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전 상서
눈을 떠요
오늘의 부모님을 기억하기 위해 쓰게 된 이번 칼럼은 다름 아닌 사소한 방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1년 전 MBC 예능 ‘느낌표’에서 방영한 장기기증 프로그램에 출현해 각막을 이식받은 박진숙 여사님과 그의 아들 원종건 씨의 삶이 11년이 지나 ‘시사매거진 2580’에서 다시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시청각장애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그녀는 병약하게 낳은 딸을 치료할 돈이 없어 다른 나라로 입양 보내야만 했다. 1년 뒤 남편이 사망하고 홀로 폐지를 주워가며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았다. ‘느낌표’를 통해 각막이식을 받고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자 초등학생 아들은 눈을 뜬 어머니를 보며 수없이 울었었다. 그녀가 아들의 얼굴을 처음 바라보며 했던 말은 다름 아닌 “우리도 더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자”였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병원 1층 원무과로 향해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본인도 보답하고 싶어서였다. 방송 후 도움을 주겠다는 요청이 쏟아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두 모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11년이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11년 전의 언덕길 어느 허름한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한쪽 눈에 의지해 폐지를 줍는 일도 여전히 하고 있었다. 다만 눈을 뜨고 나서 달라진 점은 더 이상 낮이 아닌 밤에 폐지를 줍게 된 것이다. 낮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폐지를 주워야 하기 때문에 그 분들이 주무시는 밤에 줍는 일을 한다고 했다. 여전히 청각장애가 있어 다가오는 차량 소리를 듣지 못해 뺑소니 사고도 당했었다고 한다. 뺑소니를 당하고 병원에 가며 들었던 생각은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저렇게 가야만 했을까’였다. 사고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을 길거리에 버려두고 도망간 운전자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온종일 주운 폐지 수십 킬로그램의 보상은 하루 평균 800원에서 3,000원 정도이다. 그 돈을 모으고 모아 아들과 자신의 이름으로 월 3만 원씩 기부한지도 십 년이 돼간다고.
어머니가 눈을 뜨자 눈물 콧물 흘리며 엉엉 울던 아들은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다. 최근 일자리를 구하고 어머니를 챙겨드리지 못해 마음이 불편하다는 아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효도해라, 공부해라, 돈 많이 벌라고 하지 않을 테니, 어미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올바르게 살아라”고 가르친다. 비록 들리지 않고 앞도 잘 보이지 않지만, 아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아들도 엄마도, 그 자리 그대로에서 11년째 살아가고 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고마운 눈을 갖고 난 뒤, 한시도 가만히 있기 아까워 책을 읽고, 헌혈을 하고, 수제비누를 만들고, 폐지를 주우며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교과서에 나올 것만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다시 듣고 있으니, 십수 년 전 ‘느낌표’를 봤던 기억도 나고, 이들이 지난 십여 년간 살아온 헌신적인 삶에 대해 마음이 뜨거워진다. 무엇보다도 몇 푼 쥔 것 없는 학생이지만, 내 노트북으로나마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수 있는 나를 보며, 내가 쥐고 있는 것과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나눔의 책임감이 제일 크게 다가와 숙연해진다. 또 장애인 당사자이자 어머니로서, 쉽지만은 않았던 인생의 나날을 아들과 함께 해온 삶에 대한 존경심이 내 몸과 마음을 울렸다.
어머니와 고등어
산울림의 노래 ‘어머니와 고등어’를 듣고 있었던 어느 밤이다. 그 무렵 어머니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날도 추운데 여자친구와 맛있는 것 사먹어라.” 어머니는 그 후 오만 원을 보내주셨다. 기어코 십만 원 보내주신다는 것을 깎고 깎아 오만 원만 받았다. 사실 맛있는 외식 한 끼 하는데 오만 원이면 족하다. 십만 원은 두 끼, 세 끼다. 아무튼 몇 끼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돈을 보내주시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들어 어머니로부터 용돈을 받기 시작했는데 벌써 네 번째는 되는 듯하다. 가연이 대학 졸업할 때, 네덜란드 여행을 떠났을 때, 또 기억이 나지 않는 한 번, 그리고 지난 연말이다.
올해 어머니가 용돈을 주시기 시작했다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 어머니가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과 결이 같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본인의 돈으로 나의 용돈을 챙겨주신다. 나는 사실 아버지로부터 매달 생활비의 일부를 받고 있다. 서울에서는 부족하지만 한적한 프랑스 시골에서는 꽤 넉넉한 금액이다. 이전까지 집안의 수입을 담당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용돈을 챙겨주시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가끔 용돈을 받기 시작한 지 4개월쯤 되었으니, 어머니가 일을 시작하신 지도 4개월쯤 되었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주 6일에서 7일을 일하시며 한 달 중 3일의 휴가를 받는다. 30일 중 25일 이상을 근무하신다. 근무 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식사시간을 포함해 12시간. 출근을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신다. 주된 업무는 감자탕집에서 서빙을 돕는 것이다.
내일 새벽잠에서 깨신 어머니가 이 글을 보고 싫어하실지 모른다. 뭐 남한테 보일만한 일이냐며 말이다. 청개구리 같은 자식 맘으로는 반대로 숨길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다.
어머니는 ‘지방시’였다. 지방대의 시간강사였다는 요새 줄임말이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난 뒤 글을 쓰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었으나 그 일은 오래 하지 못했다. 장애인 아들의 양육과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학자가 되겠다고 10년간 공부한 사람은 결국 학자로 남지 못했고 집에 머물렀다. 그렇게 십몇 년이 지났고 올해 들어 지방시 시절 이후 첫 월급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그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제대로 걷지 못해 서빙도 할 수 없는 나는 감이 오질 않는다. 어머니는 함께 일하는 식당 아주머니들도 좋으시고 운동도 되니 괜찮다며 당분간은 계속 일하겠다고 하신다. 나는 언제든지 그만두셔도 좋다고 몇 개월째 말씀드리고 있다.
잠들기 전 어둠 때문인지, 내일도 고된 출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한 해가 또 지나서인지, 어머니는 대뜸 ‘엄마가 잘못했다’는 문자를 카카오톡에 남기시고는 잠이 드셨다. 아마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꿈을 끝까지 이루지 못한 모든 과거의 지방시들이 다 그런 마음을 자녀들에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엄마 지방시들은 더욱 말이다.
그러니 나는 어머니가 나이 드신 몸을 무리해서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일하시는 것을 도저히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다 커보니 그 십몇 년간의 공허함을 얼추 알 것 같아서 말이다. 며칠 전 보내주신 오만 원으로는 여자친구와 KFC 치킨을 먹고 남은 돈으로 책상 스탠드를 주문했다.
아빠의 청춘
가수 오기택이 부른 ‘아빠의 청춘’은 젊은 시절 우리 아빠의 18번곡이었다. 대학시절 그 노래를 즐겨 부른지도 어느덧 30년째. 오늘 아빠의 인사이동 소식을 들었다. 아빠가 승진하셨다. 그러나 하던 일이 달라지거나 직급이 달라지는 것의 차이는 없었다. 그러니 딱히 가족에게 본인이 승진했다고 말씀해주지 않았다. 안부 겸 여쭤볼 것이 있어 우연히 연락드렸던 차, 통화 말미에 덤덤히 승진하셨다는 소식을 말씀하셔서야 알게 되었다. 승진이 엄청난 인센티브로 다가올 만큼의 대단한 소식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기뻤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는 내내 배우 성동일의 극중 역할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은행원으로 재직하며 특히 감사부에서 일을 하던 만년 과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가 현재 맡으신 일과 업종, 부서도 정확히 일치하고, 심지어 정년을 앞둔 나이대도 비슷하다 보니, 마치 아빠를 보는 것만 같았다.
사실 이 시간에도 페이스북에는 인터넷 금융체계의 유입, 핀테크 스타트업 소식 등 쉴 새 없이 기존 금융계를 위협하는 뉴스가 들려오지만, 아빠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정년을 고작 2년 앞둔 분의 허망함이라면 허망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남은 2년간의 정년을 버티기 위한 집착이라면 집착이기에, 그런 소식에 반응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신기술에 대한 그의 냉소적인 태도가 본인 직업에 대한 집착으로도, 또 초월로도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빠는 지방은행에 재직 중이다. 구직 당시, 대한항공과 제주은행간의 최종면접일이 겹치는 날에 아빠는 제주은행으로 향했고, 그 길로 제주은행을 다니기 시작한지 이십 수년이 지나 오늘까지 온 것이다. 참 평탄치 않았다. 금융권의 존폐를 야기하는 위기론은 지금도 늘 제기되지만, 그때도 그랬다. 중앙은행 규모에 밀리는 지방은행이라서 위기였고, 전자계산기가 도입되어 위기였고, ATM등의 무인 수납체계가 도입되어 위기였다. IMF라서 위기였고, 내수경기침체여서 위기였고, 부동산 때문에 위기였듯, 금융권의 별별 위기는 월드컵 주기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나라 안팎으로 무슨 소식이 들리면 항상 금융권이 위기라는 의혹은 선두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의혹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끔찍한 구조조정을 낳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실제로 극중 성동일이 명예퇴직을 당하고, 지방은행이 중앙은행의 계열사로 인수합병당하는 등의 풍파를 모두 지켜본 목격자였다. 1980년대에 미래에는 주판이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론과 2016년까지 2월의 핀테크가 은행체계를 뒤흔들 것이라는 뉴스를 들을 만큼 온 것이다.
앞으로 딱 2년이 남았다. 주판알을 굴리는 것으로 시작한 은행 업무가 코딩으로 넘어오기까지를 목도한 생존자에게, 2년 뒤 퇴임식에서 박수를 치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러니 오늘 아침 아빠 이름 앞으로 호명된, 본인 딴에는 큰 의미 없다는 사령장이, 적어도 당장 명예퇴직 당하지 않겠다는 보증서 같은 것으로 남아 기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사령장에 ‘명) ~계급에 급함. 2016년 1월 21일’으로 딱 한 줄 적힌 것이 공로패 하나 없이 쫓겨나던 성동일의 1994년 명예퇴직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 부모님들, 참 고생 많으셨다. 형용할 수 없는 부모님의 무게를 글로 남기는 것조차, 위로하는 것조차, 무엇이든 부족한 것만 같아 죄송할 뿐이다.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