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지막 유머

[박완서/ 소설가]



 어머니는 90 장수를 누리셨지만 한번도 망령된 말씀이나 이상한 행동을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10여 년 전, 눈 위에 미끄러져 많이 다치신 적이 있다. 대퇴부가 크게 부서져서 두 번의 대수술 끝에 겨우 걸으실 수 있게 되었지만 한쪽 다리가 짧아져서 심하게 절룩거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집안에서는 틈만 나면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마당으로 왔다 갔다 걸음연습에 힘쓰셨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날까지 화장실 출입과 목욕은 혼자 하실 수 있었다. 의식을 놓고 혼수상태에 빠진 건 사나흘밖에 안됐는데 그동안에도 간간히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뜨시면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내가 누구냐고 묻는 문병객이나 식구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여주셨다. 그런 어머니가 딱 한 번 이상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마 돌아가시기 하루 전쯤이었을 것이다. 우린 솔직히 이제나저제나 그분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완서 작가님


번쩍 눈을 뜨시더니 상체를 일으킬 듯이 고개를 드시고는, 당신의 발치를 손가락질하시면서 희미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호뱅이, 네가 왠일이냐?’ 하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가 반기듯이 바라보시는 발치엔 물론 아무도 없었다. 나는 헛것을 보는 엄마의 상체를 다두거리며 ‘엄마는, 호뱅이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하려고 했지만 웃음 먼저 복받쳤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조카들이 호뱅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예전에 시골집에 있던 머슴이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그 머슴 좋아했나?라고 이죽대면서 역시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다들 따라 웃었다. 엄숙하고 침통해야 할 임종 자리가 잠깐 웃음판이 되었다. 호뱅이라는 이름도 좀 코믹한데 어머니가 마지막 본 헛것이 호뱅이라니, 너무 엉뚱해 웃음 밖에 나올 게 없었다. 쉽게 헛것을 볼 것 같지 않은 명증한 분의 임종의 자리에 나타난 헛것이라면, 그분의 마음속에 애정이건 증오건 간에 맺혀있던 사람이어야 마땅하니까, 손자의 상상력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호뱅이를 아는 나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기운은 장사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삼촌들도 대처에 나가 있어 남자 일손이 달리는 집이어서 아마 호뱅이를 제일 많이 썼을 것이다. 나도 예사롭게 그를 호뱅이라고 부르다가 삼촌보다 더 나이 들어 뵈는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문득 미안해진 건 아마 서울서 학교를 다니게 된 후였을 것이다. 방학 때만 보게 되는 스스러움과 학교 다니면서 익히게 된 예절 교육 덕으로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불편해였다. 그러나 상하 위계질서 따지기 좋아하고, 호칭에 까다로운 우리 집 어른들도 호뱅이는 장가를 못 갔으니까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어른 취급을 안 해주는 당시의 풍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십여 호가 두 가지 성(姓)으로 구성된 씨족 마을에서 호뱅이는 어떤 성에도 소속이 안 되는 이방인이었다. 따라서 누구 형이라든가 누구 아저씨라는 식으로 바꿔 부를 만한 인척간의 호칭도 그에게는 해당이 안 됐던 것이다. 호뱅이가 우리 집 머슴이라고 했지만 실은 우리 마을의 머슴이었다. 그는 이십여 호 밖에 안 되는 작은 우리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고개 및 외딴 집에서 늙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마을 앞 넓은 벌은 이십여 호를 먹여 살리는 농지였고, 땅을 많이 가진 집도 있고 적게 가진 집도 있었지만, 큰 지주도 소작동도 없는 다들 그만그만한 자작농들이었다. 호뱅이네만 땅한 뙤기 없었기 때문에 기운이 센 호뱅이가 품을 팔아서 노모를 부양했다. 시골선 아무리 늙은이라도 쉴 새가 없는데 그 노인네만은 늘 장죽이나 물고 오락가락했다. 병신 자식 둔 사람이 더 효도 받는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로 봐서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그를 호뱅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걸로 봐서나 약간은 모자라지 않았나 싶다.


우리 집에서 호뱅이를 제일 요긴하게 쓸 적은 엄마하고 내가 시골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올 때였다. 서울서 힘들게 사는 우리를 위해 할머니는 뭐든지 싸주고 싶어 했고, 엄마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오고 싶어 했다. 쌀을 비롯한 올망졸망한 잡곡, 무, 배추, 감자, 옥수수 따 따위 지게에 높다랗게 지고 앞서가는 호뱅이의 정강이는 구리 기둥처럼 단단했지만 얼굴 표정은 너무 착해서 모자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의 노모가 마을 사람들에게 애걸복걸 중신을 부탁해서 장가도 몇 번 안 가본 건 아닌데, 여자들이 하나같이 열흘을 못 살고 도망쳤다는 소문이고 보니 똑똑해 보일 리가 없었다.


한번은 내일이 개학날이어서 오늘 안 돌아갈 수가 없는데 장대비가 계속돼서 개성 역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냇물다리가 떠내려간 적이 있다. 다리만 떠내려간 게 아니라 냇물이 사나운 강물처럼 황토 빛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울먹울먹했다. 호뱅이는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고 짐을 먼저 강 건너에다 내려놓고 되돌아와 나를 지게 위에 올라 앉혔다. 그가 지게 작대기로 얕은 데를 골라가며 탁류를 헤치는 걸 지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느낀, 노한 자연에 대한 공포감과 우직하고 강건한 남자를 미더워하던 마음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딸을 태운 지게 뒤를 따라 호뱅이만 믿고 강을 건너던 엄마의 마음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는 60여 년 전 엄마의 임종 당시로부터 계산해도 50여 년 전 일이다.


철없이 한바탕 웃고 나서 이내 숙연해졌다.



▲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박완서 작가님


어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저승길 가기가 아마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때 홀연 호뱅이가 떡판처럼 든든한 등을 빌려주기 위해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착한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는 미카엘 천사처럼. 호뱅이한테 업혀서라면 어머니를 안심하고 떠나보내도 될 것 같았다. 호뱅이가 하늘나라 주민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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