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행 전세기 이야기
여행이 끝나고 한 달 남짓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여행의 뒷수습 중이다. 여기서 ‘여행’이란 발달장애인 자녀와 엄마(아빠)가 함께 가는 제주행 전세기 계획 ‘효니프로젝트’를 말하고, ‘우리’란 그 프로젝트를 꾸린 아홉 명 엄마들을 말한다. 가끔 이 칼럼 한 귀퉁이에 슬쩍 끼워 넣어 효니프로젝트를 알려왔지만, 여행을 마치고 온 지금에는 아무래도 그 보고를 해야 할 것 같다. 보고 겸 감사 인사인 셈이다.
효니프로젝트의 시작
처음엔 여행 좋아하는 효니네(그러니까 효니프로젝트의 주인공)가 주변 사람들의 눈총이 싫어서 기차나 비행기를 못 타고 작은 차가 닳도록 싸돌아다니는 것을 보고서, 동지이자 언니를 자처하는 여인 몇이 가만있을 수 없다 하여 동행여행을 떠났었다. 이게 일이 커져서 200여 명의 제주행 전세기여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시작은 참 단순했다. 비행기 한 대 전세 내어 딱 효니네 같은 이들로 가득 채워 제주에 다녀오면 어떨까. 전세기로 떠들썩하게 다녀오면서 알리는 거다. 눈치 보기 싫어서, 내 새끼 눈총 받는 거 싫어서 비행기 타고 제주도 한 번 못 간 사연을 말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이 맘 편히 여행할 수 있게 배려받는 문화를 만들어 보자.
말은 이렇게 단순했지만 정말로 전세기라는 건 쉽게 엄두가 나는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냥 욱해서 해본 부질없는 상상 같았다. 그런데 우연한 자리에서 강력한 추동꾼(!)이 나타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서울시장이 “아니 왜 상상만 하세요, 이뤄볼 생각을 해야죠!”라고 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굳이 이루지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 날로 단박에 일을 꾸몄다. (실은 일을 촉발시킨 책임으로, 하다가 막히면 서울시장을 돌파의 카드로 써먹으리라는 야심찬 꼼수가 있었지만, 시장님은 제주행 전세기에서 윤호와 머리를 맞대고 스티커 놀이에 열중하는 자원봉사자 역할을 더 즐거워했더랬다.)
물론 어려움은 도처에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모든 일이 저절로, 신나서 굴러갔다. 마치 효니 프로젝트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우리는 이 일을 한편의 동화처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동화처럼 근사한 이야기들이 도처에서 엮어져갔다.
여행 경비는 자부담과 함께 시민들의 십시일반을 모아서 가자고 했는데, 정말로 그리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기관이나 기업을 찾아다니며 민망한 얼굴로 후원금 모금함을 내밀지 않아도 되었다. 모금을 알리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자유롭게다녀오세요’라는 이름으로 1,200만원을 보내주었을 때 우리는 이 여행이 성공하리라고 예감했다. (물론 후원금 모금이 끝까지 수월하리라고 너무 만만하게 보게 한 부작용이 있었으나...)
흔쾌히 전세기를 내어준 항공사는 발달장애인 가족의 여행 편의를 꼼꼼히 준비해주었고, 김포와 제주의 공항공사에서도, 서울시, 제주도청, 제주장애인복지관, 어촌계, 자치경찰대, 기업, 그리고 숙소와 식당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아름다운 야외극장에서 아름다운 공연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제주의 예술가들이 나섰고, 서툰 여행 계획의 전 과정을 꼼꼼하게 챙겨준 여행기획자도 있었다. 전세기는 이처럼 많은 이의 마음으로 제주에 닿았다.
아름다운 설득이며 운동이었던
우리는 처음엔 동화로 시작했지만 도움이 많을수록 더 엄숙해져갔다. 여행이 다가오면서는 참으로 비장했더랬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이번 여행이 단순한 행사나 휴식여행이 아니라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서, 여행 자체가 일종의 시위이며 부모운동이라고 비장하게 새겼다.
“...우리는 이번에는 시위가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설득할 겁니다. 그러니 잘 해냅시다. 우리의 한걸음 한걸음,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이 땅의 발달장애인, 나아가 모든 장애인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고 잘 해냅시다.”
그런데 전세기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기까지 모든 순간은 그런 비장함을 되새길 겨를도 없이 꿈같이 훌쩍 흘러갔다. 여전히 어떤 아이는 알 수 없는 충동으로 자기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멀리 나가기도 하고, 갑자기 목놓아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를 달래는 어미들의 마음이 서울에서처럼 마구 엉켜들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남들 눈치를 더 봐야했던 게 정작 더 고약한 상황이었으니까. 우리는 남들 눈치가 아니라 제 자식 보듬듯 하는 동료의 눈길 속에서 내 아이를 찬찬히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넘치지 않는 호사 같았다.
제주에 다녀온 건 썩 잘한 일이었어요
우리들이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은 어떤 힘이었을까. 사랑하는 내 아이들을 위해 세상을 설득하려 나선 여행이었으니 그만큼 아름답게 완성시켜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우리 여행을 이끌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2박3일간 함께한 우리들은 모두 이 여행을 잘 해내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마음을 무기로 든 투사였던 게다. 우리는 아쉬운 것, 섭섭한 것은 꾹 눌러 삼키고 서로에게 좋은 얼굴만 보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즐거운 시간을 서로에게 선물하려는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정말로 즐거웠던 순간들만 기억에 남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장한 작정과 별도로, 우리는 우리가 같이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받았다. 내 아이가 겪는 어려운 시간을 같이 겪고 있는 저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걷고, 밥 먹고, 같이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한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우리 아이의 눈 속에도 제주의 반짝이는 바다며 향기로운 바람이, 구름 위로 붕 떠올랐던 전세기 속 우리들의 해방구가 간직되기를 기원했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모두들 이만하면 행복한 여행이었노라고 인사를 건넸다. 눈부시게 하얀 바닷가 리조트의 호사를 누리지 않았어도 모두가 함께했던 순간만으로도 행복했노라고, 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자고 서로 건네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가벼운 상상으로 시작된 전세기 여행 계획은 이렇게 사연 많은 한 편의 동화로 완성되어갔다. 그래서 사흘 치 제주 보고서는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다음은 그 일부다)
# 첫째 날
전세기가 떴습니다. 전세기가 땅을 딛고 오르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중략, 이하 같음) 소란스러움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거, 맘껏 들떠도, 기분이 안 좋아서 맘껏 소리 지르고 몸을 앞뒤로 마구 흔들어도 평온할 수 있다는 거, 그런 기묘한 아름다움을 짐작하시겠어요?
...우리는 첫날 저녁 그 아름다운 공연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서귀포 예술극장, 그곳은 꿈의 장소였어요. 작은 극장인데 태풍에 지붕이 날아갔다는 그곳은, 그래서 사방 네벽만 남았다는 그곳은 하늘이 뚫려있는 아름답고 커다란 상자 같았어요. 그 속에서 제주의 보석같은 분들이 선물해준 음악과 춤과 마임이 우리들을 얼마나 흥겹게 했는지 몰라요. 보랏빛 물빛 조명 속에서 우리는 손뼉치고 펄쩍펄쩍 뛰고 소리 지르면서 속이 후련하게 놀았어요.
...마음의 힘이겠지요. 비행기 타고 하늘을 나는 게 좋아서, 제주가 아름다운 게 좋아서, 이 모든 순간들이 모두 마음으로 이룬 거라서 참 고맙습니다. 전세기로 제주 오는 건 썩 잘한 일이에요.
# 둘째 날
숙소 창문 너머로 안개가 낀 바다가 보였습니다. 또 다른 방 창문 너머로는 멀리 구름 속의 한라산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다 옆에서, 산 옆에서 잠을 잔 것이지요.
...일부러 찾아와주신 솜씨 좋은 숲해설가들이 절물휴양림에서 숲속 놀이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아세요? 절에 물이 있어서 절물이래요. 무심히 툭 던져놓은 이름이 맘에 편합니다. 별나지 않아도 이쁘니 참 좋잖아요. 우리 아이들은 젠 척하지 않는 고운 이름의 아름다운 숲속에서 다람쥐들마냥 들어가 놀았답니다.
오후엔 함덕해수욕장에서 놀았답니다. 한나절 절반은 숲에서, 또 절반은 바다에서 논 것이지요. 휠체어를 번쩍 들어서 내려놓고 발목에 시원하고 푸른 바닷물을 부어줍니다. 민경이가 환하게 웃어요. 온 바닷가가 다 웃었지요. 저 멀리서 해녀들이 물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곧 우리에게 헤엄쳐 오시겠지만 우리는 깜짝 놀라려고 짐짓 모른 체하고 기다렸습니다.
...해녀할망들이 손주들 줄 바닷속 선물을 한보따리 물질을 해서 가져오셨습니다. 물컹한 문어를 만져보는 아이의 짜릿한 표정을 보니, 우리 마음도 뭔가 질기고 탱탱하고 물컹한 무엇에 닿았습니다. 제주에 온 건 아무리 생각해도 썩 잘한 일이에요.
# 셋째 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이 고요했습니다. 짧은 여정이 끝나가고 있었거든요. 우리들은 언제건 다시 제주에 올 수 있겠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맘 편히 비행기를 타고, 배려와 격려를 받으며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순간순간이 가족과 함께 하는 의미있는 시도였고 힘겨운 도전이었던 이런 여행을 다시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요.
...서울행 전세기에 앉았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런 비행기를 열두 번도 더 타본 사람들처럼 느긋했지요. 동그란 창문 밖으로 동그랗고 푸른 제주가 멀어집니다. 뭐라고 작별인사를 건네고 싶은데 한참 궁리하다 놓쳤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설득하려고 전세기를 탔습니다. 거칠고 서툴렀지만 공들여 준비했던 우리의 여행이 끝났습니다. 효니프로젝트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기를 바랐고, 얼마간 그 소망을 이룬 것도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주에 다녀온 건 썩 잘한 일이에요.
*글, 사진= 김종옥 (서울장애인부모연대 동작지회장)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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