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근대역사 벨트 스탬프 투어

[경계없는 탐방]


 


군산에 같이 가자했던 친구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친구가 다른 일정 때문에 당분간 여행갈 시간이 없다고 해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 장항선 대천역을 지나면서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친구의 고향은 군산 옆 동네 서천이었다. “나 지금 군산 가는 무궁화호 타고 대천역 지나가고 있어.” 바로 답장이 왔다. “오~ 좋네! 군산, 부럽네. 날씨도 좋고.” 친구의 부러움과 지난 날의 추억을 기차에 싣고 레일 위를 달렸다.


▲ 갯벌이 드러난 군산 바다에 정박해 있는 배들의 모습
▲ 갯벌이 드러난 군산 바다에 정박해 있는 배들의 모습

15년 전쯤에 군산에 여행을 갔었다. 군산역은 작은 간이역이었고 여객선 터미널도 근처에 있었다. 당시에는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도와 역 근처 벼룩시장을 둘러보는 가을여행을 했었다. 군산역에서 내려 선유도로 가는 배안에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해 했던지 지금도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번 군산 여행은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의 추억과 15년 전 나의 추억을 찾기 위해 떠났다.  혼자서 떠난 여행은 쓸쓸했지만 기억 속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지금 군산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열차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세월이 갈수록 추억을 왜 자꾸 반추하게 되는지, 추억의 장소와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진다.


군산에 도착하니 역사는 현대식 건물에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역사는 편리해지고 새로워졌지만 작고 소박했던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진포해양공원으로 이동했다. 택시에서 본 군산의 풍경은 변함이 없어 보였고 휠체어 사용 후 군산에 꼭 다시 오고 싶었던 바람은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진포해양공원에 도착해 갯벌이 드러난 바다를 향해 인증 샷을 날렸다. 다리를 건너 바다 가까이에 가려했지만 물 빠진 갯벌엔 ‘뜬다리’만 내려 앉아있다.


▲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품고 있는 군산의 뜬다리
▲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품고 있는 군산의 뜬다리

군산 내항에 있는 뜬다리는 밀물 때 다리가 수면만큼 뜨고 썰물 때는 내려가도록 자동으로 조절되는 선박의 접안 시설이다.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3천 톤급 배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4개의 다리로 이용되었다. 하루 150량의 화물차들이 호남평야의 쌀들을 일본으로 수탈해 간 가슴 아픈 역사의 산 증거물이다.


내항에 자리한 진포해양공원에는 해군상륙함인 위봉함이 해양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위봉함은 근대역사 벨트의 8코스다.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하얀 제복을 입은 해군이 떡 하니 버티고 있어 깜짝 놀랐다. 밖은 밝고 안은 조금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복을 입은 마네킹을 사람으로 착각했다. 사람은 어떤 복장을 하느냐에 따라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 전투기와 군함으로 꾸민 진포해양공원에 위치한 장애인 화장실
▲ 전투기와 군함으로 꾸민 진포해양공원에 위치한 장애인 화장실

잘생긴 해군 마네킹과 악수를 하고 전시실 내부로 들어섰다. 전시관은 한반도 해군의 진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조선 최초 화약제조 과정에서부터 영화 ‘명량’으로 더욱 관심을 끄는 이순신의 명량해전까지 알기 쉽게 나열돼 있었다. 광복 이후 해군의 변천사를 한눈에 들어올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역사문화 벨트는 근거리에 있어 휠체어로 이동하기가 편리하다. 전시실을 둘러본 후 장미갤러리로 갔다. 장미갤러리는 일제 강점기 때 용도와 기능을 알 수 없는 건물을 해방 이후 위락시설로 사용해왔다. 작년에 보수와 복원을 거쳐 체험학습장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갤러리 안에는 공방도 있어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다양하고 예쁜 물건을 만들어 전시와 판매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공방에서 만들어진 약낭주머니는 전시실 한 켠에 단아한 모습으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여러 소품을 담는 데 제격인 약낭주머니
▲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여러 소품을 담는 데 제격인 약낭주머니

작은 주머니 속에 들어갈 약초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예전엔 약낭주머니에 약초뿐만 아니라 작고 아담한 물건을 넣고 다니지 않았을까. 고운 천에 고운 수를 놓고 매듭으로 묶어 고쟁이 주머니 속에 넣고 그 위를 옷핀으로 고정해서 꼭꼭 숨겨 놓던 외할머니의 약낭주머니가 생각났다. 그 안에는 사탕은 물론이고 동전, 은가락지, 옥비녀까지 다 있었다.


할머니의 약낭주머니는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만 외우면 무엇이든 나오는 요술램프 같았다. 한번은 궁금해서 치마 속에 있던 약낭주머니를 꺼내려다 할머니에게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 치마 속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뚝딱 하고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같았다. 장미갤러리 공방 문짝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약낭주머니에서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끝도 없이 나올 것만 같았다.


▲ 아담하고 예쁜 모습과는 달리 휠체어 사용자는 접근할 수 없는 미즈카페
▲ 아담하고 예쁜 모습과는 달리 휠체어 사용자는 접근할 수 없는 미즈카페

 


장미갤러리 바로 앞에는 미즈카페가 있다. 미즈카페는 옛 미즈상사 건물로 한때 일본인 무역회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지금은 커피숍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건물 입구에 턱이 있어 휠체어 여행자는 접근할 수 없다.


모두를 받아주지 못하는 건축물은 아름답지는 못하다. 모든 사람을 품어주고 받아줘야 진정 아름다운 건축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진정한 휴먼건축물은 겉과 안에서 온기가 느껴지고 인간애로 가득하다. 미즈카페는 작고 예쁘지만 아름답지 못한 건축물이다. 북카페를 겸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분명 별로일 것이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처럼 휠체어 접근이 안 되는 곳은 분명 맛도 없고 분위기도 별로일 거라고 중얼댔다.


미즈카페 앞에 있는 빨간 등대에서 3코스에 해당하는 스탬프를 찍고 장미공연장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미즈카페와 장미갤러리 그리고 장미공연장까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어 스탬프 찍기란 식은 죽 먹기처럼 수월하다. 골목 안은 아기자기한 조각과 주사위 의자가 있어 여행자에게 쉼을 제공한다. 골목풍경도 우리네와 다르다. 일본 어디쯤 한가로운 골목길을 걷는 것처럼 주변 건물은 온통 일본식 건축물이고 분위기도 이색적이다. 골목을 사이에 둔 4곳 모두 쾅쾅쾅 인증 스탬프를 찍고 군산근대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 골목 곳곳에는 주사위 의자 등으로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 골목 곳곳에는 주사위 의자 등으로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군산근대미술관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었다. 제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이다. 숫자 18은 은행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군산지점은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으로 1907년에 설립됐다. 2008년 이후 보수와 복원을 통해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은행 별관 건물과 숙직동 건물은 각각 안중근 기념관과 근대건축자재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미술관 입구에서 스탬프를 찍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술관 안에는 한지화가 문복철 유작전 ‘삶의 춤 삶의 소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건물역사 전시실부터 봤다. 전시실에는 은행으로 사용됐던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있게 은행 지점장실도 있다. 지점장실 밖에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하면서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의 조선인들은 훗카이도 나카가와의 한국인 토목노동자 강제 징용자들이다. 상처투성이에다가 제대로 먹지도 치료도 받지 못해 아사 직전인 몸으로 사진을 찍었다. 너무 말라 갈비뼈가 다 드러나 있어 보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게다가 중국 운남성, 텅충현, 미얀마 국경 일대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조선인 시체를 바라보는 중국 군인들의 표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악마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또 한 장의 사진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소년산업전사로 일본에 강제징용 노동자로 보내진 한국인 소년들이다. 사진 속의 소년들은 영혼 없는 혼령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나이에 가족과 강제로 떨어져 이국만리 낯선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었으니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이 얼마나 한스럽고 고통스러웠을까.


▲ 강제 징용된 한국인 토목 노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강제 징용된 한국인 토목 노동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는 6백만 명을 학살했고 일본군은 2백만 명을 학살했다. 1939년 극비 지령문서에 히틀러가 서명하면서 T-4 프로그램은 시작됐다.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 허가 명령서였다. 장애인 살해 프로그램으로 히틀러가 극악하기 짝이 없는 악마란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장애인 등을 제거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 버전의 우생학)을 나치즘의 기본으로 삼았다.


나치정권은 “살 가치가 없는 밥벌레들(useless eater)”을 죽이는 것은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했다. “병자나 기형아를 전멸시키는 것이야 말로 병적인 인간을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나치 독일이 1933~1945년 패망 때까지 국가경제에 부담이 된다며 살해한 장애인의 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나치에 뒤질세라 일본군은 2백만 명을 학살했다. 나치와 엎치락 뒤치락 누가 더 악랄한 짓을 많이 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강제로 징용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군대 위안부로 끌고가 성적 학대를 일삼는 인간 말종의 짓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의 자원은 모조리 항구나 열차를 통해 가져가고 심지어 수저까지 빼앗아 전쟁무기로 다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고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자신들이 한 짓을 공공연하게 자랑거리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진정성 없는 사과는 현존하는 역사의 증인인 위안부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꽂고 있다. 언제쯤이면 진심어린 사과로 그들의 행동을 반성할까.


일제는 전쟁준비를 위해서 조선을 수탈기지화 했고 자본, 자원, 인적자원 등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수탈했다. 18은행 군산지점은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함께 일본의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군산근대미술관은 일제의 만행과 그로 인한 우리민족의 상처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아픈 과거로 가득한 미술관을 빠져 나와 근대 건축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

• 용산역, 수원역에서 장항선 무궁화호 3호칸 이용

• 요금 복지할인 적용 왕복 1만 2천 원

• 군산역에서 장애인 콜택시 이용 063-471-8187 (등록절차 후 이용 가능)


먹거리

• 역사벨트 동선 안에 있는 복성루 ‘물 짜장’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1945년생 ‘이성당’ 빵집의 단팥빵과 야채빵


장애인화장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근대건축관, 진포해양공원 안에 위치


문의

•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글, 사진= 전윤선 여행작가










전윤선 작가는 지체장애 1급으로 휠체어를 타고 전국을 여행합니다. 한국장애인문화관광센터(휠체어배낭여행) 대표로서 인권•문화 활동가이자 에이블뉴스 '휠체어 배낭여행'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KBS 3라디오 '함께하는 세상만들기, 휠체어로 지구한바퀴'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자유롭고 즐거운 여행길을 안내하기 위해 오늘도 전국을 누빕니다.


“신체적 손상이 있든 없든, 사람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접근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길 원한다. 손상을 가진 사람이 이동하고 접근하는데 방해물이 가로막지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나의 동그란 발은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다. 자유가 거기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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