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의 어린이 사랑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이철재 대표 2편


 


버클리대와 미 정부는 이철재에게 급경사로 된 캠퍼스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최고급 전동휠체어를 지원하고 기숙사와 강의실에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했다. “좋은 보조기구를 지원받아 편리하게 생활했지만 갑자기 중증장애인이 된 저에게는 모든 것이 장벽처럼 보였습니다. 누가 도와줄 수 있지만 결국 많은 시간을 더 혼자 해나가야 했습니다. 시련이 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 모든 것이 시련의 연속이었다. 남들이 10분이면 할 수 있는 샤워가 그에게는 큰 고역이었다. 혼자 옷을 벗는 일도 힘들었지만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을 때면 단추가 끼워지지 않아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갈 때도 있었다. 이른 아침 시작하는 실험을 위해 그는 새벽 4시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캠퍼스 꼭대기의 강의실 출석을 위해 개조한 차량을 타고 다닌 이철재 대표(왼쪽)가 졸업식장에서 열띤 박수를 받고 있다.

노력 끝에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졸업장을 받았다. 향학열에 불탄 것일까.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루하루 세미나를 준비하는 일도 버거운데 설령 교수가 되더라도 어떻게 강단에 설 것이며, 강단에 선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나에게 교수의 재능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날마다 썰물처럼 몰려왔다. 자신이 없었다. “방황을 하다 마침내 박사과정을 자퇴하고 실리콘 밸리에 있는 작은 컴퓨터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년 일하다 보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났지요. 후배들을 모아 작은 IT기업을 창업했습니다.” 때 마침 한국에서도 IT붐이 불자 그는 아예 귀국해 한국에 회사를 세웠다.


2008년부터 8월부터 푸르메재단 통장으로 매달 50만 원의 후원이 들어왔다. 개인이 하기에는 큰 금액이었다. 은행을 통해 알아보니 송금자가 이철재 씨로 되어 있었다. <쿼드디멘션스>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대표라고 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 회사가 입주해 있는 여의도 63빌딩 로비를 찾았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사업가를 예상했는데 기부자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4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었다. 바로 전동휠체어를 탄 이철재 대표였다. 서글서글한 눈매처럼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키도 185㎝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자신의 별명이 키다리 아저씨라고 했다.


귀국 직후인 2000년 설립된 <쿼드디멘션스>는 임직원이 80명이 되는 성장일로의 벤처기업이었다. 초면이었지만 마치 오래전 만난 사이처럼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가졌던 18살 소년의 푸른 꿈과 사고로 인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과정까지 탄식과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2012년 4월 강지원 대표와의 기부전달식
2012년 4월 강지원 대표와의 기부전달식

“저의 집이 푸르메재단에서 멀지 않은 청운동에 있습니다. 매일 그 앞을 지나 출근하지요. 어느 날 노란색 푸르메(푸른 산이란 뜻)란 간판을 보고 ‘환경단체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장애어린이의 조기발견과 재활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직 없는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조기치료의 중요성을 절감하지요. 저는 운 좋게 미국에서 가장 좋은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저에게 4000만원이 넘는 좋은 전동휠체어와 각종 보장구를 제공해줬고, 원하는 공부할수 있게 해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거지요. 그래서 마음 한 곳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푸르메재단의 바램은 현재 재단이 들어선 효자동 네거리에 장애어린이를 위한 재활의원과 장애인전용치과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도 시간과 돈 걱정을 하지 않는 병원이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한순간 장애를 갖게 되면 처음에는 주어진 상황을 부정하고 분노하게 되며, 좌절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는 네 개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충분한 준비를 거쳐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병원이 하나라도 한국에 있었으면 좋겠고 그 일을 푸르메재단에서 해줬으면 합니다.”


이철재 대표와 어머니
이철재 대표와 어머니

2011년 푸르메센터 착공식을 가졌다. 600평 종로구 소유 부지 위에 건물을 지어 종로구에 기부채납한 뒤 그 안에 재활의원과 치과, 복지관을 운영한다는 계획이었다. 75억원의 건립비와 치료기자재 및 초기운영비 25억원 등 모두 100억원이 필요했지만 그때까지 80억원이 모금된 상태였다. 매일 기업의 문을 두드리고 거리모금에도 나섰다. 어느 날 이철재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금 여유가 있어서 기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 출장을 다니며 그림을 한 점 봐놓았는데 어린이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완공되는 건물 안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그림을 설치할 수 있게 약속해주십시오.”


가족
가족

며칠 뒤 회계담당 직원이 흥분해 달려왔다. 10억원이 재단통장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송금자는 이철재라고 쓰여있었다. <쿼드디멘션스>를 큰 기업에 인수합병하는 조건으로 그 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받았는데 이것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재단에 기부한 것이었다. 비상장주식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기부한다는 것은 수중에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 어려운 일이다. 그가 뉴욕갤러리에 주문한 피터 오페임의 그림 <비행하는 강아지와 아기조종사>도 재활의원 대기실에 설치됐다. 2012년 7월 문을 연 푸르메센터에는 하루 1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치료받고 있다. 그가 기증한 대형그림 앞에 늘 많은 꼬마들이 몰려든다. 그림 옆에는 작은 안내 문구가 붙어있다. ‘어린이를 사랑한 이철재 키다리 아저씨가 기증했습니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이철재 대표, 푸르메재단 DB


푸르메 강당이 '이철재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푸르메센터와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크게 기여한 이철재 기부자의 참된 뜻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푸르메센터 강당에 그의 이름과 모습을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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