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신 막내 아들

정종화 (주부)


“1번은 엄마, 2번은 아빠, 3번은 인화, 4번은 민정이...” 6살 아들이 좋아하는 순서를 녀석의 기분에 따라 바꿔가며 말하곤 한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엄마인 내가 항상 1번을 차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같은 반 여자 친구가 생기자 항상 3번과 4번을 주었던 지 누나들의 자리를 여자 친구 이름으로 바꿔 버린 귀여운 내 아들. 토요일에는 유치원이 쉬는 까닭에 맞벌이 엄마, 아빠가 출근하고 누나 둘다 학교에 가버리면 누나들이 학교에서 돌아 오기 전까지 서너 시간 혼자 남겨지는데도 “엄마 나 텔레비전 보구 컴퓨터 게임하면 하나도 안 무서워. 대신 엄마 회사 갔다 올 때 아이스크림 사다 줘요..” 하는 근사하고 멋진 내 씩씩이 아들.. 이 아이 때문에 남편과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구순열, 구개열의 내 아들


▲ 단란한 세 남매


구순열, 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정말 표현하기도, 듣기도 싫은 말이지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언청이라 부른다. 임신 9개월에 초음파를 통해 아들에게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언청이라는 말이 내게 이렇듯 다가 올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의사의 오진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병원을 세군데나 옮겨가며 검사를 받아 봤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었다.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나는 다니던 병원을 신촌의 큰 대학 병원으로 옮겼다. 아이의 인중사이가 갈라지고 입천정까지 갈라져 있을 경우에는 수유를 하기 힘들고, 일반 젖병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병원에서 아이의 상태에 따라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1999년 5월 28일 새벽에 진통을 느끼고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신촌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진통이 오면서도 난 산고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제발 이 아이가 정상으로 태어나기를 기도하고 기도했었다. 제발 의사의 오진이기를. 그게 아니라면 입술만.. 부디 입속 천정까지 갈라진 모습이 아니기를 정말 간절히 간절히 바랬었다. 그러함에 내가 느끼는 산고의 진통은 더욱 더 간절하였더랬다. 온몸이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지만 아이에 대한 간절한 기도로 그 힘겨운 산고를 이겨 낼 수 있었다. 두시간 여의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는 입술 인중을 중심으로 입천정까지 갈라진 채로 태어났다.


의사가 처음으로 내게 아이를 보여 주었을 때.. 왠지 모를 원망감으로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늘 착하게만 살아 왔다고 생각하는 나와 나의 가정에 왜 이런 일이 생긴걸까하는 원망감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바로 신생아 집중 치료실로 들어가 인큐베이터 생활을 해야 했다. 구개열과 구순열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정상적인 수유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천정까지 갈라져 있음에 잘못 먹을 경우 식도가 아닌 호흡기 쪽으로 수분이 들어가 큰 일이 생길 수 있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기 때문 이였다. 분만실에서 입원실로 옮기고서는 어두운 얼굴을 애써 감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딸아이를 키웠던 탓에 직장에서 늘 딸딸이 아빠라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았던 남편. 그리 바라던 아들을 얻었건만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수 있었다.


“여보~ 수고 했어요. 우리 아들 나도 봤는데 정말 잘 생겼던 걸.. 녀석이 나랑 쏘옥 빼닮은게 나중에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것 같아..그리고 입술은 말야 여보..내가 열심히 일해서 우리 아들 녀석 조금 잘못된 부분 다 고쳐 줄 테니 전혀 걱정하지 말어..요즘 성형 의학이 얼마나 발달 되었는데 그 정도 쯤은 이젠 아무것도 아니래..알겠지?..”


하루가 지나고 아이를 보러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도착해서 간호사에게 아이를 보러 왔다고 신청을 하고 인큐베이터에서 아이를 안고 우리 부부가 있는 유리창으로 다가 왔을 때.. 남편과 나는 손을 꼭 붙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여보 울지 말어.. 우리가 우는 걸 아이가 알면 얼마나 서운 하겠어.응?.. 자 눈물 닦자..”


남편의 그 말에 난 아예 엉엉대고 울어 버렸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서러움이 밀려 오는 탓에 정말이지 눈물을 그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를 더 병원에서 보내고 나는 남편과 함께 퇴원을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데려 올 수가 없었다. 아직 더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까닭이었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 때는 모두 내 품에 아이를 안고서 병원을 나왔었는데, 아이를 병원에 둔체 나 혼자만 퇴원하여 나오려니 좀처럼 발길이 떨어 지질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께서 끓여 주신 미역국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잠을 잘 때에도 아이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아이가 얼마나 외로울지.. 엄마가 얼마나 그리울지.. 엄마의 젖 한번 못 먹고 있을 내 아이가 얼마나 측은하고 안타깝던지...


▲ 막내 하늘이


남편은 매일 퇴근길에 병원에 들러 아이를 보고 왔다.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도 매일 아이를 보러 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산후 조리를 이유로 어머니가 극구 반대 하시는 까닭에 몇일은 참아야 했다. 아이를 출산하고 대략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남편과 나는 병원에 가서 치과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이었지만 아이는 정말 몰라보게 많이 자라 있었다. 그런 아이를 처음으로 품에 안고서 나는 또다시 버릇처럼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치과 선생님은 아이의 인공 입 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인공 입천정을 만들어 아이에게 분유를 먹일때 끼워 넣고 먹여야 만 분유가 바로 식도로 들어 갈 수 있는 까닭이었다. 산 넘어 산 이다. 중간 중간 병원비를 점검하는 남편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 했다. 이미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던 우리 부부에게는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였던 탓에 남편의 근심은 이만 저만 아니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퇴원일이 잡히고 20일간 병원생활을 했던 아이를 퇴원시키는 날 이였다. 전날 병원비를 정산 받은 남편은 어렵사리 병원비를 마련하였고 우리 부부는 아이를 퇴원시키러 병원에 갔다.


후원금으로 마련한 퇴원비


집중 치료실에서 아이에 대한 주의 사항을 모두 듣고 아이를 안고서는 퇴원 수속을 하러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원비를 모두 내어야만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는데...30분을 기다려도 남편이 오질 않는다. 핸드폰이 사치라며 없었던 남편에겐 연락할 방법이 없는데 계속 기다려도 남편은 여전히 오질 않는다.. 뻘쭘히 아이를 안고 간호사실에서 앉아 있으려니 여간 답답한게 아니었다. 그러기를 두 시간.. 드디어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린체로 뛰다시피 들어 왔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나는 아이의 퇴원비 지불 영수증을 보이고 아이를 안고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남편은 왜 이렇게 늦었냐는 내 질문에 계속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 왔다고 한다.




“당신은 내가 아이랑 병원에서 당신만 눈빠져라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 할 수 있어요? 아이 안고 앉아서 왔다 갔다 하는 간호사들 눈치를 얼마나 본 줄 알아요?”


이렇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남편은 그저 미안하단 말만 할뿐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집에 도착 해서 아이를 눕히고 서투른 손짓으로 아이의 인공 입 천정을 끼워 놓고 분유를 먹이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일까?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선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들어온 남편의 손에 통장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내게 건넨다.. 통장엔 오늘자로 입금된 내역이 17개나 있었다. 모두 내가 아는 남편 친구들의 이름이였다. 20만원, 7만원, 3만5천원, 11만원..등등 모두 일정하지 않게 입금된 내역이었다. 모두 합해서 134만원이 입금 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냐고 남편에게 뭍자..


▲ 올해 여름휴가 때 경주에서


“여보 사실 퇴원비를 정산하러 갔더니 어제 물어 본 것보다 90만원이 넘게 많이 나왔더라구.. 치과 진료비를 정산할 때 포함시키지 않아선 가봐.. 아무튼 당신도 알다시피 퇴원비 마련하느라 집에 있는돈 없는 돈 다 모아서 만들어 갔는데,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말이야..해서 친구들 한테 전화를 했어. 당신 알다시피 난 남한테 돈 꾸는거 잘 못하잖어. 어렵게 창섭이랑 성만이한테 전화를 했는데.. 녀석들 모두 여유가 없었나봐. 내일이나 일주일 후에 빌려달라고 하는게 아니고, 지금 당장 필요한데 지금 바로 보내 달라고 하니 녀석들도 무지 당황 스러웠을꺼야. 아뭇튼 계속 현금지급기 앞에서 돈이 들어 왔나 확인을 하는데.. 한시간쯤 지나서 계속 조금씩 입금이 되는 거야.. 두 친구한테만 말했는데 이 녀석들이 자기가 없으니깐 다른 친구들한테까지 다 전화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돈 모두 나한테 보내라고 했던 모양이야...봐봐.. 상철이는 3만원도 아니고 5만원도 아니고 3만 5천원을 보냈자너...이녀석들 모두 정말 지들 주머니에 있는돈 탈탈 털어서 보내 준거야.. 고맙게도.. 90만원이 필요 하다고 했는데 134만원이나 들어 왔자너.. 내 친구들 정말 멋지지?...당신한테는 내가 좀 미안하기도 해서 그냥 아는 사람 만나서 늦었다구 한거야.. 당신까지 그런 걱정하게 만드는게 싫어서..정말 미안해 여보..그리고 우리 이제부터 열심히 살자. 좀 더 아끼고 내가 좀 더 벌고.. 아까 아이 퇴원 시키는데 간호사가 그러더라구..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 이 병은 아주 많은 돈이 들어 간다구..두번째 수술까지는 보험 혜택이 있지만 그 후 수술은 미용 성형으로 분리 되서 보험 혜택을 못 받는데.. 그러니 당연히 돈이 많이 들어갈 테지...”


난 남편의 마음이 되어 다시 엉엉 울었다. 남편의 친구들이 너무 고맙기도 했고. 병원에 앉아 영문도 모른체 남편을 원망하며 기다렸던 나보다는 퇴원비가 모자라 당황한 남편이 여기 저기 전화해 가며 돈을 구하려 했던 것이 수십배는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더 힘들었을 남편에게 그리 잔소리를 해 대었으니 남편에게 여간 미안한게 아니였다. 남편과 내게 있어 그날 친구들이 보내 주었던 134만원은 그 어떤 큰 돈 보다도 소중하고 커다란 돈 이였다. 아마도 남편과 나는 그 돈을 평생 잊지 못하고 맘 속에 자리하게 될 것 같다.


그 소중한 우리 아들은 이제 6살이 되었고..아이가 태어난지 100일때의 1차 수술로 갈라져 있던 인중을 하나로 만드는 수술은 다행스럽게 잘 되었다. 입속 천정을 붙이는 수술은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에 했는데 이 역시도 다행히 잘 되어 후유증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이의 수술비를 대느라 남편과 나는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남편은 쉬는 날에도 막일까지 해가며 가장으로써의 책임을 다하고저 노력했다. 해서 다행히 더 이상은 그날의 고마운 남편 친구들에게 또 다시 돈 빌리는 일은 만들지 않고 병원비를 치러 낼 수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와 둘째 아이의 희생이 동반되어 있었다. 남편과 나야 조금 못 먹고 덜 입고 사는 것을 모두 참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까지 남들처럼 잘 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엄마로서 참으로 속상하고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생명으로 가르치시는 사랑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아직은 흉이 남아 있는 입술 언저리와 코를 수술해야 하고 치아와 잇몸도 수술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이제는 나도 남편과 함께 매달 작지만 소중한 월급을 타는 직장이 생긴 탓에 남편의 버거움을 조금 나누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 아이를 낳고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나 하는 생각에 하늘과 세상을 무척이나 원망했었지만, 이제는 그나마 내가 노력해서 아이의 장애를 극복시킬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더 감사하게 되었다. 세상에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아이의 장애로 인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많이 보았고 느꼈기 때문이다. 돈이 산 더미 처럼 많을 지라도 치유되지 못할 장애를 갖은 사람도 있을테고, 조금의 돈만 있더라도 치유할 수 있는데,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도 많을 것이기에.. 나와 남편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며 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렇듯 씩씩하고 엄마를 사랑해주는 근사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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