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현지 인터뷰

 노무라 목사가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1970년~1980년대 자신의 젊음을 바친 서울 청계천 사역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노무라 목사가 한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직접 찍고 수집한 사진을 슬라이드 영사기를 돌리며 힘들었지만 의미 있었던 한국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노무라 모토유키. 얼핏 낯선 이름 같지만 한국의 빈민운동에 관심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일본인이다.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1970년대 청계천 빈민운동을 벌였고 한국에 관한 기록이 수백 권에 달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36장 짜리 필름 10통을 1주일에 다 쓴 적도 있다며 한국 관련 사진첩 및 스크랩북을 보여줬다. 2005년에는 서울역사박물관 및 청계천 문화관에 자신이 찍은 사진과 청계천 관련 자료 2만여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때로는 웃는 얼굴로 때로는 슬픈 모습으로 그때를 회상했던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를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자택에서 현지 취재했다. 인터뷰는 노지현 동아일보 기자의 한국어 통역으로 진행됐다. 

Q. 한국과 일본의 과거 역사를 생각해볼 때 그 시절 한국에서 빈민운동, 종교활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과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A. 어릴 적 내가 자란 교토의 니시진에서 당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 멸시를 피부로 느낀 것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1968년 서울 화곡동 그리스도신학대학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가난한 심령들을 위해 일본 기독교계가 나서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한국은 곳곳에 일제강점기 때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또 급격한 경·중공업정책으로 도시가 팽창하고 그에 따라 이농민이 늘어났으며 이농민들은 청계천, 화곡동 등 서울 변두리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이후 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는 모임’을 조직했고 1973년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조선인 학살의 현장인 수원 제암리 교회, 3·1운동이 있었던 탑골공원, 청계천 빈민가 등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청계천에서 빈민가에서 선교 방향을 정하고 그 곳에서 만난 제정구 의원(작고)과 빈민구호활동을 펼쳤습니다. 어머니의 대학 동창인 연세대 서남동 신학과 교수(작고)도 만났습니다.


Q. 당시 한국은 이제 막 산업개발에 박차를 가할 때라 잘사는 사람들보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더 많을 때였습니다. 목사님이 당시 직접 본 한국의 청계천 판자촌은 어떠했는지요.


 



▲ 1970년대 초 서울 청계천에서 빈민구제활동을 벌인 노무라 목사가 촬영한 청계천 판자촌의 모습.


노무라 목사는 자신이 찍은 사진과 청계천 관련 자료 2만여점을 2005년 서울역사박물관과 청계천문화관에 기증했다.


 


A. 청계천에는 수십만명의 빈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국인 K목사와 함께 한 집을 방문했습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10살 정도로 보이는 불치병에 걸린 소녀가 대각선으로 누워 있었어요. K목사가 소녀의 치마를 들췄는데 끔찍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녀의 허벅지 부근에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파리 떼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녀의 뼈위를 날아다녔습니다. 소녀의 다리에 파리 떼가 수천개의 알을 낳았고, 구더기가 득실거렸습니다. 구더기들이 얼마 남지 않은 살을 파먹고 있었습니다.


Q. 말씀만 들어도 처참한 광경이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그 끔찍한 모습을 보며 목사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A. 소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군요. 소녀의 눈동자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길을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고 누워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모른 체하며 지나쳐버리지만 사라미아인은 다친 사람의 상처를 싸매고 주막으로 데려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주라며 돈까지 줍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경멸받고 하층민으로 천대받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 소녀의 눈을 통해 우리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녀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신 예수의 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소녀의 눈을 통해 차별당하고 멸시당한 사마리아인의 뜻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가 피해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두 달 뒤 죽고 말았어요.


Q. 소녀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셨다는 말씀이네요. 그 모습에서 예수님을 생각하셨다니 천상 목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당시 빈민가와 관련된 또 다른 기억도 말씀해 주십시오. 

A. 자살 청년 시신을 수습한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74년 어느 날 다리 밑 오물구덩이에 시신 한 구가 떴으나 누구도 수습하지 않았어요. K목사가 막대기로 끄집어냈어요. 무연고자라 사망진단서조차 끊을 수 없었습니다. 진단서 끊는 것도 돈이 있어야 했거든요. 돈 있는 사람은 저뿐이어서 경찰 등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사정했더니 안 된다는 겁니다. 뇌물 주고 허가 받아 리어카에 실어 소각장으로 향했어요. 그곳에서도 뒷돈이 필요했습니다. 화장한 뼛가루를 다시 청계천으로 가져와 다리에서 뿌렸습니다. 정말 슬펐습니다.


Q. 당시 청계천 빈민운동을 벌였던 고 제정구 의원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제정구 의원과 만나게 됐나요.


A. 고 제정구 의원과의 인연은 청계천 판자촌에서 시작됐습니다. 제정구 의원은 순수한 열정을 갖고 한국에서 빈민들을 위한 터전을 일군 분이었습니다. 청계천 판자촌 야학교사를 시작으로 평생을 빈민운동에 바쳤습니다. 그는 빈민들과 부대끼며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뤄냈습니다. 기회가 되면 제 의원의 따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만난 빈민활동가들 중엔 순수하지 못했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어렵게 받아 온 기부금을 탁아소를 짓겠다는 한국의 교회 관계자들에게 주고 난 뒤 완공되었다고 가보면 교회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 노무라 목사는 한국인 K목사가 청계천 철거민을 위해 쓴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시도 때도 없이


돈을 요구해 수십차레에 걸쳐 한국으로 돈을 송금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걸려온 콜렉트콜 전화 영수증 


Q. 아까 말씀하신 자살한 청년을 건진 한국인 K목사 얘기도 더 들려주세요.


A. 청계천 빈민들이 1978년 경기 남양주 등으로 이주했습니다. 나는 굶는 아이들을 위해 급식비를 마련하고 병원에 갈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벅찼습니다. 그래서 빈민들과 돈을 합쳐 축산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K목사는 철거민을 위해 쓴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시도 때도 없이 돈을 요구했습니다. 도쿄 유라쿠초의 한국은행에 가서 수십차례에 걸쳐 돈을 송금했습니다. 어느정도 돈이 모이자 뉴질랜드 목축업자와 계약을 해 뉴질랜드산 우량 소 600마리를 인천항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실패했어요. 돈을 갖고 있던 K목사가 돈을 불려보겠다며 부동산에 투자를 한 것입니다. 땅이 전매제한법에 묶여버렸고 결국 잔금을 치르지 못한 소들은 인천항에서 하역도 하지 못한 채 절반 이상이 굶어죽었습니다. 하지만 비난은 다 내게 돌아왔습니다. K목사는 내가 공금횡령으로 자금을 날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한국으로 보낸 돈이 7500만엔(지금 돈으로 약 8억원)이 넘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겨준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이곳 야마나시현 산골로 들어왔습니다.

 

Q. 목사님의 남다른 열정을 볼 때, 남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며 성공할 수 있는 다른 진로들이 많았을 텐데 낮은 곳으로만 임하는 목사가 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1954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성서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기독교와 종교사 등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습니다. 1961년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도쿄 YMCA 등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활동하며 젊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배운 신학공부는 목회활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교회에 충격도 받았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속되지 않고 섬기는 것이 나의 철학입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따라가고 슬픈사람 있으면 옆에 가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Q. 그동안 한국에서 하신 일을 보면 그 어느 주한일본대사보다 훌륭한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우경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한국에서도 걱정이 많은데요,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A.역사를 좀 더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양국의 기독교에는 생각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인재를 찾고 싶습니다. 그 전에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고 봅니다. 정치인들은 한일 양국은 자국내 정치에 대한 불만을 외국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합니다. 한일감정만큼 이용하기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나라와 나라는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인접국가끼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정치인들은 교묘히 사람을 조종해서 국민들을 싸우게 만듭니다. 본인은 양국간의 평범한 사람들을 조종하는 위정자들의 끈을 자르고 싶은 생각입니다.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성경에 이스라엘 침략 역사가 있는지 일반인들은 이해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의미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Bible as a book’이 아닌 ‘Bible as the book’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Q. 목사님은 오랫동안 목회활동을 하시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요.


A.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영을 ‘holy spirit’(성령)이라고 합니다. 나는 성령은 오래 참음의 열매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바로 오래 참음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불과 한 장에 걸쳐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요약하고 있지만 그 창조가 실제화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악령은 무엇일까요. 성령의 대위 개념이 바로 ‘evil spirit’(악령)입니다.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난다는 말은 그 사람이 바로 그때부터 악령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성서는 이 세상을 악령이 지배하는 곳으로 봅니다.


Q. 한국의 푸르메재단에 대한 느낌은 어땠나요.


A. 장애어린이를 돌보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장애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엄마들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엄마들은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엄마가 만약 먼저 죽으면 아이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걱정을 할 것입니다. 그런 복잡한 심경을 갖고도 엄마는 매일 아이를 돌볼 것입니다. 내가 만일, 나의 아들 딸이 같은 처지에 있다면 저렇게 열심히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없으니까요. 울고 싶은 사람과 함께 운다는 것은 살아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아이의 엄마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해야 됩니다. 입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할 것이 아니라 푸르메재단의 역할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새로운 도전이 아닐까 싶어요. 푸르메재단에서 돌보는 아이들 곁에 예수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와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푸르메재단 스태프들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푸르메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것은 내게 너무 큰 행복입니다.



▲ 노무라 목사는 “푸르메재단이란 좋은 친구를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며 재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했다.


Q. 목사님 외에 가족 중에 아들과 며느리가 장애인을 돕는 일에 종사한다고 들었습니다.


A. 아들 마코토가 복지사 일에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이바라키현의 한 정신과 클리닉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장애인들에게 직업재활교육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장애인시설, 노인요양원 등 사회복지시설로 실습을 많이 다녔습니다. 아들의 이런 점은 한국에서 나를 따라다니며 직접 본 한국 청계천 빈민활동 경험이 계기가 됐습니다. 아들은 앞으로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며느리 미나는 장애인 치과에서 치위생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입니다. 푸르메재단에서 지원하는 많은 장애어린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칫솔을 만들어 보낸 적이 있는데 며느리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며느리는 돈을 보내고 기부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에 직접 가서 장애어린이를 돕는 것이 좋다며 그동안 기쁜 마음으로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푸르메재단이 하는 일에 보탬이 되고 푸르메재단과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공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Q. 앞으로 푸르메재단이 발전하려면 무엇에 역점을 두어야 할까요.


A. 서번트(servant)라고 생각하고 초심을 잃지 마세요. 조직이 커지면 관리자는 무의식적으로 유혹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푸르메재단이 하는 일은 일본, 중국은 물론 아시아 어느 국가에도 없는 일입니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교회확장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좀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울에서, 푸르메재단에서 그런 모델을 만들어서 아시아전역에 전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푸르메가 ‘그린 마운틴’이란 의미 아닙니까. 나는 푸르메재단을 방문할 때마다 식물에 싹이 나고 새와 곤충이 날아드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곤 합니다.


*글/사진=김민용 홍보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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