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우 씨] 꿈을 이루라는 게 아냐! 꾸기라도 해봐!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꿈을 이루라는 게 아냐! 꾸기라도 해봐!
(19)국내 최초 시각장애 일반초등학교 교사 송광우
» 국내 최초 시각장애1급 일반초등학교 교사 송광우 선생님. (사진=김윤섭/국가인권위원회)
“꿈? 그게 어떻게 네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그건 별이지, 하늘에 떠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하는, 쳐다만 봐야 하는 별. 지금 누가 황당무계 별나라 이야기하재? 네가 뭔가를 해야 될 거 아니야! 조금이라도 부딪히고, 깡을
쓰고, 하다못해 계획이라도 세워봐야 거기에 너의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질 거 아니야! 그래야 너의 꿈이다 말할 수 있는 거지. 꿈을 이루라는
소리가 아니야. 꾸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베토벤 바이러스’ 아시죠? 저는 참 재미나게 봤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 종영 후 며칠
동안은 ‘강마에 신드롬’에 빠져 벗어나질 못했죠. 거만한 자세로 삐딱하게 서서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퍼붓는 독설이 꼭 저한테 하는 말 같아서
움찔 했던 적인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의 주옥같은 대사 중 ‘꿈을 이루라는 소리가 아니야. 꾸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9년 전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1999년 햇볕이 내리쬐던 6월의 어느 날, 학교 동료 교사와 배드민턴을 치던 저는 평상시와 달리 공 타점을
맞추지 못해 공을 연신 떨어트렸습니다. “송 선생, 배드민턴 실력이 초등학생만도 못한걸!” 머쓱해진 저는 “오늘따라 영 컨디션이 안
좋은데요.”라며 ‘단지 좀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빛’을 잃다
다음 날, 수업 중 칠판에 글을 쓰고 뒤돌아 선 순간 아이들 얼굴이 뿌옇게 보였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봐도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 눈, 코, 입이 제대로 구분이 안됐습니다. 동네 안과에 가서 물으니 의사선생님은 “젊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잠시 눈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심각한 증상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1998년 3월 첫 발령을 받은 충청남도 고대초등학교 3학년 2반 아이들과 함께.
그런데 제 시력은 점점 더 악화되어 그나마 잘 보이던 한쪽 눈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인근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병원에서는 각종 검사를 하더니 원인을 모르겠다며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나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당진교육청 소속 교사로 재직한 이때까지 제가 서울에 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낯선 지역이 바로 서울입니다.
서울에 어느 병원이 크고 좋은지 물어물어 한 병원에 부모님과 함께 올라갔습니다. 검사가 끝나고 복도에 있는
대기의자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이제 28살인데 무슨 문제가 있으려고. 괜찮아!’ 하며 제 젊음에 의지해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드디어 제 이름이 호명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레버 시신경 위축증’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부모님과 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한 설명을 기다렸습니다.
“레버 시신경 위축증은 안구에는 손상이 없으나 망막에 맺힌 L상을 뇌로 전달해 주는 시신경 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시각에 장애가 오는 병입니다. 뚜렷한 원인은 없으며 지금 송광우 씨의 눈은 회복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구의 주변으로 조금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복불가라고?’ 저는 부모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많아 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 저를 나무라기는커녕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도 제가 태권도, 주산 등 학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셨고, 보이 스카우트 활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전후기 대학 입시에 모두 떨어져 방황을 할 때도 재수를 권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고, 초등학교 교사
임용 합격 소식을 전화로 알려드리자 흐느껴 우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장남으로써 효도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시각장애인이 된다니…….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과 나를 위해 희생한 두 동생들 앞에 설 면목이 없었습니다.
온갖 노력도 허사…‘삶 의지’ 잃어
집으로 내려온 저는 우선 학교에 2개월간 병가를 내고 부모님이 알아보신 각종 민간요법과 한방치료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한숨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고, 저의 희망도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선명하게 보였던 28년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절망감에 빠진 저는 지금 보이는 희뿌연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제 소식을 접한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저를 잘 아는 친구들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저를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한 녀석이 저에게 “광우야! 어떻게든 극복하지 못할 시련은 없다고 하더라. 용기를 가져!”라며 제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도 달갑지 않던 제 마음이 친구의 그 한마디에 평온해졌습니다. 이 친구들은 저에게 피를 나눈 형제 그 이상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데 언제까지 이 작은 방에만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공무원으로 쓸 수 있는 휴가를 다 쓴 저는 2000년 4월 학교에 휴직계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이 소개해준 집 근처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점자와 보행, 음성프로그램을 통한 컴퓨터 활용법 등 다양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중도 장애인은 점자 익히기가 참 힘이 듭니다. 무딘 손끝으로 올록볼록한 점자를 아무리 더듬더듬 만져보아도 과연 무슨 말인지! 훈련을 받으면서도 ‘내가 적응 할 수가 있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루의 반 이상을 훈련에 매달리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손끝에서 글들이 살아났고, 빠른
속도로 읽히는 컴퓨터 음성 프로그램의 내용도 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슴에서 뭔가 꿈틀거렸습니다. 그건 바로 ‘교사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나에겐 꿈이 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제가 넘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정인종 선생님이 여자의 작은 체구로 저를 들쳐 업고 화장실도 데려다주시는 등 어머니 같이 살뜰하게 챙겨주셨던 따뜻한 기억이 저를 교사라는 직업으로 이끌었습니다. 두 눈을 잃었다고 해서 그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는 일반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맹학교 특수교사직 뿐이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저는 특수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2000년 12월 대구대학교 특수교육대학원 시각장애아교육 전공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면접위원이었던 임안수 교수님은 대뜸 “다시 일반초등학교로 돌아가 교단에 서세요. 외국에는 시각장애인도 일반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그럴 수가 없는지……. 송광우 선생이 한번 도전해 보세요. 나도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보겠소.”라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시 일반초등학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맹학교’에는 시각장애인 교사와
비장애인 교사가 교육하는데 왜 일반학교에는 비장애인 교사만 가르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2001년 4월 휴직기간이 끝나 충남교육청에 복직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돌아온 교육청의 답변은 ‘복직 불가’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병으로 인한 휴직의 복직은 병이 완치되거나 호전되어 학생들 지도에 이상이 없을 때만 가능하며, 우리나라에는 아직 시각장애인이 일반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한 사례가 없다.’ 하지만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답변이었습니다.
장애인이더라도 직업선택의 자유는 존중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때부터 교육청을 상대로 저의 복직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시 시각장애인 복지관 소개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이곳에 근무하는 간사와 저는 교육청과 교육부 등에 편지를 썼습니다. 저의 끈질긴 요구에 교육청에서는 복직을 위한 두 가지 단서를 내밀었습니다. 전문의의 진단서와 공개수업이었습니다.
‘복직 불가’ 벽을 넘어 아이들 곁으로
의사 선생님은 진단서에 ‘시각장애 1급이지만, 보조공학기기를 사용하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적어주었습니다. 공개수업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교육청 관계자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해냈습니다. 2001년 4월 27일. 드디어 충남교육청으로부터 ‘복직 승인’ 통보가 왔습니다.
시력을 잃은 이후 꿈에서 그리던 일반초등학교의 교사로 다시 서게 된 날,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3년 전 첫 발령을 받았던 날보다 곱절은 더 떨렸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2학년 교실에 들어섰습니다. 역시 아이들의 얼굴은 희뿌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 한 명, 한 명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아이의 예쁜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듯 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여기였습니다.
“선생님 이건 뭐예요?”, “우와~ 이거 되게 신기하게 생겼다”, “모니터에 글씨가 엄청 커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보통인데 저희 반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책상 위에 있는 실물 화상기, 한 글자가 꽉 찬 모니터가 무슨 재미난 장난감인 듯 신기해합니다. “이것들은 선생님 눈을 도와주는 기기들이야! 선생님 눈이 나쁘거든.” 하고 설명을 해주면, 아이들은 “눈 나쁘면 안경 쓰면 돼요.” 라는 똘똘한 대답을 합니다.
아이들은 참 순수하고 맑습니다. 어른들처럼 장애인, 비장애인이라는 이분법적인 선입견 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단지 ‘선생님이 눈이 잘 안 보이는구나!’ 라는 생각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일일이 글자를 확대해 봐야하기 때문에 숙제검사 시간이 길어집니다. 아이들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소풍을 가면 익숙하지 않는 장소라서 “선생님 화장실 좀 안내해줄래?”라고 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제 손을 잡고 저를 이끕니다.
저는 아이들이 성적에 연연하며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보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바람이 한 가지 더 있다면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훗날 열심히 살다가 지치고 힘들 때 저에게 찾아와 잠시 편안하게 쉬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꿈을 향해 나아갑시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말처럼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하늘에 떠 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하는, 쳐다만 봐야 하는 별로 보지 않습니다. 그 꿈을 향해 부딪치고, 깡을 쓰고, 계획을 세우며 그 꿈을 현실 속 나만의 꿈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혹시 지금 ‘내가 과연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도 강마에와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꿈을 꾸기라도 합시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발버둥이란 발버둥은 다 쳐봅시다!
*정리=어은경 푸르메재단 간사
(이 글은 송광우 선생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 송광우 선생님 프로필
1972년 부산 출생
1985년 덕천 초등학교 졸업
1988년 덕천 중학교 졸업
1991년 성도 고등학교 졸업
1998년 진주교육대학교 졸업
1998년 3월 충청남도 당진교육청 고대초등학교 첫 발령
1999년 10월 ‘레버시성 시신경 위축증’ 판정
2001년 4월 복직
2001년 5월 충청남도 당진교육청 남산초등학교 발령
2005년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 석사 취득
2005년 3월 충청남도 당진교육청 고대초등학교 발령
[한겨레-푸르메 공동캠페인 ‘희망을 손을 잡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