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져서 더 소중한 것

박연신


요즈음 부쩍 사랑 얘기를 많이 했다. 남편과 사별한 친구가 사랑 얘기를 자주 꺼내기 때문이다. 평소 사랑부재론자인 나는 마침 상대가 남자가 아니고 여성이니까 능구렁이 탈을 벗어 던지고 바짝 붙어 앉아 진지하게 그 문제를 풀어 보았지만 ‘사랑은 없다’로 내 사랑론 막은 내려졌다. 나도 사랑의 전율과 쾌감과 격정과 고뇌까지 다 잘 알고 있고 객관적으로 인정도 한다.



<열린지평> 편집장


한땐 모지리아니와 그 애인이 나눈, 보들레르와 쟌느 듀발의 불꽃 같은 열애가 부러워 찾아나서 보기도 했지만 허탕만 치고 말았기에 그만 지쳐버린 탄식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도 재혼한 어머니 때문에 여성 저주병에 걸린 사람이다. 그리고 결혼생활 그 자체를 비극적인 것으로 단정지었다. 사랑은 너무 어렵다는 나와 비슷한 연애관으로 끝내 독신의 삶을 산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예 남성 기피증의 독신주의자이거나 이웃 사랑조차 모르는 냉혈동물은 아니다. 건강한 시민으로 더불어 살려고 여기저기 돌아보고 구석구석 살피기도 하는 인간적인 배려심은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사랑론이 나오면 머리털이 곤두서고 전신이 바짝 조여 온다. 내 사랑론의 핵심은 ‘사랑은 무조건, 목숨도 아깝지 않아야 한다’는 순수, 열정의 불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한데 건강, 키, 성격, 환경, 학벌, 직업까지 다 따져 보고 나서 애인 삼고 배우자 삼는 오늘의 사랑이라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어서 이런 것이 이 시대의 사랑이라면 나는 아예 자격도 없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백합같이 순결하든지 눈송이같이 하얀 색이어야 하니까. 하얗고 하얗고 하얘서 눈부신 결정, 그것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숨결이 있다. 이 숨결은 인생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사람의 생명을 지켜 주는 날숨 들숨, 바로 그 경건함과 일치한다. 만남과 헤어짐, 탄생과 죽음을 소홀히 하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못 만나서 못 태운 사랑의 불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소유하고 즐기고 증발시키는 쾌감과 흥분의 도가니, 그 불가마 속에서 감정에 도취되어 못 가져서 더 소중한 것을 가슴 속에 묻어 두었다가 하얀 재로 남는 허무 바라보며 이럴 수도 있다고 긴 여운으로 남는 사랑을 아끼고 싶다.

박연신 에세이 “홀로 사막을 걷다”에 실린 글입니다.



박연신


전주여고,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골동품>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98년 한국시조시인협의회상, 2001년 전라시조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글을 통해 장애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계간지 <열린지평>을 1993년 창간해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조집 <산목련 이야기>, <비가>, <목련꽃으로 피어나고 싶었다>,  수필집으로 <감꽃 목걸이>, <홀로 사막을 걷다>가 있습니다.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