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솜사탕

서순원


실버들 가지 가지에 연두빛 고운 움이 트는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와 철길 옆에 있는 기와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 한 모퉁이에서 기와를 굽고 남은 잿더미속에 남아 있는 숯을 부지런히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갑자기 언덕 위 큰길에서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힐끗 아이들을 올려다보았다. 울긋불긋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와 아재비(삼촌) 혹은 오래비(오빠) 손을 잡고 왜관 초등학교로 입학식을 치르러가는 중이었다.


그 순간 아침내내 불안했던 내 조그만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내 나이 8살. 입학이 1년이나 늦었다. 그 당시 경북 왜관에는 불란서인 노벨도 신부가 1937년 5월 5일 개원한 소화여자 학원이 있었다. 4년제로 개설된 이 학원은 성바오로회 수녀들이 아이 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주로 시골 나이 든 처녀들이 다녔다. 어머니는 내 나이 열 셋이 되면 이 학원에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싫었다.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 게다가 중중 땋은 삼단 같은 긴 머리를 철렁대는 이 덩치 큰 처녀들과 학교를 같이 다닌다는 것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이 두렵고 싫었다. 내 생각엔 초등학교를 졸업해야만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고 믿었 기 때문에 소화여자 학원이 더더욱 싫었는 지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조급하면 할수록 어머니 말씀에 더욱 순종했다. 이웃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고 일 나가신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솔잎사귀로 불을 지펴 보리밥을 지었다. 설거지와 청소는 물론이고, 3살난 동생 양원이를 보살피는 일은 늘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멀리 품팔이를 가실 때 양원이를 데리고 가셨다. 나는 2, 3일씩 동생을 안 보살필 때는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땔감을 줍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일본말도 열심히 배웠다. 오로지 초등학 교에 가려는 욕심으로. 나는 그때 무척 남들처럼 초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1942년 3월 초순 일제하. 세계 2차 대전이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어머니는 콩닥질하는 내 마음을 아시는 지 모르시는지 ..... 묵묵히 손만 놀리셨다. 나도 껌둥이가 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재먼지를 일구면서 숯을 골라 내 소쿠리에 정신없이 채웠다. "엄마, 그만 집에 가. 나도 학교에 들어가고 싶고만... 오늘은 입학날인데...."


우리 형편을 뻔히 아는 나는 말끝을 흐리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어머니는 구부렸던 허리를 펴시며 무엇인가 결심하 신 듯 "오냐, 가자!" 어머니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소쿠리를 집어들고 집까지 5리길을 단숨에 내달았다. 소쿠리를 부엌바닥에 집어 던지고 찬 물을 대야 가득 떠서는 새까만 얼굴과 두 손발을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며 씻고 또 씻었다.


수건으로 닦는 둥 마는 둥 나는 성당갈 때에만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옷이래야 성당 옷과 입고 있는 옷 2벌뿐이었다. 내게 단 한 켤레의 양말이 있었는데 입학식에 신으려고 그 엄동설한에도 아껴 두었는데 그만 급히 서두느라 신는 것을 잊었다)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오셨다.


"엄마, 내 먼저 가도 돼? 벌써 너무 늦었구만....." 나는 어머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냅다 뛰었다. 학교로 학교로.


아아, 그러나 입학식은 이미 끝나고 아이들은 가족들과 재잘거리며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모은 다음, 제일 뒤에 나오는 아이를 붙잡고 다짜고자 "어느 방이고?" 어리둥절한 아이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다시 꽥소리를 지르며 다그치니까 그 애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저 건물 오른 쪽 첫째 교실이다."하고 말씀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쏜살같이 쫓아간 나는 교실 문을 벌컥 열고 쌕쌕 숨을 고르느라 인사도 못하고 서있었다. 교실에는 일본 여선생이 칠판에 무엇 인가를 쓰다가 깜짝 놀라 나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윽고 내 몰골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을음 앉은 머리카락은 세수할 때 온통 젖은데다 뛰어 오느라고 수세미 같았다. 나막신에 깡총한 무명 치마저고리.



"왜 왔니?"

"입학하러 와심니더."

"아버지는?"

"돌아가셨심니더."

"어머니는?"

"일하러 가셨는데 이따 오실깁니더."

"그 외에 아무도 없냐?"

"언니는 피복조합에 다니고 오빠는 대구서 공부하고, 얼라 동생은 주인집 할배한테 맺기심니더."

"네 이름은?"

"오미네 쥰겐."

"너 일본말 할 줄 아니?"

"쪼매 암미더."

"그럼 시험을 보자. 들어와! 늦었지만 합격하면 입학시켜주지."


이날 본 시험은 연필은 어떻게 세고 종이와 비행기, 사람은 어떻게 세는지 일본말로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나에게 연필부터 쥐어주었다.


"일본 니혼 삼본 고혼 료끄본 합본......."

"좋아, 종이는?"

"이찌마니 니마이 선마이 요마이 고마이 료끌마이...."

"됐어, 비행기는?"

"이끼 니끼 산끼 욘끼, 고끼....."

"그만, 사람은?"

"히토리 후타리 산닌 욘닌 고닌..."

"그만하고 숫자를 세어 봐!"

"히도쓰 후다쓰 미쓰 요쓰 이쓰쓰...."


"잘했다. 오미네 쥰겐! 저는 오늘 늦게 왔지만 제 1등으로 합격이다."


나는 대답대신 승리의 웃음을 얼굴 가득히 피웠다.


"그런데 너 왜 이리 늦게 왔니?"

"아침 일찍 기와공장에 가서 숯 한 소쿠리를 주워 오느라고 늦었습니더."

"그래서 새까맣구나. 착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숯을 주워야 했니?"

"엄마 말씀이 어제 저녁에 기와를 구운 재를 퍼내었기 때문에 늦게 가면 다른 사람들이 숯을 다 주워가고 없답니더 ."

"응, 그래? 일본말은 누구에게 배웠니?"

"언니하고 오빠한테 배웠습니더."

"잘 알았다. 나는 하나무라 선생이고 너의 담임이다. 앞으로 절대로 지각하지 말고 공부 잘해야 한다. 알았지?"


이때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선생님은 내 더러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얘는 영리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니까 어렵더라도 학교에 계속 보내세요."

그녀는 등교일과 준비할 것, 월사금은 한 달에 1원이고 매달 15일까지 납부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다.

나는 너무 기뻐서 큰소리를 외치며 깡총깡총 뛰었다.


그 후 알았지만 하나무라 선생은 유독 나에게만 그토록 까다롭게 시험을 본 것은 내가 워낙 늦게 온대다 혼자요, 또 꼴이 우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내가 선생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지 만약 못했더라면 영원히 초등학교마저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그때 배운 일본말은 잊었지만 일본어로 된 숫자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뜬 마음으로 교문을 나서니 길 한복판에서 솜사탕 장수가 꽃구름 같은 분홍 솜사탕과 파랑 솜사탕을 꼬챙이에 둘둘 말아 팔고 있었다.

그는 동네 아이 들을 상 대로 '솜사탕 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계집애들은 분홍 솜사탕을, 머슴애들은 파랑 솜사탕을 함박 같이 빨아먹었다.


어머니가 내게도 큼직한 분홍 솜사탕을 하나 사주셨다. 나는 너무 좋아서 먹을 생각조차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솜사탕을 보란듯이 하늘높이 치켜들고 집까지 달음질을 쳤다.


이 솜사탕은 내가 한국에 먹어본 '처음이자 마지막 솜사탕'이었다.


세월에도 높낮음이 있던가. 강물처럼 흘러 흘러 그로부터 40여년.


나는 독일 남편과 사이에 태어난 진영, 진주, 진흥 삼남매가 차례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아이들의 입학 전날 밤 함께 자면서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이 솜사탕 이야기를 들려주 었다.

아이들은 모두 내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다. 자기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고서 말이다.





1810년 9월 바이에른 왕이 공주 결혼식을 어마어마하게 치렀다. 이 잔치를 기념해 매년 해마다 열리는 뮌헨의 맥주축제

<옥토버훼스트>. 그 규모가 대단하다.

전 세계인이 참석한다고 할 만큼 세계적인 대축제로 발전한 옥토버훼스트는 9월 하순에 시작돼 10월 둘쨋주까지 계속된다. 이 잔치 마당에는 그 유명한 놀이기구와 맛 좋은 맥주, 전기구이 통닭은 물론이요, 형형색색의 초코렛과 사탕과자이 팔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독 축제가 열리는 곳에 가면 여기저기서 맑은 가을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흰구름 같은 하얀 솜사탕을 만날 수 있다. 해마다 내 자식들은 앞다퉈서 절약한 돈으로 옥토버훼스트의 솜사탕을 사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살같이 세월이 흘러 다시 20여년이 지난 11월. 끝이 어딘 지 모르게 푸른 알프스산맥에 소리없이 흰 눈이 휘날리는 날, 나는 맏딸 진영이와 산맥을 따라 잘스부르크로 차를 몰았다.


진영이의 대모인 엠미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그 옛날 나환자촌(60년도에 엠미와 나는 경북 왜관 삼청동과 전라북도 고창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는 공동체에서 일했다)에 관한 얘기로 꽃을 피웠다.


이때 슬그머니 자리를 비운 진영이가 갓 피어난 연꽃 같은 분홍 솜사탕 3개를 두 팔로 안고오는 것이 아닌가. 진영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엄마, 엄마 분홍 솜사탕!"


윗 글은 서순원 여사가 자신의 어릴 때를 회상하며 보내 오신 자전적 소설입니다.


운명을 가꾸는 재독동포 장애인 서순원 여사의 역경이긴 65년


▲ 서순원 여사. 독일 집에서


"피난길에 일어나보니 사지가 뒤틀리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심한 소아마비에 걸린 거지요. 15살 계집애에게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며칠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쟁통에서 몸을 뒤집는 연습을 했습니다. 목발을 짚고 일어나는데 3년이 걸렸습니다."


올해 예순 다섯살의 서순원씨. 그녀는 늘 빨간 베레모를 쓰고 다닌다. 늘 불꽃처럼 살겠다는 삶의 의지와 각오가 빨간 베레모에 배어난다.


그녀가 독일 땅을 밟은 지 올해로 35년이 된다. 꽃다운 나이에 소아마비가 된 그녀는 병석에서 어떻게든 걸을 수만 있다면 남을 위해 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다. 그리고 다리를 절며 묻고 물어 경북 왜관에 있던 나환자촌 '베타니아집'에서 8년동안 일하며 이들과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런 모습에 감동한 프랑스 해외봉사단이 1965년 그녀의 수술을 주선하면서 프랑스땅을 밟았다. 이것이 조국과의 기나긴 이별이 될 줄 그녀는 몰랐다.


▲ 서순원 여사의 집


이에 프랑스 북 오트레슈 나환촌에서 생활하던 중 건축학을 공부한 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이곳에 와있던 클라우스 콜러씨(65살 ·한국이름 서이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콜러와의 사랑이 알려지면서 공동체에서 내쫓기고 독일 시댁의 반대로 독일땅 을 밟지도 못한 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환자촌에서 우리가 결혼하겠다고 말하자 그 길로 쫓겨났습니다. 달리 갈곳이 없었어요. 때마침 잘스부르크에 한국신부님이 계시단 소식을 듣고 그냥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후 남편의 고향인 독일 바이에른으로 돌아왔지만 동양인, 그것도 여성 장애인에게 누구도 집을 빌려주지 않았다. " 헛간에서 잠 을 자면서 불행해지려도 더 이상 불행할 수가 없었어요. 하루에도 수십번 죽을 생각을 했습니다."


의사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셋이나 낳았다. 보자기로 아기를 싸서 입으로 들어올리고 아이들과 온방을 기어다 니며 살았다.

그의 억척스러움 때문일까.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한국말과 문화를 배웠고 이들 가족의 한국 민속춤 공연기사가 일간지 <쥐트 도이체 차이퉁>에 실리기도 했다.


▲ 서순원 여사의 세 자녀. 왼쪽부터 막내 아들,둘째 딸, 첫째 딸.


세상과 단절된 채 가장의 아내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헌신했던 그는 49살이 되는 1985년 세상속으로 나왔다. 남편이 유산으로 받은 집을 수리해 뮌헨에 한국요리학원을 세우고 뮌헨시 한인회 회장과 한인성당 교우회장을 맡으며 이때부터 한국 장애인과 북한 주민 돕기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1998년에는 그동안 억척스럽게 모은 40만 마르크(약2억5000만원)를 경기도 안성에 있는 성당건축기금으로 내놓았다. 앞서 95년에는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시집 <세월보다 내 갈 길이 더 바쁘다>를 출간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욕심이라면 최근에 쓴 200여 편의 시를 모아 새로운 시집을 내는 일과 매년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팔아 한국의 장애인 관련단체에 기부하는 일이다. "이제 인생은 내리막길이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그냥 내 앞에 주어진 길을 담담하게 걸어갈 뿐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빨간 베레모를 쓰고 집을 나선다.


<이 글은 백경학이사가 1999년 7월 한겨레신문에 쓴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