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레벤스힐페 작업장
삶의 모양을 선택하는 자유
▲ 개성이 넘치는 작품들이 장애인의 손으로 생산, 판매되는 공간,
레벤스아트에서 비장애인 조력자와 장애인이 밝게 웃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지적장애인들의 직업을 손꼽아보면 말 그대로 손에 꼽힌다. 보호작업장의 작업 종류를 생각해보면 더하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다양한 재능이 있고 다양한 선호가 있을 텐데 말이다. 단지 장애로 인해 해낼 수 있는 일의 종류가 한정적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어렵지 않은가. 요즘은 보호작업장에서도 차별성 있는 작업내용들을 개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바라는 대로 만들어지는 장애인 작업장
답을 찾아 간 곳은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나라 오스트리아의 한 단체. '삶의 도움'을 의미하는 '레벤스힐페(Lebenshilfe)'는 1967년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가 모여 설립했다. 단지 일자리를 가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일을 통해 삶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레벤스힐페의 모든 기관은 장애인과 가족의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하여 서비스를 결정한다. 운영책임자 코넬리아 비켈(Cornelia Bickel) 씨는 "장애인을 돌볼 책임은 가족이 아니라 국가와 이웃에 있다"며 부모의 돌봄과 같은 사려 깊은 사회의 배려를 강조했다.
레벤스힐페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장애인이 찾아오면 짧게는 2주간의 시간을 가진다. 일하기로 결정하지 않은 채로 레벤스힐페의 11종류의 작업장의 다양한 작업들을 둘러보고 경험해본다. 일종의 상호 면접이다. 장애인은 레벤스힐페의 각 작업장을 선택하고, 사회복지사는 장애인의 능력과 관심을 살펴 적합한 작업장을 찾는다. 적합한 작업 내용을 가진 작업장이 없다면 만들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업장과 작업내용이 결정되면 계약을 통해 레벤스힐페의 직원이 되어 서비스를 받는다. 목공, 농장운영, 레스토랑에서 공예품 생산, 아틀리에까지 11종류의 작업장 중에서 목적과 작업내용이 서로 다른 3가지 종류의 작업장에 방문해보았다.
마음을 치료하는 일터 '레벤스힐페 전문작업장(Lebenshilfe Vorarlberg)'
첫 번째로 찾은 곳은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레벤스힐페 전문작업장이다. 고택을 개조하여 만든 따듯한 느낌의 3층 건물에 아기자기한 배치가 인상적인 이곳에는 26명의 장애인들과 9명의 비장애인 협력자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주로 생산하는 것은 종이공예 인형이다. 종이를 개어 모양을 잡고 건조해서 채색하고 또다시 건조하여 완성되기까지 2주일 이상이 걸린다. 장애인들은 종이를 물에 넣고 불려 손으로 개어 찰흙처럼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주물러서 인형의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물에 불린 종이를 만지는 촉감을 좋아하는 사람과 양털을 꼬아 실 형태로 만드는 반복적인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업이다. 모든 것이 판매를 위한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치료의 과정에 더 가까워보였다. 일을 하다가 휴식이 필요하면 별도의 공간에서 얼마든지 쉴 수도 있다.
이렇게 1년 동안 만들어낼 수 있는 종이인형은 150개 남짓. 양초나 테이블보 등 이 작업장에서 생산하는 모든 물품을 통틀어 매년 6~700개 밖에 되지 않는다. 운영을 위한 충분한 수익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생산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의 직업을 위해 작업장 운영에 필요한 비용의 70%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 교육과 보호를 동시에 제공하는 레벤스힐페 ▲ 레벤스힐페에서 종이공예로 만들어진 상품들.
전문작업장의 한 장애인이 양털로 만든 자신의 종이를 개어 모양을 잡고 건조, 채색하기까지
작업물을 자랑하는 모습. 이 양털을 엮어서 2주일이 걸리는 과정은 생산활동이자 일종의
테이블보와 인형 등으로 만든다. 테라피라 할만하다.
개성있는 작업을 위한 협력, 레벤스 아트 (Lebens-art)▲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제작된 작품들.
사진 속의 모든 작품은 장애인의 주도와 봉사자의 도움으로 완성되어 장애인에 의해 판매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번화가로 자리를 옮겼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위치한 레벤스 아트는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장애인의 창의성이 반영된 개성 있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안쪽에서는 몇 명의 장애인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전문자원봉사자 클레어(Clair) 씨는 "모든 작품은 장애인이 만드는 것이고 나는 도울 뿐"이라며 본인을 '조력자'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모든 작품들은 장애인들의 낙서나 그림, 종이를 오려 붙이거나 색칠하는 활동들을 응용해서 만들어졌다. 이런 단순하고 반복적인 활동에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상품으로 개발해 내는 것이 클레어 씨의 역할이다. 전문자원봉사자가 있기에 끊임없이 매듭을 만드는 자폐성장애인도 이곳에서는 어엿한 직원이다. 털실 매듭에 나무를 깎아 만든 몸을 더해 양 인형을 만드는 것처럼, 창의력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이 레벤스 아트의 특징이다.
▲ 전문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 ▲ 장애인의 반복적인 활동에 아이디어를
생산된 제품은 장애인이 직접 판매한다. 불어넣어 만든 양 인형
이런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1964년 제정된 장애인노동에관한법, 2008년 비준한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UN협약을 충실히 따른 정부의 지원이다. 이에 따라 운영에 대한 지원 뿐 아니라 봉사자들과 기부자들, 기업의 기부를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되어있다. 장애 청소년의 직업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4년간의 직업학교 교육, 전체 기관예산의 70%이상을 정부와 시에서 지원하는 탄탄한 운영 보조. 세금평가에 기부 내용이 반영되어 특히 장기기부자에게 이득을 주는 체계, 기부자와 장애인 작업장 생산품 소비자에게 주는 소득공제 혜택 등이다.
클레어 씨도 이런 제도를 통해 전문자원봉사자에게 주어지는 급여를 보조받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제도들이 있기에 작업장은 고품질의 작업물을 생산할 수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기부자와 소비자는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사람이 사람을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레벤스힐페의 기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치유와 생산의 장, 선나호프 (Sunna Hof)
▲ 농장을 일구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선나호프 전경.
장애인들의 생활과 학습의 장이자 유기농 제품 생산의 작업장이다.
작은 집들이 길을 따라 들어서있는 산길을 십여 분 달려 도착한 곳은 선나호프이다. 산자락 아래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선나호프는 학습과 일, 생활, 레저를 동시에 제공하는 공간이다. 소, 양, 돼지를 키워 유제품이나 고기를 생산하고, 채소나 꽃을 재배하기도 한다. 선나호프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는 식사를 하는 장애인들과 지역주민으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지역주민들은 질 좋은 먹거리를 구입해갔다.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은 "몸에 좋은 유기농 먹거리를 얻을 수 있어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와인과 식초, 과일 잼을 구입했다. 선나호프 상표를 단 제품들은 이 레스토랑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팔려나간다. 정성스럽게 생산해낸 유기농 제품의 가치가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판매 수익은 선나호프 운영에 충분하다.
▲ 나뭇잎을 이용해 공예품을 만들고 ▲ 돼지를 키우는 농장은 치유와 생산의 장이다
있는 모습
유기농 제품은 장애인의 학습과 일, 생활을 위한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소, 양, 돼지, 채소를 키우는 일들은 학습이자 치료, 놀이이자 작업이 된다. 동물의 털을 쓰다듬고 빗기는 작업, 우리를 청소하는 작업, 풀을 모아 사료와 함께 먹이를 주는 작업, 정성스레 꽃과 채소를 살피고 물을 주는 작업 등 모든 작업과정의 수는 이곳에 고용된 장애인의 수와 같다. 장애인의 관심사에 따라 일은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넘어 행복한 삶을 위해
위에서 둘러본 3가지의 작업장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에서 운영되는 60개의 시설은 일자리마련과 주거지 제공, 직업교육, 레저공간 제공, 가족 관련 정보제공 및 정보에 이르기까지 장애인과 가족에게 전반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이들 레벤스힐페 기관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가치가 있다. 장애인이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 행복의 조건은 최저생활비 이상의 소득이나 주거 마련과 같은 객관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 장애인 본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주관적인 부분까지 포함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중심의 서비스를 위해 50년 이상 이어져오고 있는 레벤스힐페의 가치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배려
같은 얼음 틀에 얼려진 얼음처럼 비슷한 모양의 삶을 사는 지적장애인들의 삶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같게 만드는 기제가 무엇인지. 교육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서비스 제공의 편의를 위해 같은 틀에 개성을 몰아넣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삶이 행복하고 풍성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국가와 개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레벤스힐페가 말하고자하는 레벤스힐페 (Lebenshilfe, 삶의 도움) 아닐까.
[오스트리아 레벤스힐페 다양한 작업장의 더 많은 사진 보기]
*글/사진 = 이예경 기획홍보팀 간사
Lebenshilfe Vorarlberg
주 소 : Gartenstrasse 2, 6840 Götzis, Austria
홈페이지: www.lebenshilfe-vorarlberg.at
이메일 : lebenshilfe@lhv.or.at
전 화 : 05523/53 2 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