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처럼 순간을 예술로 피워내다

[열정무대] 이민희 작가


 


“저의 작업은 하나의 놀이와도 같아요. 그 놀이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워요.”


희뿌연 배경에 작은 불빛이 음표처럼 찍혀 있는 사진, 물구나무를 선 아이를 형상화한 도자기, 연꽃을 밟고 있는 그림 등 모든 것이 놀이의 결과물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매일같이 놀이를 즐긴다고 말하는 이민희 작가. 사진, 도예, 영상, 드로잉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민희 작가를 만났습니다.


▲ 잠실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로 다매체 예술을 펼쳐내는 이민희 작가
▲ 잠실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로 다매체 예술을 펼쳐내는 이민희 작가

경계를 넘는 다매체 예술가


이민희 작가는 국내 유일의 장애예술인 전용 창작공간인 잠실창작스튜디오의 6기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손님이 온다기에 작품들도 정리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화사한 옷을 챙겨 입었다고 귀띔합니다. 작품들이 책상이며 벽면 곳곳에 있어 ‘아티스트의 방’에 들어선 설렘에 압도당합니다.


뇌병변장애로 몸이 불편한 이민희 작가는 다매체 예술장르에 대한 관심으로 20회가 넘는 그룹 전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종이 한 장을 빽빽이 채우는 경력으로 ‘프로 작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데도 스스로를 ‘실습생’으로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작업한 시간이 짧은 편에 속한다며 아직은 작가라는 호칭이 먼 얘기처럼 들린다면서요.


▲ <비에 흐르는 音>, 디지털 카메라 & 프린트, 280 x 210cm, 2012년작
▲ <비에 흐르는 音>, 디지털 카메라 & 프린트, 280 x 210cm, 2012년작

사진, 도예, 영상, 드로잉에 무용까지. 하나가 아닌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들과의 교류로 새로운 미술 도구를 접해보게 되면서 관심의 폭이 넓어졌어요. 지금은 각 도구에 맞게 제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보는 단계에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계속해서 실험을 시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 <연꽃>. 한국화 물감과 파스텔로 채색하고 목탄으로 머리카락의 느낌을 살린 작품. 그림 속의 인물과 작가가 빼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 <연꽃>. 한국화 물감과 파스텔로 채색하고 목탄으로 머리카락의 느낌을 살린 작품. 그림 속의 인물과 작가가 빼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어릴 적 꿈은 화가였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탓에 미술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대신 미대 출신 친척들 덕분에 자연스레 미술의 영향권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 뜨면 옆에 도자기가 구워져 있고 고개를 돌리면 수채화 그림이 있었어요.” 독학으로 꿈을 키워 간 이민희 작가는 데생이며 유화 등 소위 미술의 정석을 따르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정석에서 비껴났기에 이민희 작가의 캔버스는 무한대로 넓고 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과 메모로 시적인 언어를 그리다


 


벽면을 채우고 있는 사진 작품들에 눈길이 머뭅니다. 여행을 하거나 산책을 할 때, 이모네 가는 길에, 때론 작업실에서 카메라로 매순간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일상과도 같기 때문에 멈출 수 없는 일.


▲ 매일같이 음악을 들으며 떠오른 느낌을 노트에 담고 있다.
▲ 매일같이 음악을 들으며 떠오른 느낌을 노트에 담고 있다.

사진의 인상적인 제목들은 음악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클래식과 국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느낌을 날마다 끄적입니다. “컴퓨터로 메모해도 제 손보다 음악이 빠르니까 오타가 많아요.”라고 웃습니다. 그런 매일의 감상을 기록한 노트들만 여러 권. 사진과 잘 어울리는 단 하나의 제목을 찾기 위해 수없이 붙였다 뗐다를 반복한답니다. 놀이와도 같이 자기만의 방식대로 즐기다보니 여기에 반응하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고 합니다.


 


우연이 이어준 무수한 기회... 전시회로 맘껏 펼쳐


워낙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해서 그런지 뜻하지 않은 기회들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2002년 예술문화스터디 ‘예술만감’에서 예술 철학을 공부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지도 교수님을 만나 영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에이블아트센터 출신 장애를 가진 동료 작가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매체로 실험적인 작업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대안영상예술학교 과정 수료 전시회인 <내 속의 봄을 찾아서>의 총괄기획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과정에 함께한 작가들과 모이기로 한 자리에 아무도 오지 않자 총괄기획자로 자동으로 지목당했던 것. 갑자기 맡게 된 일이었지만 끊임없이 고민한 끝에 기획의도대로 전시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해요. 재밌기도 하고 좋은 인연도 생기니 고마운 마음이 들거든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즐겁게 마주하는 이민희 작가. 그의 작업이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유입니다.


작업을 통해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가다


이민희 작가의 작품에는 날개 달린 기린이 자주 등장합니다. “꿈에서 기린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었죠. 몇 달 뒤에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예쁜 기린을 발견했어요. 삼국유사 문헌에 따르면 전설 상의 동물로 기린을 ‘각단’이라고 불렀대요. 계속해서 작업하고 싶더라고요.” 한국화 물감으로 채색된 도예 작품들은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갑니다. 깊은 땅 속에서 출토된 오래된 과거의 유물 같습니다.


▲ 물구나무서는 어린꼭두, 여인, 기린을 동영토와 색화장토로 형상화한 도예 작품.
▲ 물구나무서는 어린꼭두, 여인, 기린을 동영토와 색화장토로 형상화한 도예 작품.

2008년작 애니메이션 <반짝반짝 빛나는>을 보면 캐릭터와 소리가 자아내는 환상적이고 독특한 느낌이 인상적입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내용은 밝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표현한 자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가와 함께 각자 느끼는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두드리거나 사탕껍질을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입혔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한 방송사에서 방영되었습니다.


▲ <반짝반짝 빛나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자신의 고통을 날개 달린 기린을 등장시켜 몽환적인 분위기로 표현했다.
▲ <반짝반짝 빛나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자신의 고통을 날개 달린 기린을 등장시켜 몽환적인 분위기로 표현했다.

이민희 작가는 작업노트에 ‘내 마음의 빈자리가 작업과정 중에 채워지는, 치유된 느낌을 받곤 한다.’라고 썼습니다. “몸을 빼면 비어 있는 것과 같아요. 빈자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비어 있는 자리에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으로 채우죠. 작업을 하면서 빈자리를 채우기도 하고 비워내기도 하는 경험을 통해 사람들과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오래 걸리더라도 다음 계획을 향해


개인 작업실에서 숨을 고르며 그 다음을 준비하는 이민희 작가. 최근에는 뇌성마비 작가회 아티스트 그룹 ‘날’에서 주최한 <프레시>에 사진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12월 2일에서 8일까지 한전아트센터 기획전시실에서 2014 선사랑드로잉회 융합예술 교육프로그램 <수필화> 전시회도 합니다. 수필 수업에 참여한 작가들이 글과 이미지를 선보이는 자리에 이민희 작가가 직접 쓴 글과 새로운 사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도예 작품으로 아트상품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합니다.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에서 도예 작품의 인기를 실감한 이민희 작가는 “열쇠고리처럼 작은 크기의 소품을 만들고 싶어요. 몸도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겠지만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해나가야죠.”라고 밝힙니다.


▲ 이민희 작가가 작품에 둘러싸인 작업실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 이민희 작가가 작품에 둘러싸인 작업실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게 끝이 아닙니다. 내년에는 잠실창작스튜디오에 재입주하는 것이 우선 목표라고 합니다. 사진 공부를 더하고 포트폴리오 작업도 마칠 예정입니다. 고향 평택에 작은 공간을 얻어 전시회를 열고 해외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꿈은 진행 중입니다. 아직 한번도 개인전을 안 해봤다는 작가. “작품들이 조금 더 쌓이면 언젠가 개인전을 열고 싶어요.” 이민희 작가의 이름을 단 전시회 초대장을 손에 받아들 날을 떠올려 봅니다.


*글, 사진=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작품 사진= 이민희 작가 제공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