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民의 聖者’에서 푸르메 어린이의 친구로 - 2편 미국유학을 마치고 민중속으로 돌아오다
▲ 노무라 할아버지가 사시는 마을
2월말인데도 할아버지 댁은 겨울의 한복판입니다. 한밤중 바깥기온 영하 12도, 방안 온도는 영상 5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차가 끊어진 시골 대합실처럼 집안에는 냉기가 감돌았습니다. 방안에서도 입김이 술술 나왔습니다. 신산(辛酸)을 辛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추위를 절약과 검소함으로 맞서고 계신 노부부를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요리코 할머니는 순자(順子)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려고 결심하신 듯 도통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노무라 할아버지가 말씀을 시작하시면 반짝이는 눈빛으로 경청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론 빙그레 웃는 미소로 화답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방문 첫날 밤, 불 대신 허연 입김을 내뿜는 용 할머니는 “새벽녘이 몹시 추울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이불 2채씩을 더 내주셨습니다. 무거운 이불을 다섯 겹이나 두르고 누워 있으려니 ‘변학도에게 미움받은 춘향이가 칼 쓰고 감옥에 앉아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춥지는 않았지만 이날 밤 지진으로 천정이 무너져 내리고 그 아래 깔리는 꿈까지 꿨습니다.^^
70년대 우리나라 집들도 많이 추웠습니다. 연탄 아궁이에 닿아있는 아랫목은 장판이 탈 정도로 뜨거웠지만 조금만 윗목으로 자리를 옮겨도 냉기가 감돌았습니다. 아침에 깨어보면 머리맡에 놓아둔 물사발이 얼어서 깨져 있곤 했습니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그 집이 넉넉한가 판단하는 기준이 광에 차곡차곡 쌓아둔 연탄이 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겨울철 먹을 쌀과 땔 연탄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의 중요한 역할이었으니까요. 평안북도 의주에서 월남하신 저의 부모님도 북한 추위에 단련되셔서 그런지 집안이 몸을 움추릴 정도로 늘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 정갈하게 할머니가 정리하신 손님방
제가 일곱살때 일입니다. 할머니 방에서 잠자다 추워서 잠을 깬 저는 재봉틀 위에 작은 누나의 내복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심결에 이것을 입고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사단이 났습니다. 입고갈 내복이 없어졌다고 누나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 잠을 깬 것입니다. 놀란 저는 어떻게 할까하다 고민하다 그냥 죽은 척 누워있기로 했습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져 왔습니다. 어머니는 죽은듯이 누워있는 제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시더니 이불을 번쩍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리곤 연민어린 눈길로 저를 내려다보시며 한탄하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경학아! 날래 벗으라우. 사내 녀석이 요까짓 남한 추위를 이기디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겠네.” 눈물이 날 정도로 간곡한 어머니의 호소였습니다. 그 사건 이후 아무리 추워도 내색않고 견뎌왔지만 실내기온이 5도까지 내려가는 노무라 할아버지 댁에서는 40년전 어린 시절의 오한이 밀려왔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빚에 쪼들려 도쿄 시내에 살던 집을 파시고 1985년 이곳에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할아버지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습니다. 만감이 교차하시는 듯했습니다. 다음편에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겠지만 할아버지는 도쿄 집 뿐 아니라 젊은 시절을 한국의 도시빈민과 빈민운동을 했던 K목사를 위해 바치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눈물은 한국민중에 대한 사랑과 젊은날의 헌신을 배신한 한 사람에 대한 애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할아버지 산책 모습
어머니와 떨어져 살며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할아버지는 신이 모든 생명을 창조했으며 인간에게 소중한 소와 돼지, 말 같은 가금(家禽)뿐 아니라 노루와 여우같은 세상의 모든 짐승을 돌보는 것이 그가 믿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으로 도쿄수의대학을 입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노무라 할아버지는 전남 순창에서 유학 온 김오남(金五南)이라는 한국인 친구를 만납니다. 김오남 씨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일본의 침탈행위가 어떻게 한국 국민에게 고통을 줬을 지, 이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한국 국민이 겪게된 어려움을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일본이 한국민에게 잘못한 일들을 들으면서 만약 기회가 있다면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고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사람도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 동물을 연구하는 수의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위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무엇보다 할아버지 스스로 수의학이 전쟁후 가난했던 일본 상황에서는 무슨 사치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수의대를 중퇴하고 어머니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하기위해 1954년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할아버지가 유학을 결심한 배경에는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서 봉사활동을 하셨던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1940, 50년대 일본 여성권익운동과 소비자운동의 중심에 섰던 어머니와 기독교는 당시 할아버지의 삶을 지탱했던 두 개의 큰 기둥이었을지 모릅니다.
미국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초 장학금을 약속했던 신학대학에서는 다음 학기부터 어렵다는 뜻을 밝혔고 일본으로부터 오던 생활비도 중단됐습니다. 굶는 날이 많아졌고 일요일 교회에 가야 비로소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하루 12시간씩 음식점에서 접시를 닦는 일을 비롯해 닥치는대로 일하면서 유학생활을 버텼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미국인로부터 일본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인 ‘잽스(Japs)’라고 놀림을 받으면서 인종차별도 실감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은 소수자,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느끼고 이들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점 황폐해져가고 있는 어느 날 미국인 목사가 나를 부르더니 ‘너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라’하고 말하는 거예요. ‘나눠줄 것이 없는데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예수가 그랬으니까 너도 그 길을 따라가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가겠다고 말입니다.” |
미국 비올라대학을 졸업한 할아버지는 페퍼다인 신학대학원으로 옮겨 성서에 얽매이지 않고 종교학과 성서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1961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7년 동안 기다려준 요리코(順子) 할머니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들려준 결혼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할아버지는 YMCA에서 야학활동을 했는데 그 때 돌린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 요리코 할머니라고 합니다.
“당시 두 여성이 나를 좋아했습니다. 한 사람이 요리코이고, 발랄한 성격의 다른 여성이 있었어요. 나는 친구처럼 두 사람과 편지로 교류했습니다. 그런데 유학기간이 길어지자 발랄했던 여성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알려왔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요리코에게 ‘나와 결혼하겠느냐’는 편지를 보냈고 곧 ‘그러겠다’는 답장이 왔지요. 그래서 귀국하는 대로 서둘러 결혼을 했지요. 아마 다른 여성이 결혼을 안했으면 나도 요리코와 결혼할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이 대목에 이르자 양처럼 순하디 순한 눈매를 가진 할머니의 눈매가 갑자기 호랑이처럼 날카로워지면서 하이빔을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
일본은 한국 6.25전쟁과 세계경제의 회복으로 경제적인 호황을 겪으면서 1950년부터 향후 20년 산업화와 고도성장과정을 겪게 됩니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는 하루가 다르게 공장과 고층빌딩이 세워지고 지방에서 농사짓던 농민들과 소도시 노동자들은 도쿄로, 오사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할아버지는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당시 일본교회를 보면서 두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가족같이 서로를 대하는 가정교회를 열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도쿄 YMCA에서 선교 및 영어강사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 아침식사 감사 기도를 하시는 할아버지 부부
*글=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