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가장 오랜 기부자 이희석 박사 인터뷰
푸르메재단의 시작과 함께 17년간 장애어린이와 장애청년의 곁을 지켜온 기부자들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 꾸준히 기부한 이를 찾아 거꾸로 올라가 보니 ‘이희석’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2005년, 푸르메재단이 처음 설립된 해부터 단 한 달도 예외 없이 기부금을 보낸 최장기간 기부자. 오래전이라 기부 사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포항으로 직접 찾아가 만났습니다.
원자력과 푸르메의 상관관계?
“포항공대 가속기연구소로 오시면 됩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냐는 물음에 다소 간결한 답변을 받았는데,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오릅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대뜸 물었습니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와 갓 설립된 푸르메재단이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이냐, 혹시 재단에 아시는 분이 있었느냐”고요.
자리에 제대로 앉기도 전에 질문을 받은 이희석 기부자(57 · 포항가속기연구소 방사선안전실장)가 웃음을 보이더니 “예전에 포항 북부교회에 이지선 씨가 강연을 왔었다”고 입을 엽니다. 그제야 손뼉이 딱 쳐집니다.
“그 강연을 듣고 집에 와서 인터넷을 찾아봤어요. 백경학 이사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의 재활을 위해 푸르메재단을 만들고 병원을 설립한다는 기사였어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부를 결심했어요.”
원자력 전문가에게 원자력을 묻다
이희석 기부자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나와 박사과정에 있던 중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1991년 국책사업으로 포항에 설립된 이곳 포항가속기연구소에 입사했습니다. 지난해 30년 근속을 기념해 상을 받을 정도로 평생 한길만 걸어온 자타공인 원자력 가속기 분야 전문가입니다. 왜 원자력이었을까요?
“어릴 때부터 물리에 관심이 많아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학창시절 기계와 물리 과목을 좋아했고요. 그 당시 원자력은 최첨단 기술이었어요. 미래가 밝은 분야였죠.”
한때 한국의 경제, 산업, 가정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사업이었던 원자력 에너지는 현재 그 위상이 불안정합니다. 이희석 기부자는 지난해 말, 동료 과학자 200여 명과 함께 정부와 의회에 ‘원자력 이용 촉구’ 내용이 포함된 탄소 중립을 건의서를 보냈습니다. 최근 EU가 원전을 신재생에너지에 포함하기로 하면서 구사일생의 길을 걷게 된 원자력,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데요. 마침 전문가를 만났으니 중요한 이슈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그 이슈 때문에 바빠졌어요. 원자력이 좋고 나쁨을 떠나 현실적으로 국내에서 그보다 더 좋은 대안이 없는 것이 사실이에요. 풍력이나 태양력 발전 기술이 크게 향상한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 환경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의도가 좋아도 그것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않으면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해왔습니다. 신재생에너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국내 최대의 풍력발전소가 대관령에 들어설 때 환경보호단체들이 극렬하게 반대했어요. 산을 밀어내고 들어섰거든요. 소음공해도 심하죠. 더 큰 문제는 바람이 충분하지 않아 가동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이에요. 태양열 역시 원자력을 대체할 정도의 에너지를 얻으려면 역시 전국의 산들을 밀고 설치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요. 환경을 위한 선택인데 오히려 환경을 더 위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죠.”
이희석 기부자는 원자력이 최상의 에너지 기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없음에도 ‘신재생에너지는 좋은 것’이라는 프레임에만 갇혀 무작정 원자력을 쓰지 말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거예요.”
꾸준함이 만든 것
한 분야를 연구한 기간 38년
한 직장에서 근무한 기간 31년
한 재단에 기부한 기간 17년
한 분야, 한 직장에서 보낸 반평생이 지겨울 법도 한데, 여전히 공부가 재미있고 연구하고 싶은 것이 아직 많다는 이희석 기부자. 그런 그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딱 한 번 있다고 고백합니다.
“의대를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의사의 업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돕는 것이잖아요. 이 학문으로는 누군가를 직접 도울 수는 없으니 아쉽더라고요.”
대학생 시절, 교회에서 어린이 관련 재단과 연이 닿아 봉사와 기부를 시작한 이후 이희석 기부자에게 나눔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모두 빈손이지만 각자의 운과 역량에 따라 누군가는 부족하고 누군가는 넘치는 삶을 살잖아요. ‘부족함 없다는 것’은 자기 힘만으로 일군 게 아니라 부족한 이에게 남은 것을 돌려주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임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넘치는 것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게 그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에 참 감사해요.”
17년의 시작은 ‘신뢰’
이희석 기부자가 푸르메재단을 신뢰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기부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푸르메재단에 수입과 지출을 명확하게 공개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어요. 기부금으로 후원도 하지만 기관운영비 등에도 쓸 수밖에 없는데 그 비중을 투명하게 공개하면 기부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단체 스스로도 투명하게 쓰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될 테니까요. 그 의견을 즉시 반영해 수입과 지출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님 장례식 때 들어온 조의금을 병원 건립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돈을 왜 기부하셨냐는 ‘우문’에 “그 돈을 제가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어요. 필요한 곳에 쓰이면 그게 더 의미가 있죠.”라는 현답이 돌아옵니다.
정년퇴직 후 저개발 국가로 가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선진 기술을 알려주고 싶다는 이희석 기부자의 꿈에는 평생을 바라온 나눔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퇴직 전까지 제 학문 분야에 기여하고 남은 생은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어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명감, 처음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의리, 한 번 정한 것에 변치 않는 믿음을 주는 꾸준함, 그리고 간절히 나누고자 하는 마음까지, 이희석 기부자의 삶은 푸르메의 초심이자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닮고 싶은 모습입니다. 30주년, 38주년... 함께한 시간만큼 당신을 닮아가는 푸르메를 지켜봐 주세요.
*글, 사진= 지화정 대리 (커뮤니케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