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없는 탐방] 벚꽃 엔딩


벚꽃 엔딩


 


왔다 간 흔적만 있다 하여 ‘흔적의 계절’이라 불리는 봄. 봄은 더 이상 계절이 아니라 절기에 속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험난한 겨울의 끝에서 마술같은 선물을 선사하는 봄을 만끽하려면 활짝 핀 봄꽃 나무 아래서 걸어볼 일이다. 사월, 진해의 거리는 벚꽃 잎이 눈처럼 날리면 그제야 황홀한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봄을 시샘이라도 하듯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리는 꽃샘추위가 봄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는다.


▲ 로망스다리에는 데크로가 있어 휠체어로 편하게 이동하며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 로망스다리에는 데크로가 있어 휠체어로 편하게 이동하며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진해군항제는 봄꽃이 만개해 휘날리며 벚꽃 치장을 끝내고 상춘객을 맞는다. 이에 발맞춰 중원로터리부터 해군사관학교, 로망스다리로 유명세를 탄 여좌천공원까지 진해는 온통 꽃대궐로 봄꽃 축제가 한창이다. 벚나무와 진달래, 개나리 등 길과 산 꽃나무에서 후드득 후드득 봄이 떨어진다.


진해는 벚꽃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군항제 기간 동안 일반인에게 개방한 해군 사관학교는 군항제의 꽃이라 할 만큼 행락객들에겐 인기 만점이다. 진해를 찾는 여행객은 해군사관학교를 보러 군항제를 찾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서면 진해 앞바다가 은빛 물결을 뿌려댄다. 남해 바다의 아기자기한 작은 섬들이 바다와 함께하니 망망대해의 허망함은 생각 속에 묻혀버린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군사기밀에 속하는 군함을 군항제 기간 동안이 아니면 평소에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진해군항제는 해군과 진해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역사 깊은 꽃 축제인 것이다.


▲ 여좌천에 흩어진 벚꽃 잎들
▲ 여좌천에 흩어진 벚꽃 잎들

해군사관학교 내에선 군함도 군함이지만 거북선도 실제 크기의 모형으로 바다에 떠있고 그 안에도 들어가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에겐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 흠이긴 하다. 그러면 어떠랴.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 한시름 놓았기 때문이다.


진해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던 2008년에 찾았다. 그땐 진해까지 가는 열차는 새마을호뿐이어서 가는 길이 험난하기만 했었다. 다음해에는 군항제 특별열차를 타고 찾았다. 다시 찾은 진해는 낭만의 꽃길이 펼쳐져 있었고 열차를 타고 간다기에 마음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녹고 있었다.


진해의 벚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했다.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면 만화 <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초록색 지붕 집으로 가는 길가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요정들이 꽃잎으로 우산을 만들어 앤의 어깨에 내려앉는 것을 상상하며 초록색 지붕 집으로 가는 길을 앤은 꽃길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진해 벚꽃은 그때의 그 장면을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상을 하며 해군사관학교로 들어가려 했으나 평일엔 셔틀버스만 진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셔틀버스는 휠체어가 탑승할 수 없는 버스였다. 해군사관학교 진입은 포기한 채 셔틀버스를 바라보며 아쉽게 돌아가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동이 가능해졌다. 해군사관학교로 진입하는 버스가 저상버스로 교체돼 장애인 여행객도 그렇게 보고 싶었던 진해 앞바다의 군함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진 여러 사람의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로 교체된 해군사관학교 셔틀버스
▲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로 교체된 해군사관학교 셔틀버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진해 시민의 편안한 휴식처인 왕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해발 900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삼년 전까지만 해도 왕제산에 오르려면 가파른 계단만을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만난 왕제산에는 계단 옆으로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왕제산에 오르니 진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군함은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고 드문드문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들은 심심할 것 같은 바다와 파도를 만들어 정겹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 간 왕제산에서 내려다 본 진해 시내
▲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 간 왕제산에서 내려다 본 진해 시내

왕제산은 무장애 공원이다. 공원에 있는 사랑의 탑 안으로의 진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탑 2층에는 전시관이 있고 이곳으로 올라갈 수 있게 승강기도 잘 설치돼 있다. 탑과 공원을 산책하다 또 한 번 놀란 것이 있다. 탑 밑의 가파른 계단 옆에 리프트가 장착돼 있는 것이다. 산 정상에 리프트가 설치돼 장애인들도 왕제산 공원에서 자유롭고 느긋하게 봄꽃과 마주할 수 있다.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와 중원로터리 풍물시장에 들렀다. 풍물시장은 장터에서만 볼 수 있는 서정이 넘쳐났다. 각설이는 신나게 노래를 불러 젖히고 엿장수는 맘대로 가위를 두들기며 엿 팔기에 여념이 없다. 꽃단장을 한 마차는 승객을 불러 모으고 있고 사람들은 장터국밥 등 재래장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민의 정을 듬뿍 먹고 있다. 이렇게 짧은 하루는 흔적의 계절인 봄처럼 찰나에 지나가 버리고 있다.



▲ 계단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 덕분에 휠체어 장애인도 여유롭게 왕제산을 거닌다.
▲ 계단 옆에 설치된 모노레일 덕분에 휠체어 장애인도 여유롭게 왕제산을 거닌다.

바삐 여좌천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여좌천 벚꽃을 보는 순간 애간장이 녹아 환장할 것 같다. 벚꽃 때문에 환장하고 벚꽃 때문에 꼴딱 넘어갔다. 작은 여좌천은 앙증맞고 아기자기해 상춘객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천 양옆으로 벚꽃나무가 가지런히 줄서서 터널을 이루고 꽃은 팝콘처럼 이미 툭툭 터져 만개했다. 흐드러지게 피고지는 꽃잎은 바람 따라 하천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꽃잎이 흐르는 물줄기는 조약돌에 걸려 숨을 고르고 다시 흐르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로망스다리 위에서 여좌천에 흐르는 꽃잎을 한없이 바라봤다. 하천 돌담은 꽃들에게 이미 점령됐고, 봄의 색으로 무장한 점령군 제비꽃, 유채꽃, 민들레는 거침없이 진군한다. 하천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두엔 세모시 옥색치마의 봄처녀가 하천을 건너 꽃잎을 밟고 봄꽃의 호위를 받으며 행군한다. 그 위엔 파릇한 여고생들의 싱싱한 젊음이 반짝 반짝 봄볕처럼 빛나며 봄의 왈츠를 연주한다. 아름다운 선율은 벚꽃과 함께 여좌천을 흘러가니 지금 여좌천의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또 다른 음악은 뭘까 생각해 봤다.


휴대폰을 꺼내 음악 사이트에서 벚꽃을 검색해 봤다. ‘벚꽃 엔딩’이 첫 번째로 검색되고, ‘벚꽃 날린다’, ‘벚꽃 데이트’, ‘벚꽃 오프닝’, ‘벚꽃이 눈처럼 내리면’, ‘벚꽃 길 그 사람’, ‘벚꽃 흩날리던’, ‘벚꽃왈츠’, ‘벚꽃지다’ 순으로 검색된다. 검색된 음악을 모두 들어봤다. 아무 말 없이 벚꽃 떨어지는 여좌천 위에서 꽃잎으로 물들어 가는 광경은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벚꽃이 내린다’의 가삿말을 자세히 들으니, 지금 이순간과 너무 잘 어울려 마음에 꽂힌다.


 


내 눈 앞에 분홍으로 물들어간다

아련한 아름다운 풍경이 맘을 적신다


눈물이 흐른다

이 슬품은 또 말없이 날 찾아온다

가여운 고양이는 쉴 곳을 잃어 헤매인다


계절이 지나 널 잊는다면

메마른 꽃잎들은 남을 텐데

벚꽃 내린다


- 소란, <벚꽃이 내린다> 가사 중에서


 


지금 이 순간, 이 노래만큼 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그 어떤 말은 없을 것 같다.


여좌천엔 아지랑이가 스멀거리고 봄처녀가 여좌천을 따라 사뿐히 걸어오고 있다. ‘봄 처녀 제~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입에선 벌써 ‘봄처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시 음악을 뒤적여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가 랜시렌의 오카리나와 잉글리시 호흔 연주의 ‘봄처녀’를 영상과 함께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기타 반주에 맞춰 오카리나 연주가 시작된다. 영상 속 렌시렌은 진해의 봄을 분명 봤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처럼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제비꽃, 유채꽃 등 봄꽃들로 물든 여좌천
▲ 제비꽃, 유채꽃 등 봄꽃들로 물든 여좌천

영상 속 창밖은 벚꽃이 흩날리고 봄 처녀가 제 너머로 걸어오는 것 같이 감미롭다. 1절이 끝나고 2절은 오보에 연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보에 선율이 다시 심금을 울린다. 오카리나 선율보다 조금 낮은 음색이 1절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벚꽃 날리는 여좌천 풍경과 딱 맞아 떨어진다. 홍난파 작사, 이은상 작곡의 ‘봄처녀’는 매년 봄이 오면 저절로 생각나고 지금처럼 벚꽃 날리는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봄처녀는 여좌천에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밟으며 사뿐히 걸어간다. 봄처녀가 걷는 꽃길을 따라 나도 걸어본다. 여좌천 양 옆으로 매끈한 데크로가 조성돼 있어 휠체어로 걷기에도 불편함 없이 걸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여좌천의 끝인 장복산과 만난다. 내륙의 봄은 진해군항제부터 시작된다. 군항제를 시작으로 전국이 폭죽 터지듯 봄의 전령사가 북으로 진군하니, ‘벚꽃 엔딩’을 들으며 봄에게로 가는 찰나의 순간과 마주해 본다.



진해군항제 가는 길 (하루 코스)

⦁ 열차 시간 : 서울역 오전 8시 40분 출발, 마산역 11시 42분 도착

마산역 저녁 7시 48분 출발, 서울역 10시 50분 도착

⦁ 열차 요금 : 복지할인 적용, 왕복 48,600원

⦁ 마산역에서 경남장콜 이용 ‘즉시콜’ 이용 (1566-4488)- 1시간에서 30분 전에 즉시콜 예약할 것


문의

⦁ 휠체어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글, 사진= 전윤선 여행작가


 




 


전윤선 작가는 지체장애 1급으로 휠체어를 타고 전국을 여행합니다. 한국장애인문화관광센터(휠체어배낭여행) 대표로서 인권•문화 활동가이자 에이블뉴스 '휠체어 배낭여행'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KBS 3라디오 '함께하는 세상만들기, 휠체어로 지구한바퀴'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자유롭고 즐거운 여행길을 안내하기 위해 오늘도 전국을 누빕니다.


 


“신체적 손상이 있든 없던, 사람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접근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길 원한다. 손상을 가진 사람이 이동하고 접근하는데 방해물이 가로막지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나의 동그란 발은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다. 자유가 거기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