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와 운명을 마주한 남자 이야기
[네버엔딩 인터뷰] 다섯 번째 인터뷰... <푸르메재단> 고재춘 실장
늘 함께 있어서 그런지. 한 번도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재춘 실장을 인터뷰이로 추천한 한희정 씨의 이야기가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잘생기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는 자상한 고재춘 실장님이 궁금합니다.”
조금 양보해서 잘 생긴 것 까지는 찬성할 수 있었다. 눈이 크고 약간 검은 피부가 오히려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상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고재춘 실장이 자상한 사람이라고 말 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남들은 느꼈던 고재춘 실장의 매력이 궁금해졌다.
산촌에서 자란 시골 사나이
경북 예천. 그곳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 14가구만 있는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다행히 또래 친구가 4명. 친구들과 함께 늘 자연에서 놀았다. 참새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자연이 놀이터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늘 한복을 입고 생활하실 정도로 유교적 성향이 강한 쉽게 말해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자 예천 땅을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꿈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진학상담을 다녀오신 아버지의 선택으로 산업복지를 전공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신문방송보다도 더 배우고 싶었던 것은 기계설비를 배우는 공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제 인생에 두 개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색약 판정을 받았어요.”
고재춘 실장에게 특정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공대에 갈 수 없다는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문과를 선택하고 그나마 활동적이라는 신문방송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그 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환점은 고3 진학상담 후 아버지의 결정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선생님을 하늘과 같이 생각하시고 담임선생님이 추천하는 데로 동의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운명처럼 산업복지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색약 판정도 잘못 나온 결과였다고 한다. 단순한 실수 하나가 그의 진로를 사회복지 분야로 이끌었다.
첫 직장에서 만난 인연
고재춘 실장은 푸르메재단의 만능맨으로 통한다. 어디서 그런 재주가 생겼냐고 물었더니 잘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생긴 것 같다는 말이 돌아왔다. 군 제대 후 지인의 소개로 통신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혹시 그게 도움이 됐을 것 같다고 한다. 대학졸업 후 강북장애인복지관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년 5개월 동안 근무했는데 행정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고 한다. “당시 부장님께서 기안지를 반으로 접어서 줄이 맞는지까지 확인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 철두철미 정신은 고재춘 실장을 성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기획 쪽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사회 복지 분야의 시야가 넓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첫 직장은 업무 능력만 향상 시켜준 것이 아니었다.
일 잘하는 사람에게 복이 굴러오듯 직장에서 아내를 만났다.
“바빠서 그런지 주말에 나와서 일하면서 데이트를 했어요. 철저하게 비밀로 사내 연애의 재미를 느꼈죠.”
사귄지 한 달 만에 처가에 인사를 드리고 떳떳하게 사귀겠다고 집안에 연애 선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경상도 사나이가 맞구나 싶다. 그렇게 1년간 뜨겁게 연애를 하고 신선도가 채 식기 전인 2003년 결혼에 골인했다. 그런데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신혼 때는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사회복지사인 아내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책이나 장애인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보면 늘 싸움으로 끝났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자녀의 이야기로 옮겨졌다.
“초등학교 5학년인 큰딸 영빈이와 6살인 작은딸 혜린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혜린이는 50개월입니다.”
작은딸의 개월 수까지 기억할 정도로 애정이 넘치는 것을 봐서 누가 더 예쁘냐고 물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
“작은딸, 혜린이는 가슴으로 낳은 아이에요. 그래서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혜린이는 이른둥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를 위해 산후 조리도 포기하고 온 가족이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시력 형성과 인지발달을 위해 백일도 안 된 아기에게 안경을 씌우고 매일 울면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장애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와 기다림 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실감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애타는 기도 덕분인지 다행히 잘 자라주었고 지금은 시력만 조금 나쁘다고 한다. 장애에 대한 판단이 빨랐고 잘 치료한 덕분에 얻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재활치료의 시급성을 몸소 체험한 산 증인이기 때문에 푸르메재단이 지을 어린이재활병원에 더욱 애착이 갈 것 같았다. 혜린이 첫 돌때 쓴 눈물의 편지를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다는 말에 애잔함이 느껴졌다. 그런 아이가 이제는 잘 자라서 아빠의 피곤함을 달래주는 애교 공주가 되었다고 한다. “혜린이의 3단 뽀뽀에 하루의 피곤이 사라집니다.”라고 말하는 고재춘 실장의 얼굴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사회복지, 너는 내 운명
그의 인생을 강타한 큰 사건이 있었다. 입대해서 신병교육을 잘 받고 연대장 표창으로 휴가까지 받았다. 자대 배치 전 휴가를 나와 기쁜 마음에 집에 전화를 해보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렵게 통화가 되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대구에 있는 큰형 집으로 가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도시에 있는 큰형 집에서 편하게 쉬다가 들어가라는 뜻인 줄만 알았는데 일병쯤 되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형이 고재춘 실장의 신병교육대 퇴소식을 보기 위해 이동 중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경추에 심한 손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신병인데 사고 소식을 접하고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본인의 잘못인 것 같아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미안함과 죄책감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작은형의 사고와 이른둥이로 태어난 작은딸로 인해 큰 파도를 두 번이나 넘었지만 이로 인해 사회복지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남의 일로만 알았던 장애의 어려움을 직접 접하니 신념은 더욱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강요로 선택된 전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생을 이끌 운명이 되어 있었다.
눈물이 많은 향기 나는 사람
고재춘 실장의 겨울철 트레이드 마크는 매일 바뀌는 색색의 목폴라 니트. 즐겨입는 이유를 묻자 와이셔츠를 다릴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다는 생각보다 단순한 답변이 돌아왔다. 수원에 사는데 출퇴근과 아이들 키우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폴라 니트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대략 6~7벌쯤 된다고 하니 오늘은 어떤 색을 입었는지 인사를 건네도 좋을 것 같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어서 에버랜드 연간 가족 회원권을 구입했는데 한 번 밖에 못 갔다고 한다. 그만큼 일이 바쁘고 주말에는 밀린 잠을 자는데 할애 한다고 한다. 최근에 영화 ‘변호인’을 보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나는 무엇을 했는지 반성도 되고 사회를 위해 더 봉사해야겠다는 다짐도 생겼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차갑게 보는데 눈물이 많고 감성적인 성격이라고 귀띔한다.
그의 먼 미래의 꿈은 비영리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작은딸을 키우면서 느꼈던 장애자녀를 가진 부모에게 컨설팅을 해주는 특성화된 재단이 목표라고 한다. 그의 열정과 진심을 확인하니 곧 꿈은 이루어질 것 같다. 다음 인터뷰 주자를 묻자 과천시장애인복지관 곽재복 관장을 추천한다.
“배려하시고 앞장서시는 모습이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다릴 줄 아시는 모습에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고 생선 묶은 줄에서 비린내 난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근본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고재춘 실장과 인터뷰를 하며 느끼지 못했던 향기를 찾아냈다. 코로 맡을 수 있는 향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향기였다. 실장이라는 책임감 뒤에 숨어 있던 인간성 가득한 고재춘을 찾아내니 나는 향이었다. 아마 한희정 씨를 비롯한 사람들이 느꼈던 ‘자상하다’라는 것도 그 향기의 일종일 것이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국화향처럼 은은하고 콩기름처럼 구수한.
*글= 한광수 팀장 (홍보사업팀)
*사진= 정담빈 간사 (홍보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