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民의 聖者’에서 푸르메 어린이의 친구로 - 3편 한국 땅을 밟다
▲ 할아버지와 할머니. 뒤로 40년이 된 장식장이 보입니다
“우아~!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대단해요!” 비록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작나무 숲속 노무라(野村) 할아버지 댁에 머무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밥상을 대할 때 마다 아이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요리코(順子) 할머니는 ‘간단하게 차렸다’고 겸손해하셨지만 아침상에는 마코토 씨가 사온 식빵과 바게트, 얇게 썬 소시지, 스크램블 에그, 우유, 버터, 요구르트와 꿀까지 올라온 것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평소 이렇게 드시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하십니다. 보통 때 1식 3찬의 소박한 밥상이라는군요. <스크램블 에그>도 ‘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노릇노릇하게 만들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돼지고기에 집 된장을 발라 그윽한 향취를 더한 <할머니표 돈가스>와 야채와 고기의 절묘한 조합인 <양배추-쇠고기말이>를 입안에서 음미하면서 음식으로도 영혼에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께 ‘어떻게 요리를 잘 하시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노무라 할아버지가 대신 대답하십니다. “내가 미국 유학중 요리코에게 서양요리를 배우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더니 요리코가 요리학원에 열심히 다닌 결과지요.” 젊은 시절 할머니 가슴에 불을 활활 타오르도록 이끈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마이스터를 탄생시킨 걸까요. 요즘 일본에서는 젊은 시절 숨죽여 살던 여성들이 남편의 은퇴와 더불어 재산분할을 요구하는 황혼이혼이 유행한다지만 노무라 할아버지에 대한 요리코 할머니의 사랑은 순명(順命)처럼 느껴졌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많아서 일까요. 할아버지의 말씀은 갑자기 방언 터지듯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보통 할아버지를 만나면 서로 짧은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늘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날은 모닥불 앞에 마주앉은 연인처럼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동행한 동아일보 노지현 기자 덕분이었습니다. 와세다대(早稻田大)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노 기자는 할아버지의 생각과 말씀을 막힘없이 유창하게 통역했으니까요. 말이 통하자 할아버지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1961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도쿄 YMCA 영어강사로 일을 시작한 할아버지는 이따금씩 가난한 청년들을 가정교회가 마련된 집으로 초대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이들에게 ‘기독교인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을까요. 침묵을 지키던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하루는 청년 8명을 데리고 온다기에 식사을 준비했는데 글쎄 30여명이 들이닥쳤어요. 불이 나게 가게로 달려가 모두 외상으로 음식재료를 사왔지요. 배고픈 시절이었으니 어떻게든 청년들을 먹여 보내야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한 사람만 7만 명을 넘을 거예요.” |
7백명, 7천명도 아닌 7만명이라는 숫자가 상상이 안됩니다. ‘한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많은 손님들을 집으로 부른다면 양 같은 아내라도 결국 못참고 ‘당신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요리코 할머니를 만나신 할아버지는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언제라도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기 위해 할아버지 댁 거실에 있는 낡은 호마이카 장식장에는 수 백 개의 찻잔과 접시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만든 백발의 노부부가 제 앞에서 미소 짓고 계셨습니다.
노부부의 검소하고 베푸시는 삶을 보면서 ‘소박한 생활과 습관, 언어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게으른 습관, 가식에 찬 언어는 그들을 쇠약과 멸망의 길로 이끈다’는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청년 노무라
외형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서로 나누는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노무라 할아버지의 신앙철학은 지금도 ‘가정교회’라는 형태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집 거실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지명인 베다니(Bethany)의 이름을 딴 <베다니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매주 일요일이 되면 이곳에서 10명 정도의 교인이 모여 예배를 올린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뜻에 공감한 신자들이 멀리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산길을 두 시간이나 달려오는 것이지요.
노무라 할아버지는 1968년 한국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1968년은 벽두부터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사건으로 어느 때 보다도 한반도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1965년 한국과 일본 간 국교정상화가 됐지만 오히려 서울이 평양보다 일본인에 대한 시선이 차가울 때였다고 합니다.
▲ 제암리교회 목사 사택에서
한국에 첫 발을 디딘 노무라 할아버지는 한일교회 교류행사가 열린 강원도 강촌에 있는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창촌중학교 백풍기 교장선생님 댁이었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한국인들로부터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런 걱정은 기우(杞憂)였습니다. “백 교장의 부인은 방 두 개중 하나를 내게 내줘야 했기 때문에 저녁밥을 차려준 뒤 4킬로미터나 떨어진 친정에 가 잠을 자고 다시 새벽에 와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일본인 적산(敵産)가옥이 즐비했던 서울 후암동과 회현동을 둘러보기도 하고 부산 피난민 마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할아버지는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드넓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했던 군산에 찾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모두 할아버지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청년 노무라에게 일본군에서 찔린 가슴의 칼자국을 보여주며 “이게 모두 너희 일본인들이 저지른 죄악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5년 뒤인 1973년 요리코 할머니, 초등학생이던 딸 메구미(恩惠), 아들 마코토(眞理)를 데리고 한국을 방문합니다. 먼저 찾은 곳이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堤岩理)입니다. 제암리는 1919년 3.1 운동 때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일제가 주민 30여명을 교회에 몰아넣은 뒤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살해한 만행사건의 현장입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제암리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상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 남양만에서 새로 건립되는 철거민 정착촌 봉사활동에 참여한 요리코 할머니와 아이들
할아버지 가족은 수원역에 내린 뒤 어렵게 물어서 제암리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날 목사관에는 늙은 여인이 혼자 있었는데 일본인 가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환하게 맞아줬다고 합니다. “다른 곳보다도 제암리에서는 일본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렸을 텐데 우리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이 오히려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는 설탕물과 수박을 우리에게 내놓았습니다.”
할아버지 가족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청계천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거주지를 만들던 남양만을 찾아 함께 먹고 자며 새로운 복음자리를 만드는 일에 구슬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마코토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암리와 청계천을 둘러본 기억 때문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이런 인연이 이어져 현재 이바라키현(茨城縣)에 있는 정신장애인시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탑골공원을 방문한 날 아버지가 ‘일본인이 이곳에서 얼마나 나쁜 일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라’고 하셨던 기억납니다.”
마코토 씨에게 노무라 할아버지는 자식 이름을 메구미(恩惠)와 마코토(眞理)로 지을 정도로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한국에 대한 사죄와 헌신에 매달렸던 분이셨습니다.
(4편에 계속됩니다)
*글=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