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문화가 아니라 자본
런던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에 귀국한지 3일째입니다. 지난 3일 내내 자고 또 자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페르피냥의 한국 친구들과 함께 뒤늦은 생일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나름 긴 바캉스를 마치고 페르피냥으로 돌아오니, 그렇게도 지루하기 짝이 없던 이 도시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여유로워 보이는지 모릅니다.
오늘 글은 다소 억지를 부려볼까 합니다. 파리 신드롬에 버금가는 런던 신드롬을 겪은 지난 바캉스에서 과연 우리의 착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진단해보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영국의 역사를 아는 분이라면, 중세시대가 넘어갈 때까지 영국의 왕족 및 귀족들은 영어를 구사하지 않고, 프랑스어를 구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윈저궁뿐만 아니라 영국의 중세 유적에 적힌 현판에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가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부터 시작해 기사도 정신의 영국 시민, 젠틀한 영국의 시민성 등 수많은 얘기가 파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나라 국민의 성질은 대체로 젠틀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시작된 말인지 잘 모르겠으나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습니다. 고작 3박 4일간 런던 일부 구역밖에 여행해보지 못한 제가 다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제 나름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국가와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문화(Civilization)의 다양성’보다 ‘자본주의(Capitalism)의 심화성’입니다. 이것은 런던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주 과격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서울과 런던의 이미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그 나라의 문화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가 된 것이고, 공통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구조가 심화됐다는 것입니다.
런던은 세계 금융 중심지의 하나입니다. 동시에 세계의 문화 양상을 좌우하고 있는 글로벌 도시 중 하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두 도시를 꼽으라 하면, 아마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과 유럽을 대표하는 런던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세계의 부자들은 오늘날 어떻게 해서든 런던에 자기 땅을 가지려 안달입니다. 서울의 1.5배 크기 정도의 런던이 영국 전체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런던은 전 세계의 돈이 돌고 도는 주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런던 여행을 계획하던 우리 커플에게 있어서도 런던은 마찬가지 이미지였습니다. 고풍스럽고 젠틀하고 힙하고(편집자주 : 세련되고 현대적이라는 은어) 시끌벅적한 도시지만, 정돈되고 고급스러운 내셔널갤러리·대영박물관·사치갤러리 등 수많은 무료 전시공간으로의 접근이 가능한 곳. 아름다운 템즈강의 야경 등 모든 것이 황홀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축복 받았다는 부러움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런던은 달랐습니다. 지독한 런던 신드롬을 겪을 만큼 말입니다. 그곳에는 젠틀함도, 포용과 개방도 없었습니다. 런던의 잘못은 아닙니다. 단지, 영국이라는 국가 이미지에 도취되었던 우리의 판단착오였으며, 자본의 잠식이 얼마나 강한지 미처 몰랐던 우리의 무지였습니다.
대영제국의 제국주의는 끝난지 오래고, 모두가 평등하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런던 중심지를 벗어나 아무 맥도날드라도 가보세요. 종업원의 80% 이상이 인도인과 흑인이고, 간간히 우락부락한 백인 남성이 슈퍼바이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예를 수입하던 시대는 끝났다 해도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값싼 노동력을 이민자들로부터 착취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정당한 최저임금을 지키고 내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불평등을 심화시킵니다. 런던이야말로 정말 노는 사람 따로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도시입니다.
런던 사람들은 젠틀하다고요? 소호, 옥스퍼드, 갤러리 인근을 벗어나 외곽으로 가보세요. 낯선 시선을 받기 일쑤이고, ‘니하오’ 같은 조롱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쫓아오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지하철역 혹은 길가의 노숙자들은 씻지도 못한 채 수많은 차들이 오고가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장발의 머리를 어찌할 줄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마치 대역죄를 지은 것처럼 구걸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길거리에서 겨우 잠드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여정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비교해 너무도 열악한 장애 접근 환경과 그 인식 때문에 차별당하기도 일쑤였고, 위협을 느껴 도망친 후로 긴장이 풀렸는지 여자친구와 길바닥에 나앉아 울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저희는 이러한 그들의 폭력적 행동이 영국인의 문화라고 보기보다 오늘날 영국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인 것이라고 판단하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의 젠틀함과 그 다양성을 말하기 전에, 어느 나라는 이렇고 저렇다고 말하기 전에, 오늘날 문화는 거대 자본에 잠식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교육의 수준이 불평등하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만 하고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관계는 전 세계에 걸친 문제입니다. 큰 껍데기들, 그러니까 건물과 음식의 양식을 제외하고는 개별적·민족적 삶의 다양성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 획일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생활 물가가 비싸 경쟁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인 런던에서만큼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주 슬픈 사실입니다. 문화로 구별되는 집단의 독자성은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환상과도 같습니다. 결국 대도시를 여행하던 중 신드롬이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서 지적했던 자본주의 구조의 심화는 런던에서 특히 두드러진 양상을 보인 것이지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를린과 런던을 오가며 작업하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볼프강 틸먼에 대해 소개해주신 사진작가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베를린과 런던을 비롯한 전 세계 어디를 오가며 사진을 찍는다 한들, 단지 그의 사진작품만을 보아서는 그것이 베를린인지, 런던인지, 제3의 도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런던이나 베를린의 상징을 단지 관념화하지 않고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하나의 작은 커뮤니티를 촬영합니다. 그러니 이 사진이 영국에서 찍힌 것인지, 독일에서 찍힌 것인지는 사진작가에게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국가를, 도시를 분자 단위로 쪼개고 쪼개어 결국 그 안에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은 사진입니다. 단지 ‘런던아이’를 찍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듯이 말입니다.
이번 런던을 여행한 우리의 시선은 이와 같은 맥락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자 단위의, 지역 단위의, 공동체 단위의 삶과 그 특징을 보려하지 않고 거대 국가 간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즉 프랑스·네덜란드·영국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허술하고 거시적인 관점으로만 판단하려 했기에 더욱 실망이 크고 많은 것을 놓쳤을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심화된 도시일수록 국가·문화별 고유성은 찾을 수 없고, 전체적 맥락에서 단지 ‘도시 문화’ 정도로 설명될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것은 그러한 체제 속에 피어있는 소규모 집단들 간의 하위문화입니다.
런던 옥스퍼드 브릿지 100 Club에서 공연 평론가와 히피 여성을 만나 밤새 놀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런던에서 본 공연은 잊지 못할 만큼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런던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여 밤새 춤을 추고, 술을 나눠 마시고, 좋아하는 가수의 사인을 받으려고 그 작은 소극장 안에서 비비적거리는 모습들 모두 말입니다. 단지 하위문화로서의 공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국가 간 비교를 벗어나 가장 작은 집합체 안으로 들어가 관찰할 때 각자 꿈꾸던 이미지를 포착해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사례를 단지 공연을 가라, 인디펜던트 갤러리를 가라라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쉘이라는 홍콩 친구는 서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여행을 온 적이 있습니다. 도무지 현지 친구가 없으면 아무 것도 놀 수도 즐길 수도 없는 곳이 서울이라서 정말 유쾌하지 못한 기억만을 가진 채로 여행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서울은 다릅니다. 이문동 어느 술집, 상수동 어느 밥집, 합정동 어느 카페 등 초라한 100평 내외의 공간에서의 기억들이 모이고 모여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생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일종의 ‘도시 리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전 세계 어느 곳, 특히 자본주의 체제가 심화된 대도시를 갈수록 도시의 리듬이 복잡합니다. 이 리듬을 온전히 해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은 암스테르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 Electronic Dance Music)을 좋아하는 사람이 상상하는 암스테르담과 실제 암스테르담은 사뭇 다릅니다. 그냥 다 똑같아 보이는 좁은 집들 투성이에 수로(Canal)만 잔뜩 있고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이나 런던이나 이 모든 대도시들은 도시의 리듬이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해당 도시에 애착이 생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 시간은 도시의 리듬을 온전히 해석하기까지의 시간을 뜻합니다. 그러니 앞서 제 글만 읽고 런던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런던에 놀러가되 런던을 보려 하지 말고, 그 파편들을 보고 돌아간 후에 런던이 아닌 곳에서 런던을 정의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첫째, 런던이라는 도시가 장애인의 이동을 크게 고려하지 못한 환경이어서 자가용과 동행자 등이 없다면 접근성을 보장받지 못할 확률이 다분합니다. 둘째, 어쨌든 인종차별은 존재합니다. 그것이 경쟁사회에서 파생된 심리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백인, 흑인, 아랍인, 인도인, 황인 이 모든 인종들 사이의 이미지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라는 씩씩한 마음으로는 인종차별의 수난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인정한 사람들 간의 토의가 이뤄질 때 극복되어지는 것입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여행을 기다리는 여러분들께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