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태어나다

뒤늦게 의학과는 거리가 먼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다시 대학 캠퍼스를 밟게 되었다. 강의를 하려고 드나들던 때와는 또 다른 감회가 나를 사로잡았다. 말 그대로 풋풋하고 싱그러운 젊은 친구들과 차도 마시고 밥도 먹으면서 나 역시 아주 조금은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학교 가는 길도 좋았다. 청담동에 있는 병원에서 나와 명륜동에 있는 학교까지 가려면 삼청동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 길의 풍경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양창순

양창순신경정신과

대인관계클리닉 원장


여름을 거쳐 가을이 왔다가 가고 겨울이 이어지는 동안 계절은 서로 품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길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분명히 봄은 여름을, 여름은 가을을, 가을은 겨울을 품으면서 조금씩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간다. 가장 애틋하기는 겨울이 봄을 품고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어느 해인가, 2월의 어느 겨울날, 나는 한적한 교외를 달리고 있었다. 2월이라곤 해도 추위는 여전해서 이른 아침의 길과 들판에는 서리가 하얗게 덮여 있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고 햇살이 퍼지면서 이번에는 축축한 기운이 대기에 가득 찼다. 그때였다. 문득 나도 모르게 목이 막히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게 뭐지? 하는 순간 난 깨달았다. 나는 들판의 겨울 풍경 속에서 문득 봄의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그건 너무도 미미해서 가냘프기 짝이 없었지만, 분명히 그 겨울 들판은 땅속 어딘가에서 아주 조금씩 봄의 기운을 퍼 올리는 중이었다.


꽝꽝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지가 그 깊은 곳에 봄의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 애잔함에 눈물짓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 기운의 애잔함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그때, 나는 우리의 삶도 그와 같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우린 흔히 말한다. 겨울 뒤에는 어김없이 봄이 오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지금은 겨울의 삭풍이 불어도 봄이 머지않았으니 희망을 품고 인내하면서 봄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나 그 말은 흔한 만큼 낡고 상투적이기도 하여서 웬만해서는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 2월의 아침은 달랐다. 나는 정말이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말의 진정성을 느꼈고 그리고 감동했다. 진심으로 깨달았기 때문일까, 난 그 뒤로 삶의 힘든 굽이를 지날 때마다 그때의 느낌을 떠올렸고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역시 삶의 겨울을 만나 힘들어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의 환자들에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일단 포기하진 말자고, 우리의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이상 희망을 품고 끝까지 가보자고.


나의 환자 중에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오랫동안 고통을 받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때의 일로 말미암아 트라우마가 생긴 이래로 그녀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대단했다. 자기가 당한 만큼 언젠가는 반드시 돌려주고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와 같은 분노 때문에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상대방이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곧바로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거나 정색을 하고 마구 야단을 쳤다. 그러니 주변에 그녀를 가까이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한번 분노가 폭발하면 제어를 하지 못했다. 그런 날은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집안의 물건을 다 내던지고 부수고 하면서 어머니한테까지 폭력을 휘둘렀다.


소소한 스트레스는 먹는 것으로 풀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비만해져서 그것 역시 부모의 큰 걱정거리였다. 부모는 딸을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성격적 문제가 심하고, 치료진에 대한 불신과 분노 때문에, 치료 관계를 형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그대로 주저앉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끔찍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딸의 행동을 참아내며 방법을 수소문하곤 했다.


여전히 공격성을 표출하면서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선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어머니의 간절함을 아는지라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환자 역시 조금씩이지만 태도가 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비로소 자기 안에 굉장한 분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분노 탓에 자신이 그토록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도.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상담을 한 결과였다. 그러자 비로소 그녀는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학생과 어머니가 우리 병원에 오게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나로선 몹시 마음 아픈 얘기였다. 환자와 어머니에게 이번에는 정말 굳게 마음을 먹고 다시 한 번 치료를 받도록 하자고 권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이제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있던 어머니는 내 말에 조금은 희망을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어릴 때 겪은 일은 분명히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몸이 더럽다고 느껴서 자기 파괴적인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건 더 큰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일에서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살아가면서 강도를 만나거나 교통사고를 당한다고 해서 우린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진 않는다. 그녀가 어릴 때 겪은 비극은 물론 강도나 교통사고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엔 그녀의 정신에 너무 큰 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함몰되어서 인생을 허비하고 파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무 마음 아프고 비극적인 손실이 아닌가.


나는 그녀에게 그 점을 이해시켜 나갔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할 시점에 와 있었다. 그녀에게는 몇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우선,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몸이 더러워졌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폭식증에 시달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녀가 비참한 분노에 떨며 자주 상상하듯이 범인을 찾아내서 복수하는 길도 있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포자기해서 서서히 몸과 마음을 파괴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 난 단지 운이 나빠서 사고를 당한 것뿐이야. 이제 난 그 사고에서 치료되었고,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아가는 일만 남았어.” 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 네 가지 길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물론 자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히 과거를 잊고 새로 출발하는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다 함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끝에 얻어 낸 값진 결과였다.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폰티지아의 소설에 <두 번 태어나다>라는 작품이 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부모가 아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제목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 나온다. 한 여의사가 부모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이런 아이들은 세상에 두 번 태어납니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첫 번째 출생을 꽤 어렵게 만든 하나의 세계에서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바를 우선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 출생은 두 분께 달렸습니다. 두 분이 아이에게 무엇을 주느냐에 달린 것이죠. 그 아이들은 두 번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걷는 길은 온통 돌투성이일 거예요. 그러나 결국 그런 과정을 통해 두 분도 또 한 번 새로 탄생하시게 될 겁니다. 적어도 그렇다는 게 제 경험입니다.”


실제로 부모는 장애가 있어도 진지하고 의연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나가며 다시 한 번 태어난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역시 아무리 힘든 삶의 고비를 만난다 해도, 오히려 그것을 딛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식의 ‘두 번 태어나기’를 경험할 때 우린 비로소 진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푸르메재단에서 엮은 <네가 있어 다행이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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