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이흥렬, 오직 하나의 달란트……'희망을 노래하기'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오직 하나의 달란트…‘희망을 노래하기’


(18) 왼쪽 발가락으로 시 쓰는 뇌병변 장애인 이흥렬 시인


» 일상의 모든 것이 감사하고 늘 행복하다는 중증장애인 이흥렬 시인(오른쪽)과 부인 이순희 씨.


10여 년 전 캐나다 토론토 주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나를 초청했다. 강연 집회에 강사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초청을 받아들여 9박 10일간 캐나다에 다녀왔다. 그때까지 국내여행도 제대로 못했던 나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큰 사건이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대양을 건너던 나는 태평양 구름을 바라보며 문득 옛 일들을 떠올렸다.


나는 32살이 되던 1986년에 대구에 위치한 모 재활원에 입소했다. 당시 우리 집은 매우 가난해서 입 하나라도 덜어주고자 내 발로 재활원에 들어갔다. 재활원 원생들은 거의 모두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들과 생활하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매일같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나이는 30을 훌쩍 넘긴 어른이었지만 방안에서만 살아온 탓에 세상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모든 생활이 다 힘겨웠다. 한 마디로, 재활원에서 나는 초라한 자리나마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서른 넘어 ‘자립’ 위해 재활원으로


» 재활원에서 생활할 때 한 자원봉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흥렬 시인.


하지만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집을 나설 때 마음에 품었던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생활을 떠나고 싶었고, 모든 것을 당장 포기하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은 없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되뇌며 조금씩 적응을 해 나갔다.

재활원에 입소하면서 마음에 품었던 꿈은 바로 ‘자립’이었다. 사실 내 처지를 돌아보면 자립한다는 것이 정말 허상에 불과해 보였다. 나는 온몸이 뒤틀리고 손가락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든 1급 중증장애인이다. 게다가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다. 이런 내가 어떻게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온몸에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자립의 꿈은 내가 힘든 재활원 생활을 견디고 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이 되기도 했다.


나는 재활원 식구 네 명과 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예절도 가르쳤으며 때로는 부모의 노릇까지 했다. 그리고 재활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혼자서 연마해 오던 글쓰기에 더욱 노력했다. 글을 좀 더 쉽게 쓰기 위해 재활원 사무실에서 타자기를 배우게 해 달라고 졸라서 허락을 받아냈다. 왼발 엄지와 오른발 새끼발가락으로 타자를 배울 수 있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내 발가락이 굵어서 자판을 치면 두 세 개가 한꺼번에 걸려 오타가 나서 발가락 뼈를 깎아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발가락으로 타자연습하며 시작(詩作)에 몰입


» 이흥렬 시인이 왼쪽 발가락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순금이 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큰 고통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시간만 나면 늘 타자연습에 몰입했으며 그 결과 일 주일 만에 자판을 다 외웠고 글자도 어느 정도 틀리지 않고 칠 수 있게 되었다.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을 본 재활원 원장님은 내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하셨고 좀 더 능숙해지면 직업보도관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노라고 약속을 해 주셨다. 남들에게는 큰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꿈을 꾸는 듯 믿기지 않는 즐거운 현실이었다.


1989년 당시 경북일보 김상현 기자가 재활원에 취재를 왔다가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보고 내 생활을 취재해서 신문에 보도가 되었고 이 기사를 계기로 각 매스컴에 내 사연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어두운 밤이 겁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없이 울어야 했고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순간순간 절망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글을 썼다. 내 몸은 비록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내 마음은 글을 통해서 나비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 있었으니까.



 앉은 뱅이 꽃


아파도 앓아눕지 못하는

앉은 뱅이 꽃


마음을 다해 태워도

신열은 향기로만 남는

뿌리 깊은 앉은 뱅이 꽃


갈대밭 세상에서

숨어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키 작은 내 모양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내가 날마다 힘겨운 생활의 무게를 조금씩 극복해 가니 암흑같이 어두웠던 일상도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1991년 고 천상병 시인님의 추천으로 시집 『앉은뱅이 꽃』도 출간했고 재활원 직업보도관에 취업도 하게 되었다. 내 어머니는 나를 재활원에 보내 놓고 삼일 밤낮을 우셨다는데 그 눈물의 대가를 뒤늦게 안겨 드리는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 또 다른 시작에 불과했다. 한 계단을 오르면 더 넓은 세상이 보였다. 명성을 조금 얻고 주위를 돌아보니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장애인들이 문학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감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자신들이 결코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미처 개발하지 못한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 쓰는 일이었기에 문장을 통해서 장애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대구 지역의 장애인 문인들을 중심으로 장애인문인협회를 만들었다. 서울의 솟대문학에서 한국장애인문인협회를 이미 결성하고 있었기에 그곳의 지회형식으로 운영하다가 2006년에 협회 이름을 한국민들레장애인문인협회로 바꾸고 새롭게 출범시켰다. 이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내가 캐나다까지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삶은 ‘가능성의 바다’


캐나다까지 1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강사로 외국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일까?


뇌병변 1급 장애인으로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 수 없을 거라는 가족의 심판 아래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내가 시인이 되고 강사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커피 한 잔을 훅 들이키듯이 그렇게 쉽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한해살이 식물도 꽃을 피우는 절정에 이르고서야 그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하물며 인생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가 인생에서 아무리 악천후 같은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캐나다에서 머문 9박 10일 동안 나는 초청 강사로서 따뜻한 환영과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교회 세 곳에서 간증 집회를 하고 많은 교민들을 만나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고 남은 시간에는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관광을 했다. 탁 트이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곳의 자연 경관과 오밀조밀 자연에 잘 어울리도록 지은 목조 건물을 눈여겨보면서 나 또한 인생을 건축하는 목수로서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때의 다짐과 기억을 주춧돌로 놓고 어설프지만 우직하게 세상을 살았다.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검정고시에 도전해서 49세가 되던 2002년부터 1년 반 만에 초, 중,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쳤다. 그리고 운명의 2005년. 52세가 된 나는 천사 같은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우리의 만남은 정말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다. 당시 기독교 찬양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던 아내는 회원들과의 채팅 과정에서 나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에게 나를 소개해 준 카페 회원은 나와 잘 아는 분이었고 그분이 아내의 전화번호를 주셔서 연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채팅으로 만나다가 곧 직접 만났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서로 말이 잘 통하고 밝은 모습에 반했던 것 같다.


아름다운 ‘결합’으로 진정한 자립을 이루다


» 이흥렬 시인이 2005년 결혼식에서 신부 이순희 씨와 함께 입장하고 있다.


우리는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45세의 아내는 아들 하나, 딸 하나의 엄마였고 재혼이었다. 중증장애인과 결혼한다고 처갓집에서 반대했을 것 같지만, 반대는 오히려 우리 집에서 대단히 컸다. 우리가 결혼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혹시나 아내가 나를 버린다면 내가 상처를 받을 것 같다며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서로 영혼이 통해버린 우리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결혼을 했다.


나는 올해부터 영진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문인협회 일이 너무 바빠서 때로는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동영상 강의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공부가 쉽지만은 않지만 나는 공부를 즐기고 있다.


성경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고 마지막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나중에 다녀와서 주인이 결산을 하게 되었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열 달란트를 만들었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네 달란트를 만들어 주인에게 줬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런 저런 변명을 둘러대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뒀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주었다. 결국 그는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낙인 찍혀 쫓겨나고 말았다.


나는 어느 순간엔가 주인의 깊은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큰 상을 주기 위해 한 달란트만 준 것인데 그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한 달란트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 가는 슬기를 발휘하여 세 달란트를 만들었다면 더 큰 축복을 누렸을 텐데,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만약 나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적다고 지레 포기를 했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커녕 미래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길을 가려 하냐고. 다 늙어서 검정고시를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50을 넘겨 결혼을 해서 어떻게 살려고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안전하게 노후대책을 잘 준비해서 남은 인생 편안하게 사는 게 낮지 않느냐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세상에는 잘 살다가도 이혼하는 부부도 많고, 많이 가지고도 불행한 가정도 수 없이 많다. 또한 혼자 살 때보다 가정이 생기면 복잡한 일 책임져야 할 일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운 점들을 극복하는 것이 사람이고 어쩌면 내가 걸어 온 길도 끊임없는 어려움과 숱한 고통을 극복해 온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자의 사랑을 신뢰했기에 그분은 전적으로 나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 이흥렬 시인은 2008년 10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 대상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


결국 결혼은 그 어떤 대단한 노후대책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확신하고 사람들의 크고 작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혼해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다. 이것이 내가 꿈꾸어 오던 완전한 자립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낼 때, 한평생 고통과 절망 속에 살다가 아무 의미 없이 생을 마감하게 하시는 분은 아니다. 자립하겠다고 집을 나선지 22년. 참으로 어려운 순간, 눈물 나는 일이 많았다. 배가 고플 때 라면하나 사먹을 돈이 없어 밤새도록 서럽게 울었던 기억과 추운 겨울 방이 얼마나 차가웠던지 방에 있던 주전자에 물도 얼고 걸레도 얼어 있어 암담했던 순간들……. 이 모든 경험이 아픈 기억이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내가 행복한 삶을 꾸려 올 수 있는 귀한 자산이 되었다.


“당신은 이 땅에 온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꿈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아들과 딸을 잘 키워서 반듯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내 주위의 어려운 이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 삶을 돌아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 아직도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집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막고 있는 벽이 너무나 견고해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고 그래서 포기하고 있습니까? 그때 한 번 더 용기를 내 보세요. 바로 그 순간이 기회랍니다! 당신이 용기를 내는 순간 그 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 이흥렬 시인 프로필



  • 1954년 출생, 뇌성마비에 걸려 중증뇌병변 장애를 갖게 됨

  • 1973년 19세 한글을 처음 배움

  • 1981년 27세 시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함

  • 1989년 장애인 재활원 입소

  • 1991년 8월 시집 『앉은뱅이 꽃』 발행

  • 1992년 한국장애인문인협회 대구․경북지회 초대 회장

  • 1994년 MBC대학가곡제에서 시 「그리움」이 본선에 올라 CD로 제작

  • 1997년 11월 월간 문학세계 시 부문에 「나의 기도」 당선으로 등단

  • 1998년 역경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앉은뱅이 꽃> 제작 상영

  • 2008년 10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 대상에서 문학부분 수상

  • 2008년 현재 한국민들레장애인문인협회 회장


저서 : 시집 『앉은뱅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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