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과 생존 사이에서
이웃나라 일본은 전후 이래 최대의 비극에 빠졌다. 일본의 한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살인이 발생해 현재까지 19명이 죽고 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장애인 보호시설의 전 직원이었던 용의자는 해고에 앙심을 품고 ‘장애인을 다 말살할 수 있다’며 얘기하더니, 기어이 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살부터 75살까지의 장애인 입소자들이 차마 도망갈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함과 좌절감을 곱씹는다. 사고의 희생자 여러분들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은 생존의 문제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살아남음 그 방법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어떠한 위협을 받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첫 위협을 느껴봤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덩치가 큰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가 “어디 장애인 주제에 나한테 밑도 끝도 없이 까불어”라면서 내 배를 주먹으로 쳤다. 물론 나는 그 주먹을 감당할 힘도 없었고, 맞설 여력도 없었다. 맞고 씩씩거리며 울고 끝냈다. 꼬마 애들처럼 뒤엉켜 싸우고 싶었는데. 말다툼을 한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고, 꼬마 시절 누구나 그렇게 일상적으로 싸운다고는 하지만, ‘장애인 주제에 까부냐’는 말을 처음 들어본 초등학생인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 친구들과 다른 존재인 것인가. 그 슬픔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후로도, 고등학교를 자퇴하기 직전까지 학창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언어폭력은 계속되었다.
두 번째는 대중교통과 관련한 얘기이다. 20살 이후로 서울에 살게 되면서 지난 5년간 가장 많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지하철인데, 이 공간에서도 약자에 대한 폭력과 생존의 본능이 감각적으로 작용한다. 출퇴근시간 혹은 두 개 이상의 역이 교차하는 환승역 구간에서 경험한다. 종종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벽에 가까스로 몸을 기대곤 한다. 한번은 모퉁이에 몸을 기대어 목발을 짚고 서 있는데 근처에 앉아있던 승객이 다짜고짜 나를 향해 욕을 하며 앉고 싶으면 똑바로 앉고 싶다는 말을 하라고 했다. 괜히 목발 짚은 채로 서성대지 말고 말이다. 간혹 열차 안에 휠체어가 탑승했을 때 이와 비슷한 눈초리를 보내는 승객들의 불만이 보이기도 한다. ‘하필 왜 내 칸에 장애인이 타서.’ 문제는 이러한 시선의 폭력뿐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혐오가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 그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만원전철 안에서 장애인을 의식하기보다 당장 본인의 출퇴근길을 챙기기 위해, 마치 압사를 연상케 하는 사람들의 몸 부딪힘은 러시아워라 그런 거라고 할 만큼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지금도 비교적 사람이 적은 노선에 살고, 출퇴근길에는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복지국가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에서도 말이다. 저상버스나 장애인화장실이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못했다. 인종 갈등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여전히 인종과 관련된 차별은 존재한다. 특히 IS의 출현 이후, 무슬림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이나 아시아 사람을 적대시하고 깔보는 시선은 늘 존재한다. 또 그러한 시선은 종종 과격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이기 전에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나는 몇 번 화풀이 대상 혹은 범죄 대상으로 여겨졌다. 아직도 몇몇의 사람들은 외국인 장애인을 그저 쉬운 범죄의 대상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내심 장애인이어서 모두들 배려해줄 거라고 생각하던 것은 개인적인 낭만일 뿐이었다. 본인의 몸은 언제나 스스로 지키는 것이 옳다.
자주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장애인이 아닌 건장한 남자였다면 이러한 폭력 중 몇 가지는 분명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혹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위협을 준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인륜과 신뢰라는 것을 믿었던 내 생각들이 너무도 연약하고 여유로웠는지를 고민한다. 인권 관련 기관에서 일할 당시 사회에서 여성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인신매매,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저항할 수 없는 우리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고민한다. 사람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왜소한 체격과 불편한 장애가 단지 약자로서의 낙인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의 장애인 보호시설 살인사건을 다시 돌이켜본다. 범죄자가 보기에 장애인이라는 존재는 용의자가 편지에 기술해놓았듯, 휠체어에 평생 속박된 불쌍한 사람들이다. 급기야 중복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으며, 가정과 사회에서 생활할 수 없는 장애인들은 모두 안락사시키는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
이처럼 비장애인이 보내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동정이 결국 오늘날 우리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연중에 대상화된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삶의 중요성과 그 계급이 나눠지고, 최종적으로 정리해도 될 사람의 계층 혹은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어떠한 짐으로서 취급받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과 남성을 성의 계급과 층위 개념으로 나눠 접근하는 운동에 대해 동감하지 못한다. 나의 결혼생활이 마치 동정과 편견으로 둘러싸여 남성성을 상실한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 그러니까 아내와 나의 결혼 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각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편하다. 사회가 장애인을 함부로 재단해서 평가하고 칭찬하는 것은 결국 모두 사회 계층적 다양성으로 인식되어, 오늘과 같은 혐오 범죄의 근원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지는 간단하다. 얼마 전에 작고한 Stella Young의 TED 강연 ‘I’m not your inspiration(나의 장애는 당신의 영감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우리가 얘기해야 할 생존 본질의 문제이다. 즉, 무엇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으며 대상화되지 않는 장애인으로서의 삶 말이다. 왜 나는 누군가 화를 내면서 항상 ‘네가 장애인만 아니었으면…이걸…’와 같은 말과 행동을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나의 장애 때문에 범죄의 대상으로도 인식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장애 때문에 치켜세워지거나 격찬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나는 다른 사람과 살아온 궤적이 다른 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를 풍족하게 만들어갈 다양한 얘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 정도이다. 지금까지 장애인이라서 고민했던 생존의 문제는 우리 다음 세대에 있어서 모두가 통감하는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일 년간 매달 푸르메재단에 글을 기고하며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많이 경험했다. 무엇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었던 내게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해주어 내가 남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제 이 기회를 나누고자 한다. 다음 달부터는 또 다른 기고자 분이 나와는 다른 얘기를 전해줄 예정이라고 한다. 그것이 나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일이며, 독자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달 초마다 항상 내 글을 찾아주시는 나의 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한 달간의 휴식을 하고 그 다음 달 칼럼에 다시 찾아뵙기를 기약하며…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고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