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살펴본 장애청년 일자리의 미래
농업만큼 우리 삶에 직접적이면서 오래된 산업은 없다. 굳이 찾자면 수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정착하고 문화를 형성하며 시작했던 산업은 농업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기술 발전과 산업 전환이 있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업의 대다수는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작물을 수확해서 팔거나 스스로 소비하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농업은 1차산업이고 새벽부터 해야 하는 힘들고 거친 일이며, 큰돈을 벌 수 없다는 인식이 일반인에게는 많이 남아있다. 제주도에서 만난 두 농업법인의 모습은 이런 농업에 대한 오랜 편견을 크게 바꿔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차 농업과 문화상품이 멋지게 결합된 보롬왓 농장
제주공항에서 30분, 한라산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푸르고 너른 언덕이 펼쳐진다. 보롬왓. 제주방언으로 ‘바람 부는 밭’이라는 이름을 가진 메밀농장이다.
농업에도 공간디자인이 필요할까? 보롬왓에서 찾은 답은 ‘그렇다’이다. 10만평에 이르는 넒은 대지는 작물에 따라 반듯반듯하게 나눠지고, 계절마다 서로 다른 모습과 색으로 드라마틱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초봄에는 하얀 메밀꽃밭과 청보리밭이 절경을 이루고, 여름에는 보랏빛 라벤더 밭이 지나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메밀싹이 겨우 싹을 내미는, 그래서 텅 비어 보이는 겨울조차도 보롬왓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올망졸망 초원에 놓여진 옹기들이 찾는 이의 마음을 녹여주고 도닥여준다.
보롬왓 농장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벽돌과 철로 세운 간결한 디자인의 카페 보롬왓이 있다. 언덕을 걸어올라와 마침 차를 한잔 하고 싶어지는 시간, 보롬왓 카페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선물 같은 공간이다. 농장에서 수확한 메밀로 만든 간단한 간식과 향 깊은 시그니처 커피가 있다.
카페 안은 특별한 인테리어도 럭셔리한 소품도 없지만 그 단정함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담아낸다. 겨울이 지나면 활짝 열려 야외카페로 변할 통유리 중문 너머로는 너른 풀밭이 있어 아이들과 새끼양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 툭툭 놓인 야외테이블은 맑은 바람을 느낄 수 있어 햇살 좋은 날이면 인기가 많다.
보롬왓을 운영하는 한울영농조합은 농부들이 모여 만든 조합이다. 아무도 찾지 않던 외진 제주 산간 메밀밭을 6년여 만에 문화와 축제, 체험과 가공‧판매를 함께 묶어 일 년에 수십만 명씩 찾아오는 손꼽히는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여전히 너른 밭에서 메밀과 청보리와 라벤더와 버섯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농업이 중심이지만 동시에 계절마다 콘서트와 축제가 열리는 문화공간으로서 보롬왓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1차산업인 농업과 2차, 3차산업인 제조업과 문화관광산업이 멋지게 융합된 모델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모든 문화적 진화가 정부나 기관이 아닌 농민들이 모여 스스로 찾아낸 모델이라는 점이다. 메밀조차 채산성이 낮아 재배를 고민하던 척박한 땅에 농민들이 모여 조합을 만들고 힘을 모아 메밀과 라벤더와 버섯, 고로쇠 등 작물을 다양화하여 재배했다.
친환경 농업을 위해 양을 키워 잡초를 없애고, 그 양과 함께 아이들이 뛰노는 언덕에 카페를 만들어 부모들에게 힐링을 선물했다. 메밀꽃이 하얗게 피면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와 음악회를 열었고, 메밀꽃이 질 무렵이면 보랏빛으로 피어나는 라벤더와 수국길이 장관을 이루도록 공간을 가꿨다. 모두가 조합원들의 노력과 함께하는 이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일궈낸 멋진 성과였다.
보롬왓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 풍경과 커피 향을 잊지 못해 SNS에 보롬왓의 풍경과 그들이 느낀 행복감을 퍼 나른다. 보롬왓은 이제 5월이면 제주도에서 꼭 방문해야 할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농업과 IT기술이 결합한 미래농업의 새로운 모델, 제주스마트파머스
보롬왓이 농업과 문화산업을 결합한 형태의 미래형 농업이라면 제주스마트파머스는 농업과 IT 산업이 결합된 모델이다. 한라산을 두고 보롬왓 반대편 자락에 자리한 제주스마트파머스는 외형적으로도 보롬왓과 정반대인 모습이다. 보롬왓이 자연의 모습을 가능한 그대로 유지한 반면 스마트파머스는 스머프 집처럼 생긴 핑크색의 반원형 구조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스마트파머스는 생산성이 낮은 노지 메밀밭을 최첨단 표고버섯 스마트팜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현재 50평의 표고버섯 스마트팜 7개동이 운영 중인데 추가로 5개동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스마트팜은 최근 우리 농업에서 큰 화두로 떠오른 새로운 미래농업의 한 형태로 농업과 IT를 결합, 생산성과 수익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모델이다. 농업선진국인 유럽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운영되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조금씩 보급되고 있는 초기단계이다.
스마트팜은 사물인터넷 기술과 온실재배를 통해 실시간으로 환경을 제어하고 생산성을 높인다. 토경재배가 아닌 수경재배로 식물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맞춰서 공급해줄 수 있어 지역과 토질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온실 내 환경제어를 통해 기상과 기후의 영향을 최소화시켜 연간 안정적인 재배를 가능하게 한다.
농부의 노동력과 감에 의존해왔던 작물 재배를 컴퓨터와 센서를 통해 제어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24시간 축적된 환경정보와 작물데이터를 수집하여 최적의 환경을 찾아내고, 온도와 습도를 상시 체크하여 적시에 에어컨과 보일러를 돌린다. 이산화탄소가 부족하면 이산화탄소를 주입해주고, 식물의 상태를 측정해 물과 양액을 자동으로 공급한다. 농부는 실시간 모든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다.
스마트팜은 농부에게는 휴식과 여유를, 작물에게는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노지재배에 비해 생산성은 1.5배 이상 높고, 온실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병충해나 미생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해 친환경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다.
제주스마트파머스는 이러한 스마트시스템으로 표고버섯을 키운다. 국내 최고의 표고버섯산지인 전남 장흥에서 표고버섯 배지를 들여와 50평의 돔형 스마트팜에서 재배하는데 한 동에서만 연간 14톤의 표고버섯을 수확할 수 있다.
표고버섯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습도와 온도가 맞춰진 하우스에는 어른 팔뚝만한 참나무 배지(나무톱밥과 표고버섯균주가 뭉쳐진 일종의 배양큐브)가 8단으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이미 한 번 표고버섯 재배와 수확을 마친 배지는 2차 재배를 위한 휴지기에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성질급한 꼬마 표고버섯들이 여기저기서 작은 머리를 속속 내밀고 있어 스마트팜이 표고버섯의 생육에 좋은 환경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트레이 사이를 걸어가며 버섯 몇 개를 따보니 스마트팜은 표고버섯보다 농부에게도 쾌적한 농사환경을 만들어준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표고버섯을 배양하기 위해 기존처럼 참나무에 일일이 구멍을 내어 균주를 심고 그늘에 세우고 기다릴 필요도 없거니와 버섯을 수확할 때도 예전처럼 허리를 굽혀 힘들게 딸 필요도 없었다. 산책하듯 트레이 사이를 다니며 잘 자란 버섯들을 따주고, 배지위치를 돌려주고 물을 주면 나머지 환경은 컴퓨터로 제어된다. 더 이상 농민들이 비가 올까 날이 더울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너무 좋았다.
표고버섯배지를 배치하고 적절한 환경을 맞춰주면 버섯들은 매일 밤낮으로 무럭무럭 자란다. 빠른 녀석들은 1주일, 늦어도 열흘이면 다 자란 버섯을 수확할 수 있는데 첫 배치에서 열흘의 휴지기까지 포함해도 한번 수확하는데 25일 걸리는 셈이다.
스마트팜 재배는 연중 수확이 가능해 일 년에 1번, 혹은 2번 수확하는 기존 농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농장 견학을 마무리하며 동그라니 예쁘게 자란 표고버섯을 바로 따서 먹어보니 식감과 향기가 서울에서 만나는 어떤 버섯보다도 월등히 좋았다.
1차산업인 농업은 생명을 키워내는 일이다. 모든 산업은 이윤을 추구하지만 농업은 이를 넘어 생명의 가치가 중요한 산업이다. 산업의 기준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도외시되어가던 우리 농업이 다양한 IT기술과 문화의 결합을 통해 다시 우리 삶의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어쩌면 우리 농업이 산업으로서의 경쟁력을 넘어 도시의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장애인에게도 치유와 자립을 위한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글= 임지영 팀장 (기획팀)
*사진= 정태영 기획실장, 김해승 간사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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