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인 수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이유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이유
⑬ 세계최초 중증장애 수도자 윤석인 수녀가 보내는 ‘희망 편지’
안녕하세요?
제가 윤석인 수녀에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여기 가평은 산 좋고 물이 맑아서 좋은데 교통이 좀 불편해요.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제게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에 또 무슨 뜻과 인연이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기도 하면서 기다렸지요.
저는 늘 제가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되뇌어 보곤 하는데, 오늘 만남도 아마 그 이유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초등 5학년 때 급성 류머티즘…깊은 어둠 속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저는 1950년 4월에 대전에서 ‘전쟁둥이’로 태어났어요. 5살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안암동 고대 뒤편 작은 한옥마을에서 살았지요. 아버님은 농업은행(현 농협)에서 일하시는 청백리 스타일의 은행원이셨어요. 왜정 때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를 나온 인텔리셨고, 학생 때 럭비선수를 하셨을 정도로 건강하셨대요. 그 피를 이어 받아서인지 저도 어렸을 때 줄넘기를 하면 두 뼘이 넘도록 높이 뛰었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기가 취미였다고 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하루는 목이 뻣뻣해서 병원을 찾았어요. 부모님께서는 동네 의사선생님 말씀을 듣고 제가 그냥 밤에
잠을 잘 못 잔 탓일 거라고 생각하셨대요. 노인들이나 걸리는 류머티스 관절염에 초등학교 5학년 꼬마가 걸렸으리라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안심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 날이 갈수록 몸이 점점 더 아파오고 본격적으로 마비가 시작되었고 다시 병원을 찾았지요. 결국 ‘급성 소아 류머티즘’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입원, 휴학, 투병생활까지,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어졌어요. 류머티스 관절염은 온몸의 관절에 있는 연골이 삭아
없어지고 나중엔 뼈들이 붙어 버리는 무서운 병이에요.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뼈와 뼈가 갈리고 무서운 통증이 찾아와서 우느라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팠던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너무 아파서 그 고통의 기억을 무의식에 밀어 넣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망각이란 참 좋은 거지요?
발병한 지 5년 만에 통증은 사라졌지만 온몸의 뼈가 굳어버려서 저는 평생 누워서 지내야 하는 장애인이 되었어요.
학교는 다시 갈 수 없었고 30살이 될 때까지 집에 누워만 있었죠. 자상한 오빠 언니들이 있었지만 저는 어둠 속에서 완전히 혼자였어요. 유일한 취미이자 할 일은 집에 있는 책을 읽는 일이었죠.
30살까지 ‘두문불출’…책 속에 파묻히다
자식들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께서 대청마루 한 쪽 벽에 책장을 짜서 책으로 가득 채워 주셨어요. 그 많은 책들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읽어 댔죠. 100권짜리 세계문학 전집을 독파하고, 셰익스피어는 희곡은 물론 소네트까지 다 읽었어요. 언니 오빠들에게 도움을 받아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10대 후반에는 영어로 된 ‘북경에서 온 편지’를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을 정도 실력을 갖추었고요. 한문공부도 열심히 해서 철학책을 봐도 웬만한 뜻은 다 해독할 수 있었죠.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넓은 세상을 만나고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닦은 것 같아요.
20대를 넘기면서부터 저는 점점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어요. 인생에 대해 깊은 물음이 끝도 없이 떠올랐지요. 나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렸는지, 앞으로 한평생 누워서만 살아야 하는지,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왜 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끝없이 던지다가 천정을 바라보며 죽는 방법을 연구했지요. ‘농약을 먹고 죽을까?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질까? 목을 맬까? 정맥을 끊어서? 별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았지만 겁이 나서 차마 시도는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책장에 놓여 있던 낯선 책자를 발견했어요. 교부들의 신앙을 다룬 그 책은 초보자를 위한 가톨릭
입문서였어요. 아버지 친구분 중에 가톨릭을 믿는 한 분이 가지고 오신 거였죠. 한참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제게 그 책은 강렬한 느낌과 함께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어요. 뭐랄까, 초월자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궁극적으로 갈구하는 부분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아... 내가 삶을 좀 더 견뎌보고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가톨릭으로 가야지.’
‘죽음’의 유혹 넘어 세상과 마주서다
30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무기력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세상에 도움이 되려면 무언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배운 것이 플라워디자인과 빵꽃공예였어요. 저는 누워 지내니 엄마가 학원을 다녀서 배워 오면 제가 엄마에게 다시 배우는 방식이었어요. 어느 정도 배운 후에는 아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기 저기 팔았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판매가 된 후로는 더 팔리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1980년 1월부터 그림을 배웠어요. 만화책을 모방해서 그리는 취미가 있어서 조카들에게 로봇이나 공주를
곧잘 그려주곤 했거든요. 우리 집으로 막 시집온 큰 올케가 누워 지내는 저를 보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워보라며 그림 선생님을 소개시켜 줬어요. 비용은 언니, 오빠들이 댔고요. 그림 선생님은 홍익대 미대를 다니던 남학생이었는데 우리 집으로 개인 교습을 왔어요. 저는 앉기도 힘드니까 오빠들이 제가 소파에 기대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보조기구를 나무로 만들어 주었지요.
첫 6개월 동안은 아그리파 줄리앙 석고 데생만 했어요. 나중에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완전히 매달려서
수백 장을 그렸지요. 데생이 끝난 후에는 수채화로 아그리파 줄리앙을 수개월 동안 그렸고, 그 다음엔 유화도 배웠어요. 나중에 그 선생님이 말하더군요. 처음에 저를 보았을 때는 며칠 하다가 말겠지 생각했는데 일 년 이상 끈질기게 그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구요. 그리고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평가해 주었어요. 너무 기뻤지요. 스스로 기특하기도 했구요.
저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사람들도 그리고 자연도 그리고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은 모두 그려 보았어요. 하지만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슬럼프’에 빠졌어요. 그림 그리기는 무척 재미가 있었지만 가치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지요. 이렇게 그려서 뭣 하나 싶었어요. 제가 무슨 피카소도 아닌 이상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길 것도 아니잖아요.
종교를 통해 ‘삶의 허무’ 극복
그때 몇 년 전에 읽었던 가톨릭 입문서가 떠올랐어요. 견딜 수 없을 때 가톨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더랬죠. 이때가 그때다 싶더라구요. 엄마에게 ‘성당에 가고 싶다’고 말했죠.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이라서 약간 꺼려하셨지만 소원이라고 사정해서 성당에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6개월간 통신 교리과정을 밟고 1982년 3월 2일 천주교 영세를 받았지요. 제가 이동이 불편하니까 신부님께서 직접 우리 집으로 오셔서 세례를 주시면서 누워서 꼼짝 못하고 사는 저를 위해 대모님을 두 분이나 정해주셨어요. 웃기죠?
성당에서 만난 분들은 모두 저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저로서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맺는 최초의 인간적인
관계였는데 좋은 분들을 만나 참 다행이었죠.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택시를 타고 간이의자에 바퀴를 달아서 야유회도 다니고 미술관도 가고 장애인 모임에도 다녔어요. 하지만 즐겁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하필이면 내가 왜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풀리지 않는 물음은 계속 마음속에 머금고 있었지요.
한 번은 장애인만 참석하는 피정에 갔어요. 그곳에서 처음 만난 신부님이 다가오시더니 제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자매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처럼 비참한 사람이 거룩한 성직자를 위해서 기도를 한다니! 저에게는 가치가 완전히 전복되는 느낌이 드는 말씀이었어요. 그때까지 저에게 장애는 켜켜이 쌓인 업보였고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거든요.
이때 제게 들어온 성경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9장 1~3절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공동번역성서)
정말 놀라웠어요. 성서 속 이야기는 바로 제 이야기였으니까요. 제가 늘 궁금하게 여겼던 질문과 답이었으니까요.
수백 권 책을 읽었어도, 숱하게 그림을 그려댔어도 알 수 없었던 제 인생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으니까요.
해답을 찾은 저는 용기를 내었어요. 1986년 가을, 서울 대교구 신부님으로 계시던 박성구 신부님께서 장애인
기도공동체인 작은예수회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요.
“제가 여기 와서 살아도 될까요?”
“와도 된다. 내일 와라.”
마음은 바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 다음날 바로 가진 못했어요. 어머니 등 가족들의 걱정과 반대가 컸거든요. 1년
넘게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고 집을 나와 공동체 생활에 합류했지요.
작은예수회는 1984년 박성구 신부님께서 의지할 곳 없는 한 장애인 부부를 만나면서 시작되었어요. 신부님께서 그
부부를 위해 경기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이분들이 살아가기 위한 기도회 미사를 계속하시면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수도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래서 만드신 게 바로 작은예수회였지요.
작은예수회 공동체생활은 힘들기도 했지만 무척 즐거웠어요. 박성구 신부님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똑같이 대하시는데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 새벽 5시에 열리는 새벽미사에 장애인도 참가해야 했지요. 유난히 아침잠이 많은 저는 무척 힘들어했답니다. 하지만 매일 열심히 미사 드리고 기도하는 생활은 저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고 마치 어린이처럼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았어요. 그림도 열심히 그려서 88년 장애인올림픽 때는 전시회도 참가했고 91년에는 곰두리 미술대전에 입선하기도 했지요.
세계 최초의 중증장애인 수도자 되다
이때까지는 수도자가 될 생각을 못했어요. 교회법에 수도자는 건강한 사람만 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거든요. 수도자는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사람은 적당치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박성구 신부님은 저를 수녀로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계셨나 봐요. 작은 예수회에 이어, 당시 천주교 수장이신 김수환 추기경님께 몇 년 동안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수도생활 하는 수녀회 창립을 간곡하게 제언하신 끝에 1992년 5월에 허락을 받았어요. 일단 허락이 떨어지자 일사천리로 과정을 밟아서 1992년 12월에 작은예수수녀회가 설립되었어요. 저 1명과 비장애인 3명이 함께 주교님 앞에서 1기 수련식을 거행했지요.
저는 가톨릭 2,000년 역사 중에 최초의 장애인 수도자에요. 혼자만의 삶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게
된 것만도 저에게는 큰 기쁨이자 복인데, 남을 돕는 일에 제 생명을 온전히 헌신하며 살 수 있는 수도자가 된 거죠.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뻤지만 속으로는 덜컥 겁이 났어요. 기본적으로 수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을 쌓아 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다른 장애인에게도 길을 열어줘야 된다는 책임감까지 들어서 그랬죠.
하지만 저는 무엇이든지 미리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최선을 다했어요. 부엌일 같은 힘든 일은 할 수 없었지만,
전화 한 통을 받아도 공손한 말투와 간결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으로 똑 부러지게 일을 했지요. 수도지신학원에서 교육을 함께 받은 전교가르멜 수녀는 이런 저를 보고 다윗의 돌멩이를 떠올렸다고 해요. 다윗이 조약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저의 약한 모습으로 여러 가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내는 모습이 하느님이 세상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처럼 보여서 감동 받았다고요.
저는 작은예수수녀회의 부원장을 거쳐서 1999년 원장의 소임을 받았어요. 맡은 바 소임을 실천하면서 제 마음 속에
두 가지 원칙이 있었지요. 첫째, 마음먹고 방법을 간구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둘째, 세상 모든 일은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으니 내가 도움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중증장애인의 신체조건의 한계 안에서라도 누군가를 도울 방법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자!
우리 수녀회에서는 전국에 9곳의 공동생활가정(장애인 그룹홈)을 운영하는데 침대형 휠체어에 누워 살고 있는 제가
이곳들을 관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전국을 누볐어요. 제주도에 갈 때는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15인승 승합차를 이용 페리호에 타고 새벽 5시에 인천에서 출발, 완도를 거쳐서 저녁 7시에 도착하기도 했어요.
여성 중증장애인 위한 집 지으며 살고파
이렇게 저는 무척 행복해졌어요. 하루 종일 어떻게 죽을지 연구하던 방안퉁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수도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큰 변화냐구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나만 현재의 행복을 즐기면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더 고통 받고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2005년부터 시작한 여성중증장애인을 위한 집짓기 사업이었어요. 중증장애인은 케어가 어려워서
보통은 생활시설에서도 잘 받아주지 않고, 경증장애인과 중증장애인이 섞여서 살고 있는데 사실, 중증장애인들은 적절한 편의시설과 전반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살 수 있어야 좋거든요.
첫 번째로 건립한 이곳 가평 ‘작은예수회 마을 안의 성가정의 집’은 40명의 여성 중증장애인들이 살 집이에요.
정부 지원금 외에 모자란 건축비와 운영비 마련을 하기 위해서 지금도 전국으로 모금을 다니지만 이미 20명의 장애인들이 오셔서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지요. 저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중증장애인들의 집을 짓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 짓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제가 이미 나이가 들어서 앞으로 몇 채나 더 지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제 인생을 돌아보면, 한 마디로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필이면 내가 왜 장애를 갖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었던 것 같아요. 책을 통해서는 세상을 살아갈 기본적인 지식과 교양을 닦았고, 그림을 통해서는 혼자서 세상에 당당히 걸어 나오게 되었지만, 이것들이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는 못했지요. 지금은 알아요. 제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왜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하느님은 가장 약한 자를 통해서 자신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시기 때문이에요.
여성 장애인이여, 사랑합시다!
마지막으로, 저 같은 여성 중증장애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가능하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피하지 말고, 사랑도 하고, 아기도 낳으며, 여성으로서 행복도 누리세요.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들어 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시려면 힘드시겠어요. 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정리/사진=이재원 푸르메재단 간사
(이 편지는 윤석인 수녀님과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 윤석인 수녀 프로필
- 1950년 대전 출생
- 1957년 서울 돈암초등학교 입학
- 1961년 류마티스 관절염 발병, 휴학
- 1980년 미술 수업 시작(개인 교습)
- 1982년 천주교 영세
- 1991년 곰두리 미술대전 입선
- 1992년 작은예수수녀회 창립 1기 수련식 거행
- 1999년 작은예수수녀회 종신서원식, 원장 취임
- 2000년 제 1회 개인전(예술의 전당)
- 2001년 제 3회 개인전(이태리 로마 교황청 직속 라삐냐 화랑)
- 2002년 ‘올해의 장애인상’ 수상
- 2005년 여성 중증장애인 집짓기 사업 시작
- 2008년 여성 중증장애인 생활시설 완공, ‘성가정의 집’ 명칭으로 개원
저서 : 『동행』(오늘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