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문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장마철에 비가 별로 오지 않을 때부터 슬금슬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난 촉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예감이라기보다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하는 지레 걱정이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일상이 돌아가고 있는 게 기이할 정도로 유난스런 폭염 속에서 겨우겨우 여름을 보내려니까 불길한 징조가 맞아떨어진 게 더욱 기분 나쁘다. 나이 먹을수록 참을성이 없어지는데다가 갱년기를 넘어서 체온조절장치가 고장 났는지, 변온동물이 되어버린 건지 기온 따라 체온도 올라버리니 여름 넘기기가 더욱 힘겹다. 하지만 수십 번도 더 되뇐 위안의 말이 있다. 그래도 94년보다는 낫다는 중얼거림이다.
내게 1994년은 열대야가 34일이나 이어졌다는 기상관측 기록이 아니라, 후텁지근하게 덥혀진 밤거리를 칭얼거리는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면서 지친 유령처럼 걷던 지겹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땅이 식지 않은 채로 다시 새벽이 오고, 그리고 그 위로 다시 해가 내리쪼이는 아침을 맞는 절망—. 그리고 거기에 보태서 하루 종일 귀를 울리던 아이의 악쓰는 소리. 그 해 여름엔 장마철에 비가 오지 않았었다, 올 여름처럼.
옹알이를 건너뛴 채로 입을 앙다물고 돌을 넘긴 아이는 하루 종일 악만 썼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해서 잠들기 전까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뭘 요구하는 것도,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어떤 기분을 표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이의 소리는 어떤 내면의 신호가 아니라 그저 숨을 쉬듯 악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저녁이 되면 아이가 잠시 쉬고 있을 때에도 마치 계속 이어지는 듯 악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어느 때는 아이의 기분을 알 수 있으려나 해서 같이 악을 써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는 흘깃 쳐다보는 듯하다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쭙잖게 흉내 내지 마시오, 하는 듯이. 언감생심, 소통 하려고 들지 마시오, 아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임신 초기 입덧이 심할 때, 세상의 모든 소리가 가시처럼 자극이 되어 괴롭혔다. 온갖 소리들이 고르지 않은 음역대로 들쑥날쑥하게 들려오면서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탓에 귀에 솜을 틀어막고 지냈다. 살다가 소리 입덧은 처음 본다면서 친정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뱃속에서 그렇게 세상의 모든 소리를 거부했던 아이는 태어나서는 악만 써댔다. 날은 덥고, 아이는 밥도 안 먹고 소리만 질렀다. 이러면서 94년 여름을 보냈다. 그래서 94년이란 내겐 화염지옥과 다른 말이 아니다.
바로 그 전 해, 93년 여름만 해도 나는 아이의 눈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친구들에게 전화로 경망스레(!) 외쳤다.
“나는 아기가 아니라 철학자를 낳은 것 같아. 애가 철학자의 눈을 가졌어!”
아이는 어쩌다 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 때 아이의 시선은 나의 동공을 꿰뚫고 내 구불구불한 뇌를 지나서 뒤통수를 넘어 벽을 뚫고 저 먼 곳으로 끝없이 나아갔다. 그 까마득한 깊이의 시선이 신기했다. 다른 어떤 아기의 눈에서도 그런 깊이를 본 적이 없었다. 일 년 뒤에 나는 그 눈길이, 그저 움직이는 배경을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어떤 특별한 존재를 느끼고 감정을 소통하기 위해 눈을 마주치는 게 아니라 그저 무심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듯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알아가면서 무겁게 절망했다.
내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생명체가, 나와 철학적 담론은 어림도 없거니와 일상의 대화마저 어려울 거라는 믿기 싫은 예감 때문에도 94년 여름은 혹독했다. 그러니 올 여름 더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이 글은 해피엔딩이다. 94년 이후로 그만큼 혹독한 여름을 보낸 적은 없다. 단지 올 여름이 더 더웠다면 그것은 앞서도 말했거니와, 내 몸이 늙어 참을성이 없어진 탓이다. 게다가 우리 아들놈은 그 해 이후로 악쓰지 않는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면 지금도 가끔 악을 쓰긴 하지만.)
내 아이가 울고 있었다
희망이란 얼마나 좋은 진통제인가. 94년 이후로 한동안은 그런 좋은 진통제를 가지지 못한 탓에 삶이 자주 엉켰었다. 어떤 못된 악마가 얇은 유리항아리로 된 나의 일상을 매일같이 망치로 깨부수고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문득 어설픈 진통제가 없이도 돌파할 만큼 삶의 고통이 만만해지는 날이 왔다.
아이가 열 한 살쯤 되었을 때였다. 나는 아이에게 자폐장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실은 그 한 해 전에도 아이에게 같은 말을 해 주었었는데 아이는 그 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도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내 말을 흘려버리는 듯 했다. 나는 아직 못 알아들을 소리를 했구나 싶었다. 잠깐 있다가 아이를 다시 보았을 때 아이는 등을 돌린 채로 우두커니 창밖을 보고 앉아 있었다. 다가가 보니 아이는 소리죽여 가만히 울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도 않고, 흐느끼지도 않고, 그저 눈물만 흘리며 울고 있었다. 희망이란 진통제가 필요한 순간이었을까. 나는 아이를 안고서, 너는 차츰 나아질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하고 말했다. 나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 그래서 하나도 안 슬퍼, 그래서 울지도 않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울 필요 없어.......
내 유리같은 일상을 부수는 악마 따윈 허상이었음을 알았다. 있지도 않은 악마 탓을 하든 핑계를 대든, 그건 내 아이의 눈물에 비하면 먼지처럼 무가치한 넋두리였다. 내 일상을 부술 수 있는 건 악마가 아니라 오직 나였는데,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건 내 아이의 눈물을 닦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내 평생을 두고 되뇌일 주문을 떠올렸다.
‘그래, 아들아. 이번 생은 너랑 나랑 이렇게 살다 가자.’
내가 생겨난 대로, 네가 생겨난 대로, 그리고 내 삶과 너의 삶이 엮여가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마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그리 나쁜 선택인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온전하게 다른 한 사람과 서로를 의지하며 한결같이 살아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게 보통 인연인가 말이다.
오랜 세월 나는 나 자신과 불화해왔고, 그것은 아마도 기형도의 시구처럼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 병통을 몽땅 넘어섰다는 건 아니지만, 이젠 때로 그까짓 불화쯤 슬쩍 무시할 수도 하는 내공이 쌓였음을 느낀다. 아이와 엮인 그 인연의 무게가 그대로 내 목숨의 무게가 되어 있으니, 여간 단단한 내공이 아닐게다. 그래서 주문을 또 외운다.
이번 생은,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붙잡고 살다 갈 것이다, 라고.
*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동작지회장)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