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의인(八方義人)] 10억 기부자, 이철재 씨가 꿈꾸는 병원
이철재
1987년 17살의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난 이철재 씨는 2년 후 차량 전복사고를 당해 가슴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1년의 고된 치료와 재활을 거쳐 공부를 시작하였고, 미국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벤처 열풍이 거세던 90년대 초에 게임업체를 세웠고, 2000년 귀국 후 ‘쿼드디멘션스’(넥슨의 자회사)라는 회사를 2008년부터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꾸준히 기부해 왔으며 2012년 4월에는 건립기금 10억을, 같은 해 7월에는 장애어린이를 위한 2억원 상당의 그림(피터 오페임, 2011, 비행하는 강아지와 아기 조종사)을 기부하는 등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 2012년 7월 세종마을 푸르메센터 개원식/ 자신이 기부한 그림 앞에서 감사패를 받은 이철재씨
10억 기부자, 이철재 씨가 꿈꾸는 병원
2011년 11월의 어느 날 저녁, 이철재 씨가 재단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재단 관계자와의 짧은 면담을 요청했고, 회의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이내 자취를 감췄습니다.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 이렇게 조용히 10억의 기부가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처럼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의 꿈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돈이 있다고, 장애를 겪었다고 누구나 기부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뜻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 자신의 소망을 담아 정성을 보태게 되는 것이지요. 이철재 씨는 그의 10억이 제대로 된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의 단초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렇다면 기부자 이철재 씨가 꿈꾸는 병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전인적 재활(Holistic Rehabilitation)이 실현되는 곳
사고 당시, 이철재 씨의 나이는 19살이었습니다. 2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그에게 담당 의료팀은 냉정하게 선언했습니다. “당신은 평생 일어설 수도, 양팔을 사용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료팀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부정과 분노, 좌절이 교차했습니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후, 어렵게 장애를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계속 이렇게 방황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저의 상태와 의료현실을 받아들이니 뚜렷한 목표가 생기더군요. 신체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고, 이 상태에서 자립하는 것이 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목표를 정한 후로는 그것만 바라보며 재활에 매진했습니다. 차근차근 해나가니 시간이 걸릴 뿐 못할 일은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협력하여 저의 상태를 진단하고, 함께 재활목표를 설정했습니다. 현 상태에서 어떻게 일상생활을 해 나갈지, 어떤 운동을 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무엇을 하며 여가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1년 간 경험하며 훈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훈련이 반복되니 습관이 되었고, 몸에 배인 습관이 하나 둘 쌓여 지금의 제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의료 뿐 아니라 교육, 심리,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의 경험은 국내 현실과는 많이 다릅니다. 의사에 의해 환자의 상태가 확진되고, 그것을 근거로 단기간의 의료재활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환자 개인의 욕구를 반영한 재활 훈련을 지속적으로 제공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전인적 재활 없이 자립은 불가능하며 재활 여부에 따라 5년, 10년 후의 삶의 질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성장 중에 있는 어린이의 특성을 반영해 각 분야 전문가가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그에 따른 전인적 재활훈련이 이루어지는 것,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이 놓쳐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지속적인 관리와 지원이 이루어지는 곳
한국과 미국의 재활병원을 경험한 그는 병원의 건립 이후를 고민했습니다.
“재활병원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건립 후에도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어진 건물만을 재산이라 여겨 건물 올리는 일에만 힘을 쏟고, 추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병원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국내 병원의 경우, 건축에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몇 년 후에는 다시 재공사에 들어가지요. 왜 그렇게 자꾸 세우고 부수는지, 100년이 넘는 건물도 잘 관리하여 장기간 사용하는 외국 병원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는 의료장비의 관리와 투자의 중요성도 언급했습니다.
“건물에 신경 쓰는 만큼 의료기기의 관리와 투자에도 신경 쓰는지 의문입니다. 국내 재활병원의 경우, 초기에 구입한 의료기기를 제때 바꾸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최첨단 기계가 보급되어도 재활병원은 의료장비에 투자하지 않아 기기의 상당수는 구식이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환자의 재활이 최우선이라면 가장 중요한 의료기기의 기본적인 관리와 투자에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멋진 건물이 세워져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최고의 의료 기술을 통해 환자를 최상의 단계로 회복시켜야 하는 재활분야에서 한참이나 지난 의료기기를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는 국내 재활병원의 현실, 다시 한 번 짚어봐야 하겠습니다.
▲ 2011년 9월 세종마을 푸르메센터 착공식/ 감사패를 받은 이철재씨
의료현장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곳
긴 시간 재단과 함께 해 온 이철재 씨는 사업가로서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푸르메병원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도전하는 벤처와 같습니다.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없던 틈새를 발견하고,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푸르메병원이 의료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현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고유의 색깔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투자 대비 효과를 정확히 산출하고, 미래에 예상되는 적자도 면밀히 분석하여 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함께 뜻을 나눌 기부자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2015년에 완공될 푸르메병원은 제가 미국에서 경험한 병원처럼 제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의료 재활을 넘어 전인적 재활이 실현되는 병원
지속적인 관리와 지원을 통해 제대로 기능하는 병원
고유의 색깔을 가지고, 의료현장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병원
2015년 완공될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이 추구해야 할 모습입니다.
이철재 씨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재단으로 돌아오는 길에 푸르메센터에서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13살 진호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8살 때 사고로 척추를 다친 진호는 재활의 시기를 놓쳐 현재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진호가 제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면 지금과 조금은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잠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진호가 오늘은 무엇을 하며 놀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질지 마음껏 꿈꿀 수 있는 그날을 상상해봅니다. 더 이상 진호의 슬픈 이야기가 계속되지 않도록 푸르메재단은 병원이 건립되는 그 날까지 힘차게 달려 나가겠습니다. 이철재 씨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그 길에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글= 백해림 후원사업팀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