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미소원정대 이야기 ③-‘인술(仁術)의 나눔’

‘오복(五福)의 기쁨’ 맛본 히말라야 사람들


- 2009 푸르메재단 네팔 미소원정대 이야기 ③ -


▲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치과 진료봉사에서 치과의사인 전형복 대원이 현지주민의 치아상태를 살피고 있다.


“헉, 헉…….”

트래킹 내내 고소증세에 시달렸던 거구의 이동준 미소원정대 진료팀장(41·푸르메나눔치과 부원장)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만큼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산소 부족으로 숙소 한 층 올라가는 일도 힘이 드는 상황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200m 거리의 가파른 계단을 뛰어오르다시피 걸어 문이 닫힌 치과 앞에 도착했다.


남체에 있는 유일한 치과인 이곳은 미소원정대가 머물고 있는 로지 주인 벰바의 누나인 치과의사가 운영하는 곳. 그는 월동을 위해 겨울 두 달 동안 치과 문을 닫고 카트만두에 내려가 있다. 나중에 비용을 치르기로 하고 벰바의 허락 하에 마취제를 구하러 온 것이다. 동생인 벰바도 열쇠가 없다. 문을 뜯었다. 치과 안을 허겁지겁 뒤지기 시작한다.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구석구석 살피던 이 팀장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말했다.


“여기 있다!”


마취제 앰플 50개들이 두 상자를 품고 숙소로 내려오며 이동준 원장은 가슴을 쓸었다. 그리고 무릎 통증과 함께 극심한 피로가 찾아왔다. 하지만 한겨울이면 병원이 없어지는 곳에서, 그나마 치과가 있어도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한 없이 따듯해졌다.


“사가르마타의 신(神)이 미소원정대를 보우하사……”

▲ 남체 바자르의 헬기장(3,700m)에서 바라본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의 모습. 짙은 안개에 정상까지 볼 수는 없었다.


2009년 1월 25일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우리가 그토록 오랜 동안 준비해왔던 치과 의료봉사의 날이다. 진료시작에 앞서 네팔 미소원정대는 히말라야의 신에게 감사와 경외의 인사를 올렸다. 숙소에서 30분 더 걸어 올라가야 하는 남체의 헬기장에서 우리는 마침내 사가르마타(Sagarmatha·에베레스트의 네팔 이름)와 만났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고산준봉 사이로 저 멀리 그 산이 보였다. 안개에 가려 정상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신비로움은 한층 더 했다. 무사히 이곳까지 올라와 봉사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고마웠다.

엄홍길 대장은 회한에 젖었다. 산세를 어루만지듯 짚어가면서 하나하나 산 이름을 불러주었다. 3000m 빙벽을 수직으로 오르고, 절벽에 매달려 칼잠을 자며 겪었던 삶과 죽음의 고비들을 담담히 풀어내며 자연의 위대함 앞에 한없이 겸손해질 것을 우리에게 당부했다. 대원들은 처음 만나는 ‘세계의 지붕 꼭대기’를 멀리서나마 바라보며 네팔과의 인연이 각자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고봉들을 일일이 가리켜가며 그곳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대원들은 서둘러 내려와 아침을 먹고 맡은 역할에 대한 짧은 교육을 받았다. 그 사이 환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을 통해 한달 전부터 홍보를 해두었지만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올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치과 의료봉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환자들은 진료소에 들어오자마자 칫솔질 교육을 받는다. 그 뒤에 의사의 진단을 받고 차트가 작성되면 담당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는다. 1층 로비는 칫솔질 교육과 진단업무를, 지하1층 도미토리는 침상 2개를 가진 진료실로 운영된다.


한국에서 가져온 이동식 치과치료 기구는 석도준 대원(36·치과의사)이 맡아 주로 충치치료를 진행했다. 이동준 진료팀장은 이를 뽑는 치료를 담당했다. 석도준의 아내이자 치과의사인 전형복 대원(36)은 진료실 운영을 총괄했고, 이금숙 대원(34·전남대 치대 교수)은 환자들의 상태를 살펴 담당의사를 지정하는 진단업무를 맡았다.


셰르파어→네팔어→영어→한국어…‘3중 통역’하며 진료


진료실 침상 하나에 자원봉사자 세 명이 붙었다. 치료도구 공급과 소독에 네 명이 배치되었다. 진단을 받은 환자 안내와 치료를 마친 환자에게 약을 나눠주는 역할도 주어졌다. 통역에는 봉사자는 물론 가이드와 현지주민까지 동원됐다.


한국어에 능통한 가이드 두루바(39)는 두 침상 사이를 뛰어다니며 통역을 했고, 영어는 물론 네팔어와 셰르파어가 가능한 파상(43)은 칫솔질 교육을 도맡다시피 했다. 때로는 셰르파어-네팔어-영어-한국어로 이어지는 ‘3중 통역’이 필요하기도 했다.


▲ 환자들은 로지의 복도에서 대기하다가(왼쪽) 순서대로 들어와 칫솔질 교육을 받았다.(오른쪽)


오전 11시. 그때까지 진료를 마치고 약을 받아간 환자수를 세어보니 불과 10명 남짓이었다. 실망했다. 당초 목표는 환자 200명이었다. 잘 안 돼도 최소한 100명의 환자는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낮이 다 됐는데 고작 10명이라니. 역시 첫 행사라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상황이 바뀌었다. 진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대기표를 받아두었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온 환자들로 로지 입구 대기실이 크게 붐볐다. 로지 전체가 하나의 치과병원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환자가 밀려들면서 아래층 진료실에 있던 전형복 대원이 1층으로 올라와 이금숙 대원과 함께 환자를 진단했다.


▲ 칫솔질 교육을 마친 환자들은 통역의 도움으로 진단을 받은 뒤 진료실로 이동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았다.




진료실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지휘관인 의사의 지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원들은 오전까지 익숙지 않았던 치과 전문용어들도 입에 붙었다. 1층에서 환자를 안내하던 사람은 진료실에서 치과의사와 일반대원 사이에 오가는 말의 반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5학년 올라가는 어린 대원들이 발치 침상이 빈 것을 안타까워하고, 외국어로 된 약품 이름을 줄줄 대가며 수량을 파악했다.


가족 대하듯 환자 돌보는 ‘천사’대원들


대원들의 봉사활동은 헌신적인 수준을 넘어 아름다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대원들은 생면부지의 환자가 입안에 고인 피를 헹궈낸 물을 몇 컵씩 받아냈다. 흐르는 침도 정성껏 닦아주었다. 불안에 떠는 환자들은 손을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어두운 실내에서 종일토록 랜턴으로 환자의 입안을 비추느라 진땀을 흘렸고, 이를 뽑지 않겠다고 버티는 주민을 설득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정말 웬만한 경력의 치위생사들보다 오늘 자원봉사자들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키지 않은 일이라도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알아서 합니다. 정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분들이 이렇게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놀랍습니다.”


손이 마비될 정도로 환자를 봤다는 이동준 원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원들을 칭찬했다. 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똘똘 뭉친 자원봉사자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비좁은 로지의 홀을 대기실 삼아 칫솔질 교육과 진단이 진행되고 있다.(위) 발치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엄홍길 대장과 진료를 마친 환자들.(아래)


오후 들어 더 많은 환자들이 몰렸다. 하루 이틀 걸어서 온 고산 마을 주민들이 상당수였다. 멀리 중국 티벳에서 4일을 걸어 온 할머니 환자도 있었다. 남체 바자르에서 장이 열리는 토요일에 도착해서 하루를 기다린 사람들이다. 대기표를 나눠주며 환자들을 통제했던 황철호 대원(48·대한항공 기장)과 임병웅 대원(57)은 인근 주민들로부터 이들을 따로 불러 모아 줄을 세웠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공평합니다. 이 분들은 다시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먼저 진료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치아상태가 절망적입니다!”


가볍게 항의하던 주민들도 ‘이 분들은 빨리 진료를 받지 않으면 무서운 짐승이 우글거리는 어두운 산길을 가야한다’는 황 대원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셰르파 파상은 정말 멀리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이 맞는지 ‘검증’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네팔 사람들, 특히 히말라야 고산지대 주민들의 치아건강 상태는 예상했던 대로 매우 심각했다. 고등학교 이상 정규교육을 받았거나 포터 등의 직업활동을 통해 외부 문물에 익숙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방치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음식을 이로 잘 씹어야 영양섭취가 원활하다. 씹는 운동은 삶을 유지하는 기본 동작이다. 히말라야 사람들의 치아상태를 보면 그들이 처한 건강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60대 노인인 줄 알고 치료를 했다가 나중에 차트를 보고 30대 중반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동준 진료팀장은 “서울에 있는 푸르메나눔치과를 찾아오는 장애인 환자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치아를 모두 빼내야 할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음 기회에는 아예 틀니를 해줄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 대기표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환자들(왼쪽). 진료지원을 맡은 김계희 대원은 네팔어를 한글로 팔에 적어두고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오른쪽)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 대기실이 차츰 한산해졌다. 서울에서 봉사를 준비하며 현지 소식통과 수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세웠던 계획이 대략 들어맞아갔다. 대원들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진료활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사실 서너 걸음 옮기다가 주저앉아 쉴 정도로 지쳐갔다.하루 종일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진료활동을 벌인 치과의사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대원들, 원활한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대원들과 현지인들……. 대기표에 적힌 숫자가 200번을 넘어가고, 차트가 모자라 손으로 급히 써야 했고, 재단 직원들은 밤늦도록 진료를 계속 할지 하루 더 진료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대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실 줄 몰랐다.


나눔과 성취의 기쁨에 울먹이는 대원들


오후 6시 마지막 환자를 돌려보내고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칫솔질 교육횟수가 무려 273건을 기록했다. 로지를 찾아 대기표를 받은 모든 주민들에게 칫솔질 교육을 했다. 이 가운데 아래 진료실로 내려가 발치 또는 충치치료 등을 받은 사람이 162명이나 되었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던 이국 오지에서의 봉사활동, 산소가 부족한 1박2일의 먼지길을 걸어, 그것도 태어나 처음 해보는 낯선 일을 우리는 해낸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을 합치고 뜻을 모아 마치 한 몸이 된 듯 일을 해낸 우리 자신이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이번 봉사를 통해 처음 만난 동료들의 얼굴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슴 속 저 밑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 봉사를 마친 대원들이 진료실을 정리하기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원들은 허우적거리는 다리, 잘 펴지지 않는 허리에 ‘아이고’를 연발하면서 겨우 진료실을 원상복구하고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았다. 함께 일한 동료들이 자랑스러웠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 표현의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들 ‘나눔’의 참뜻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촌의 이웃들을 위해 나의 시간과 체력, 재능을 나누었다는 사실, 그리고 ‘제대로’ 나누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최태섭 대원(55)은 “이번 봉사를 통해 나눔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면서 “여러분이 자랑스럽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 최태섭·전귀영 부부 대원과 임병웅 대원, 그리고 초등학생 대원들이 봉사를 마친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곁에 앉은 동료대원들의 손을 밤 늦도록 놓지 않았다. 어렵사리 비행기를 타고, 헐떡이며 고산지대를 이동해 목표로 했던 봉사활동을 해낸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담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섣달 그믐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계속)


글 = 정태영 푸르메재단 팀장


/ 사진 = 김성재 푸르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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