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백의 길] 필리핀 오지를 달리는 한국버스
▲ 필리핀 전국을 누비는 진료버스
2012년 1월 방영된 KBS <인간극장>을 본 시청자들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나라지만 극심한 빈부격차로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인 의사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에서 들여온 중고 관광버스를 진료버스로 개조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다고 했습니다. 마닐라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클라크 빈민가, 지진과 화산활동이 활발한 피나투보 지역은 물론 마닐라에서 16시간이나 걸리는 벽촌 오지를 찾아 원주민의 건강을 검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의 가슴은 먹먹해졌습니다.
‘필리핀 선교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누가 원장(53)입니다. 위암과 췌장암 수술을 받고 시한부인생을 살면서도 원주민을 한명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진료하고 있는 그를 한국언론은 ‘살아있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소개했습니다.
박 원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서울여대 김찬란 교수님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한 것은 12월 중순이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영하 10도의 한국에서, 영상 30도가 웃도는 필리핀의 폭염 속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캐롤송을 듣는 것이 낯설었지만 꼭 흰 눈 속에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항에서 내려 ‘필리핀 선교병원’을 찾았습니다. 로비에는 10여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로 아기를 안은 엄마였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의료비가 너무 비싸서 간단한 수술도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서민이 중증수술을 받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들다는 얘기지요. 수술은 커녕 약조차 사먹기 힘든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아플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있다는 것은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누가 원장은 “최근 한국 TV에 소개되면서 고향인 대구는 물론 필리핀 관광을 왔다가 저를 알아보고 기금을 주시는 분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 필리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는 박누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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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왜 필리핀에서 의료활동을 하게 됐을까요.
“계명대 의대를 다닐 때 학생운동에 관여했습니다. 그런데 실험실 화재사고가 나면서 이 사건이 1983년 대구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연결되면서 제가 배후로 지목됐습니다. 경찰의 감시도 심해지고 결국 학교를 중퇴할 수 밖에 없었고 마닐라 의대에 입학해 의학을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필리핀의 의료현실을 목격하게 된 거지요.”
그럼 어떻게 병원이 운영되는 걸까.
“아까 말씀드렸지만 지난해 방송이 나간이후 대구 칠성교회와 평강교회, 일반시민들로부터 후원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병원임대료와 약품구입비, 병원 사무장 급여, 버스운행비 등 한 달에 약 700만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이중 절반은 후원비로, 절반은 한국관광객과 현지인들의 진료비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현지 필리핀인 중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은 병원비를 내지만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무상으로 해주는 경우가 많지요.” 병명은 다양하지만 주로 감기가 많고 영양결핍과 씻지 못해 피부병이 확대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각종사고로 인한 수술환자도 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 필리핀 선교병원
인터뷰하는 진료실 옆 커튼을 열어봤습니다. 겨우 한 평이나 될까 작은 방에 침대가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그의 침실입니다. “언제든 비상벨이 울리면 진료할 수 있게 병원에서 침식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새벽에도 2, 3명의 응급환자를 봤습니다.”
박 원장이 얘기할 때 이마를 가로지르는 주름도 깊이 패여 보입니다. 아픈 건 어떨까?
“1992년 췌장암 수술을, 2004년 위암으로 두 번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니 완치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09년부터 간경화와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으로 돌아간 아내가 암수술을 받고 현재 4차 방사선 치료중이라서 잘 극복하기 기도하고 있습니다.”
▲ 클라크 시골마을의 집들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러 번 급한 환자가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알리러 온 사람은 10살 안팎의 소년입니다. 누군지를 물었습니다. “가난하지만 공부하길 원하는 꼬마 2명이 현재 병원일을 거들며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지금 장학금을 주고 있는 의대학생처럼 의학공부를 계속 시키려고 합니다.” 병원 한쪽에는 작은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가 세운 작은 교회입니다. 필리핀에서 의학에 이어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료봉사활동도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클라크 인근에 있는 시골마을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구찌, 루이비통, 보스, 버버리 등 명품매장이 즐비한 마닐라 중심 쇼핑가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고급승용차가 넘쳐 났습니다. 뉴스에서 본 태풍이 몰아닥친 필리핀 중부지역은 폐허였습니다. 11월 태풍 ‘하이옌’으로 1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42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같은 국토 안에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마닐라 도심에선 가족을 잃은 비탄의 소리도 고통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세 시간을 달려 우리는 미국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에 있는 큰 나무 아래 도착했습니다. 큰 버스를 손수 운전한 박 원장은 벌써 한 마을에서 진료를 끝내고 왔습니다. 겨우 버스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달려 마을 입구에 버스를 세웠습니다. 그리곤 먼지가 풀풀 나는 좁은 황톳길을 걸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평범한 시골 마을이라고 했지만 제 눈에는 70년대 초 청계천의 빈민가와 다름없었습니다. 황톳길을 걸어가자 현지인 몇 사람이 반갑게 박누가 원장을 맞아 줬습니다. 그 중 한 청년을 붙잡고 오른쪽 손을 살폈습니다. 몇 달 전 절단된 엄지손가락 봉합수술을 받은 청년이었습니다. 상처가 잘 아문 청년은 박 원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박 원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라면과 볼펜 등을 나눠주면서 아픈 사람은 의료버스로 오라고 말했습니다.
의료버스에는 벌써 세 사람이 분주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어제 병원에서 만난 나이많은 병원사무장이었고 두 분은 대구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다 은퇴하신 목사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버스 안쪽에 앉아 박 원장의 지시로 약을 조제했습니다. 주로 타갈로그어를 사용하는 주민과 의사소통이 힘들고 약조제가 서툴러 약을 타려는 환자 줄이 길게 늘어섰습니다. 모두 더위 햇살 아래 조용히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없어 얼굴을 일주일째 씻지 못했다는 아이는 머리 피부병에 바를 연고를 받고 활짝 웃었습니다.
▲ 클라크 인근에 사는 꼬마 그리고 시골 사람들
어쩌다 필리핀은 이지경이 됐을까.
6·25전쟁에 7,420명을 파병했고 1960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79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을 때 필리핀은 254달러로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잘 살던 국가였습니다. 다른 예로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의 원조와 필리핀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국역사박물관(전 문화관광부 건물)과 주한 미국대사관 건물도 필리핀에서 시공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선진국인 필리핀 의대에 유학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잘 살았던 필리핀이었는데 말입니다.
1571년 시작된 320년간의 스페인 통치와 41년 동안의 미국 식민지 시절 필리핀에는 이들 외세와 결탁한 소수의 귀족과 특권층이 경제를 독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척했다고 합니다. 1965년부터 20년 동안 집권한 부패하고 무능한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매관매직과 사치, 부정한 재산축적 등으로 필리핀을 희망 없는 극빈국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현재는 특권층 7%가 필리핀 전체의 부와 국토 중 95%를 독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국민 대다수는 빈곤층으로 전락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117위, 2587달러로 한국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합니다.
제가 만난 필리핀 사람들은 그 어느 나라 사람보다 친절하고 잘 웃었습니다. 남방 특유의 여유와 낙천성이 돋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착한 사람들이 젊은 여성은 싱가폴이나 홍콩, 태국, 호주 등 인근 나라에서 가정부로, 남성들은 중동의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필리핀으로 송금하는 돈은 관광수입과 함께 필리핀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 진료를 받는 필리핀 사람들
박누가 원장과 함께 현지인들을 위해 파준 우물을 둘러보는데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꼬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박 원장은 다시 자동차에서 컵라면 박스를 들고 나와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시적이고 시혜적인 지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생활은 미래의 일입니다. 당장 살아가는 문제가 절박합니다. 생존이 해결돼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비록 제가 건강하지 못하고 병원운영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쓰러지는 날까지 버스를 몰고 다니며 의료봉사활동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지만 헌옷이나 작은 생필품도 그들에겐 소중한 선물입니다.”
박 원장의 표정이 단호하게 보였습니다. 그가 더 건강해지고 한국으로부터 지원의 손길도 늘어나 필리핀 사람들이 바라는 사업을 하게 되길 바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글, 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