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순간
김종옥 7월 칼럼
어떤 모임에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워낙에 그리 담백한 인간이 아닌지라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어떤 특정한 때를 지목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행복하지 않거나 이도저도 아닌 무덤덤한 시간이라고 말하게 되는 셈일까, 고통스럽지 않다면 모두 행복한 시간으로 여겨야 하는 건 아닐까. 고통이라는 것도 견딜만한 시간이라면 그것을 행복한 시간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다 결국 “나의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는 어마 무시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행복’이라고 하려면 너무 많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 모든 까다로운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쉬운 대답이 있었다. 복잡한 계산 말고 그냥 내가 가장 즐거운 시간을 찾으면 그 시간이 바로 행복한 순간에 대한 대답이었을 게다. 내게 그것은 바로 영화 보는 시간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이 올라갈 때 그 숱한 사람들이 오로지 나 하나를 위해 그 영화를 애써 만들었구나 생각하면 고맙기 짝이 없다. 그들 덕에 나는 두 시간 남짓 호사를 누린 것이다. 그 몰입의 시간이 무엇보다도 즐거우니 바로 그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랴.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때가 있는데, 그런 때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다. 영화 속 숱한 샛길과 뒷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슬프거나 아프거나 괴이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관에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쩔쩔 맸던 <액트 오브 킬링>(죠수아 오펜하이머 감독)같은 영화일지라도, 반복해서 보는데도 고통의 양이 전혀 줄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두 시간은 호사였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영화’라는 걸 목록으로 적어둬야겠다는 결심은 그래서 한 것이다. 반복해서 봐야 하는 영화를 깜빡하고 놓칠 때도 있고,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니 목록을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심심하고 할 일 없을 때 하나씩 하나씩 꺼내볼 참이다. 가끔 영화를 멈추고 창 밖에 검은 구름이 지나는 것도 보다가, 그러다 비오는 소리도 듣다가 하면서. 작고 노란 등을 어깨 너머로 켜두고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나는 얼마나 즐겁겠는지.
엄마 됨의 어려움 <케빈에 대하여>
앞선 얘기가 길어졌다. 영화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에 관해 쓰려던 참은 아니었다.(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가 나오면 남이야 어떻든 설레발이 길어지는 법이다.) 내 인생의 영화 목록 속에 있는 두 영화를 말하려다가 이렇게 샛길을 돌았다. 두 영화를 처음 본 것은 7, 8년 전이다. 이후 여럿에게 소개했는데, 특히 장애인부모운동을 하는 동료들에게 많이 권했다.
첫 번째는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감독)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거나 우리는 작가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등장인물을 납득하기 위해 애쓸 때가 많다. 영화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은 내가 본 영화 속 인물들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물이다. 엄마 에바는 의도치 않게 케빈을 낳았고 케빈은 에바의 삶의 발목을 잡았다. 아이는 의도치 않게 태어났고, 그 의도치 않은 자기 삶을 엄마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처음부터 실패하고서 시작했다. 케빈은 에바를 가장 아프게 할 방법으로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며 악마가 되어갔고, 에바는 이해와 납득, 포기와 사랑 등 할 수 있는 모든 엄마의 덕목을 가져왔으나 결국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화 말미에 에바는 아들에게 묻는다. 대체 왜 그랬냐고. 이는 영화 보는 내내 관객이 케빈에게 수도 없이 물었던 질문이었을 게다. “이제는 듣고 싶어, 왜지?” 에바의 물음에 케빈은 이렇게 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I used to think I knew, but now I’m not so sure.)
이렇게 말할 때의 케빈의 눈빛이 기억난다. 그 쓸쓸하고 스산하고 슬픈 눈. 그리고 그 대답을 듣는 에바의 표정(틸다 스윈튼이었다!). 무언가 삶을 지배했던 끝도 없는 격렬한 싸움, 그것을 내려놓으려는 이들의 표정이란 이런 것이었을 게다.
감독은 ‘엄마가 되는 것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설마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엄마인 에바를 보면서 위안을 받으시라고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에바를 보면서 누구나 자기 처지를 빗대어 생각해 보기는 했을 테고 적잖이 위안도 받았을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것처럼 에바가 애초에 잘못 시작했다 하더라도 에바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온갖 이성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케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이해할 수 없을 땐 이해하는 척 하면서 견뎌냈다. 왜 당신은 엄마인 척만 했느냐, 왜 진심으로 엄마이지 못했느냐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최선이고, 그 최선이라는 점에서는 진심인 거다. 케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에바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을 다 온전히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자신을 온전히 납득시킬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아무튼 이 영화를 보면,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디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낯선 세계에 와 있는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서있는 이 세계도 낯설고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낯설다. 그들의 엄마인 우리 역시 나의 세계가 그리 능숙한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척하며 살아가며 아이를 이 익숙한 풍경 속에 넣어보려고 아등바등 댄다. 그러면서 우리는 많은 순간, 그저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견뎌가며 살아가기도 한다. 에바의 고통, 실수, 회한과 더불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경건함, 성찰, 그리고 탈진, 인내, 그리고 사랑까지, 우리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져야 하는 엄청난 ‘견뎌냄’의 덕목들을 영화를 통해서 본다. 그리고 아파서, 서로를 위무한다. 잘 견디시라고.
조화롭고 쓸쓸한 <메리와 맥스>
두 번째 영화는 <메리와 맥스>(애덤 애리엇 감독)이다. 호주에 사는 메리라는 8살 소녀와 미국 뉴욕에 사는 맥스라는 40대 아저씨의 우정을 담은 클레이애니매이션 영화인데,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한다. 친구도 없고 부모에게 돌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메리는 문득 아무 주소나 찾아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우연히 아스퍼거 장애를 가진 맥스가 받으면서 둘은 펜팔 친구가 된다. 맥스는 늘 계획된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면서, 메리는 파란만장하게 성장해 가면서 서로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주고받는다. 둘은 오해로 말미암아 우정을 깼다가 결국 맥스가 메리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편지를 보내고, 메리는 뉴욕으로 맥스를 만나러 오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실화에 바탕을 두어서 그런지 영화 속 맥스는 행동이나 말, 습관이 모두 생생해서 아스퍼거를 갖고 있는 이의 전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메리와 맥스는 다소 엉뚱한 생각과 습관을 갖고 있는데 그 둘은 그런 것들이 참 절묘하게 조화롭고 재밌다. 그 둘이 보여주는 교감의 세계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매혹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내가 이 영화를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맥스의 일상이다.
맥스는 혼자 살면서 일상의 시간표가 잘 짜여 있다.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사교클럽에도 나가(기 싫지만 시간표가 그리 짜여서)고, 복지사와 의사의 정기적 상담도 받는다. 맥스는 지하철 표 받기, 국수 포장하기, 장난감에 로고붙이기, 배심원, 청소부, 사무용품 보급 등의 일도 했다. 그는 또 번잡하게 사는 게 싫고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서 귀마개를 하고 살며, 모자를 써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다. 투명인간친구와 한집에 같이 살기도 했고, 좋아하는 인형들을 모으는 취미도 있다. 말하자면 맥스는 뉴욕이라는 도시 속에서 일하고, 즐기며 안분자족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사와 의사의 정기상담을 받아가며!
이 영화를 본 것이 2012년쯤이다. 그 때 맥스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발달장애를 가진 이가 우리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델을 상상했다.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가 마련되면 얼마든지 가능한 평화로운 삶이 아니던가. 이미 한참 전부터 남의 나라에선 자연스러운 일이 왜 이 나라에선 이렇게 더디 가는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선언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작했던 농성이 68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그 사이 대집회도 하고, 209명이 삭발도 하고, 흰옷을 입고 삼보일배도 하고, 천막농성도 했다. ‘왜 장애를 가진 자기 애를 국가에 떠넘기려느냐’는 억울한 소리도 많이 들었다. 존재를 놓고, 한 생명을 놓고 ‘내 책임이다’, ‘네 책임이다’를 말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이 애니매이션 영화를 권해야 한다. ‘이 영화는 만화가 아니라 실화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발달장애를 가진 이가 세상 속에서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사회복지 시스템을 갖추라는 말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라면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 이 당연한 소리를 세상이 듣게 하려고 삭발하고 단식하고 절하고 거리에서 한뎃잠을 잤다. 그래도 참말 다행한 것이 우리는 지금 이 나라에서 뭔가 말이라도 들어줄 희망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휴전선이 평화공원이 되고, 부산에서 유라시아 횡단철도를 타게 될 날이 머지않았으니 이 좋은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도 더 좋은 거 많이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엄마가 없더라도 말이다.
*추신 : <메리와 맥스>는 끝에 눈물이 왈칵 올라온다. 처음에 이 영화를 아들과 함께 보았는데, 숨을 죽이고 울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은 그야말로 폭포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있었다. 아스퍼거를 갖고 있는 맥스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했던 걸까.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녀석의 폭풍눈물을 보면서 만감이 오갔다. 왜 울었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볼 때마다 아들의 눈물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린다.
*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