’의 작은 성당에 앉아 있었다. 창 밖에는 흰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난방이 안된 성당 안은 냉기가 감돌았다. ‘누가 짠돌이 아니랄까 봐!’ 냉골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미사를 치르는 독일인들에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만약 예수님이 살아 난다면 매달린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아낄 것이 따로 있지 내 생일날도 벌벌 떨게 하냐?”며 독일 신부에게 종주먹을 내밀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의 사랑을 주제로 한 독일 신부님의 강론은 취객의 독백처럼 들렸다.심한 바이에른 사투리 때문에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데다 강한 비음을 가지셨으니 신부님 목소리는 밀물처럼 내 귀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져 가곤 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다. 아마 평생 동안 볼 수 있는 눈을 한꺼번에 본 것 같다. 하늘은 모든 것을 파묻기로 작정한 듯 하염없이 눈을 쏟아냈다.



뮌헨 시내 한인성당에 다니던 우리 가족은 이날 처음으로 마을에 있는 독일성당 문을 두드렸다. 하긴 이 폭설을 뚫고 시내까지 나갈 사람이 누가 있으랴.  강론이 끝나고 바하풍의 장엄한 미사곡이 울려 퍼졌다. 음악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옆집 요셉 할아버지와 엘리자베스 할머니가 앞좌석에 초록색과 빨간색 바이에른 전통복장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동네에서 유명한 개구장이인 플로리안이 발장난을 치고 있었고.'눈만 봐도 겁난다'는 말이 실감났다. 누가 눈을 낭만적이라고 했던가. 내게 눈은 공포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쌓인 눈을 치웠지만 ‘길없는 길’이 되풀이 되곤 했다. 꼬마들이 썰매를 타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쭈빗거리던 어른들도 하나 둘 스키를 타고 나타나 '눈난리'를 즐겼다. '설국(雪國)'이 따로 없었다.


그 순간 나와 조금 떨어진 옆 좌석에 다소곳이 앉아 계신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흰색 머플러를 쓴 할머니는 나무 바구니를 소중히 안고 계셨다. 10년은 더 낡아 보이는 빛바랜 바구니를.


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 무슨 바구니에요?” 여든을 훌쩍 넘겼을 할머니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나이에 비해 곱게 늙은 얼굴이다.


"기부금을 내려고 가져온 것이라우!"


"아! 네"


헌금순서가 되자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소중한 것이 담겼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미사곡에 묻혀졌다.


독일 신부님이 성호를 그어 발이 꽁꽁 언 신자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으로 미사가 끝났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성당문을 빠져 나갔다.


‘아! 할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 때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막 성당 현관을 나서고 계셨다. 불이나케 할머니를 쫓았다.


“할머니! 바쁜 일 있으세요?” 할머니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늙어서도 이렇고 고운 주름을 가질 수 있을까.


 


“왜 그러우?”


“이제 눈이 그친 것 같아요. 할머니하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나하고 말이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궁금했어요. 무슨 바구니일까 하고?”


"그래요? 별것 아니라오."


"뭐가 들었는 지 말씀해 주세요" 일곱살 난 딸애가 할머니에게 조르듯 간청했다.


할머니는 동양 어린애가 또렷하게 독일말을 사용하는 것이 신기한 듯 웃었다.


남편 전사후 비참한 생활, 집 앞에 놓여지는 감자 세 개


마당에 선채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벌써 50년이 더 된 이야기라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우리 가족은 정말 비참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내 나이 20대 후반이었으니 한 창 젊을 때였지.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절망 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오. 사는 낙도, 살아갈 방법도 없었지. 그래도 4살 난 아들과 2살 난 딸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수 없이 다짐하곤 했다오”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살짝 맺히는 것 같았다.


“우리가족은 며칠째 먹지 못해 굶주리고 있었다오. 아이들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음식을 그린 뒤 벽에 붙여놓고 배불리 먹는 놀이를 했다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처럼 주먹만한 감자 세 개가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거야. 너나없이 가난한데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때였다오. 처음에는 '누가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겠지'하고 별 생각 없이 먹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누군지 궁금해졌어. 그래서 새벽녘 창문 틈으로 내다보니까 이웃집 할아버지가 살금살금 다가와 감자 봉투를 현관에 놓고 사라지는 거야.“


“그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때 아들 둘을 잃고 할머니와 둘이서 농사를 지으며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다오.“


한동안 환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우리 성당으로 들어가요. 사무실에 차를 달라고 부탁할게요.” 아내가 할머니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럽시다” 할머니는 앞장서 성당안으로 들어가셨다.


연습을 하던 성가대는 우리가 성당안으로 들어서자 앞다퉈서 크리스마스 인사를 했다. 무뚝뚝한 독일사람들도 명절 때가 되면 인사성이 밝아진다.


“구텐 바이나크텐 (성탄을 축하해요)!”


“구텐 바이나크텐!”


“구텐 바이나크텐!”


성가 대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젊은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60,70대 노인이 대부분이다.


성당 뒤좌석에 자리 잡은 할머니는 노인 성가대원들이 장중하게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롤송을 배경음 삼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참 세상은 아름답구나’느꼈어요. 노부부를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했다오. 하지만 내게 은혜를 보답할 능력이 없었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외에는. 그후 두 달 동안 도움을 받다가 친척이 있는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그분들께 작별을 고했다오. 다행히 조그만 가게에 취직해 그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며 두 아이를 공부시킬 수 있었지. 큰 애는 지금 베를린에서 은행지점장으로 있고 딸애는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다오.“



“그런데 할머니 그 바구니는 뭐예요?”



“아 참!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한 이십년은 됐나 보오. 아마 이 맘 때일거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TV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어린이들이 전쟁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어. 그때 갑자기 머리 뒤통수를 맞은 듯 전쟁통 기억이 떠오른 거야. ‘그래! 은혜를 갚을 때가 온 거야’ 하고 말이지“


“할머니, 은혜가 뭐예요” 딸아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


내가 받은 은혜, 갚아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


“그래! 너도 궁금하구나? 우리가족이 전쟁통에 노부부로부터 매일 감자를 하나씩 얻어서 그 어려운 때 살아남았으니 이제 내가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매일 아침 식사를 거르는 대신 식사비를 저금하기로 결심했다. 독일사람들은 아침식사로 빵과 우유, 소시지 한 조각을 먹는다.


“아침 식사비가 3마르크(약1800원)되는 셈이지, 아침을 금식기도로 대신하고 그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어요. 식사시간 동안 내가 전쟁중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갑자기 나와 아내는 할머니 말씀을 듣는 순간 온 몸이 떨려 왔다. 딸아이는 갑자기 숙연해진 우리 모습이 이상한지 두리번거리며 우리 얼굴을 쳐다봤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3마르크의 돈을 모았다오. 1년이면 1천마르크가 모아졌지. 그 돈을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이 바구니에 넣어서 헌금하고 있는 거야.“


우리 가족이 마음에 들었는 지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존대말 대신 친구간에 쓰는 반말을 사용하셨다.


“할머니! 그러면 20년 넘게 아침식사 대신 기도를 해오신 거예요”


“그때 우리가족이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도를 계속할거야."


말을 마치신 할머니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셨다.


“할 일이 있어서 이제 가봐야겠구려.”


우리가 말릴 틈도 주지않고 할머니는 나와 아내, 딸애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갑게 성탄인사를 했다.


“구텐 바이나크텐”


“구텐 바이나크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할머니를 성당에서 만난 것도, 짧은 대화를 나눈 것도, 그리고 할머니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신 것도.


나와 아내는 영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듯 감동어린 눈으로 작고 꾸부정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할머니는 길을 건너고 빵집을 돌아 골목안으로 사라졌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와 아내, 그리고 딸애는 함박눈을 맞으며 성당문 앞에 서 있었다.


그후 우리가족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그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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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금부터 6년전 그 추운 독일 성당에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적은 것입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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