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씨] ‘앙드레 김’ 무대 서야겠다…나는 아름다우니까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앙드레 김’ 무대 서야겠다…나는 아름다우니까


⑫ 의수족 나누는 절단장애인협회 김진희 회장


» 프랑스 몽마르뜨 언덕에 선 절단장애인협회 김진희 회장.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 안 가본 곳이 드문 여행 마니아이다.

1997년 3월 결혼을 한 달 앞둔 28살 행복한 예비 신부였던 나는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운영하던 미술학원을 향해 차를 몰아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선을 넘어오던 5톤 트럭은 피할 틈도 없이 나에게 다가오고 말았다. 머리에는 뭔가 뜨거운 것이 흘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가 안됐어. 어머, 어쩌면 좋아. 다리가 잘려나갔네.”


그때서야 알았다. 나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앰뷸런스가 오고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 어디론가 갔는데, 꽤 멀리 간다고 느껴졌다. 내 몸이 처참하게 ‘부서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서 살 가망이 없다며, 가족들에게 자꾸 영안실로 데려가라고 했다. 살아 있는데 왜 자꾸 죽었다고 하느냐고, 아니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온몸이 마치 뭔가에 묶여 있는 것처럼 말을 듣질 않았다.


의사 ‘사망’ 판정, 그러나 눈을 감을 수 없었다


» ‘잘 나가던’ 미술학원 원장 시절의 김진희 회장.

뭔가 통했을까. 미세한 움직임을 언니가 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언니의 도움으로 영안실이 아닌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두 달 만에 의식을 회복했을 땐 행복한 결혼의 꿈도, 꿈꾸던 미래도 잘려나간 왼쪽 다리와 으스러진 얼굴, 망가진 팔과 함께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2년이 넘는 병원생활 동안 나의 다리는 맞지 않는 의족 때문에 세 번씩이나 더 짧아졌고, 팔과 다리에는 인공 관절이 심어졌다. 28번의 성형수술 끝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자살기도도 여러 번,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지만 질기고 질긴 목숨 줄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고 어차피 이런 모습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성형수술 28번 끝에 ‘달라진’ 내 얼굴


» 의족을 하고 처음으로 스커트를 입은 김진희 회장.

어느 날 언니가 내 머리맡에 신문을 하나 놓고 나갔다. 거기에는 ‘에이미 멀린스’라는 장애인이 두 다리 없이 의족으로 100미터 육상선수와 유명 패션화보 모델로 활약 중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희망을 갖고 수소문한 끝에 그가 다니는 병원이 재활의학으로 유명한 영국의 도셋병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영어와 컴퓨터를 열심히 배워 도셋병원에 이메일을 보내 내 처지를 설명하고 방문을 허락받았다.


연속적인 의족의 부러짐으로 힘들어하던 나는 기다릴 여유도 없이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엄마는 함께 가겠다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 홀로 떠났다.


동양인 최초로 도셋병원을 찾은 사람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 나는 처음 진료상담을 받던 날,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680만원이나 들여 구입한 의족이 가(假)의족이라는 것이었다. 비싼 돈을 들여 했던 의족이 영국에서는 임시적으로 착용하는 가의족이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배신감에 화가 났다.


영국에서의 의족은 1,500만원이 족히 넘었다. 그래도 다시 설 수만 있다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영국에서는 의족을 만드는 것을 제2의 창조 작업이라 했다. 담당 의사는 닭살인 내 피부까지 모방했고 발뒤꿈치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면서 의족을 착용한 후에는 스커트도 입을 수 있고, 샌들도 신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설레었다.


의족이 다 만들어지려면 영국에서 한 달은 족히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목발을 짚고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여행하면서 유럽의 편의시설은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잘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 자신이 장애인이 된 후 비로소 눈에 띄는 것이었다.


선진 의수족 기술에 새 희망…정보 나눔운동 펼쳐


» 김진희 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의수족 나눔운동이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등 제3세계로까지 나눔의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잊지 못할 이 경험을 알려주고 싶어 귀국 후에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배우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1년에 한 명도 좋고 2년에 한 명이라도 좋았다. 작은 정보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치료방법을 몰라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이나 제대로 된 휠체어, 의족, 의수를 구입하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현재 에는 하루 2, 3백 명이 접속하는데 내 여행기뿐만 아니라 의수, 의족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독립했다. 부모님이 언제까지 내 곁에 있어주시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형제자매가 언제까지나 나를 챙겨줄 수는 없기에 가족들이 있을 때 홀로 서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늘어나는 휠체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독거노인이나 영세 장애인들에게 보장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지원하는 물품은 휠체어를 비롯해 시가 40~50만원 하는 침대휠체어, 장애인 좌변기, 욕창 방지용 매트 등 가짓수도 여럿이다. 한두 번 썼다가 사용하지 않는 물품들을 모아 수리까지 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오랜 내전으로 절단장애인이 넘쳐나는 캄보디아에 지금까지 500점이 넘는 물품을 나누었다.


물론 수리비용이 만만치 않다. 방송국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잡지에 고정 칼럼을 써서 번 돈을 몽땅 쏟아 부었다.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언제까지 가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일이 즐겁다. 이제는 많은 분들이 나의 이런 일을 이해해주고 택배 또는 우편으로 물품을 보내주신다.


중고 의수족 등 500점 수리해 무료로 제공


비용 마련과 물품을 놓아둘 곳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그 동안 도움의 요청에 대꾸도 않던 인천시가 뜻밖의 희소식을 들려줬다. 물품들을 따로 보관할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처음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얼마 안 가서 그만둘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의 끈질긴 근성을 지켜보다 두 손을 들고 만 것이 아닐까 싶다.


도셋병원에서 영국의 유명한 장애인 인권운동가 헤더 밀스를 알게 됐다.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의 아내로 더 잘 알려진 밀스는 일류 패션모델로 활약하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가 절단된 뒤 장애인 모델 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코소보 등 분쟁지역에 의수족을 보내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재활훈련을 받던 중 밀스에게 ‘당신에 관한 기사와 자서전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이어 밀스에게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고 굉장히 반가웠다. 한번 방문해 달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후 나는 다시 영국 도셋병원에 들러 밀스를 만날 수 있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밀스에게 “나도 당신처럼 다른 장애인들을 돕고 싶다”고 말하자 밀스는 “용기를 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 보여주겠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는 왜 내가 이 꼴이 되었는지 죽고 싶었지만, 지금은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되라고 겪은 일로 생각한다. 외국의 장애인 모델들은 ‘라피도’나 ‘엘르’ 같은 유명 패션지 또는 ‘알렉산더 맥퀸 쇼’ 같은 유명 패션디자이너의 쇼


에서 활동한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꼭 기능성 옷만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도 정말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나는 연예인들이라면 한 번은 서보고 싶어 하는 무대 ‘앙드레김 쇼’에 서보는 것이 소원이다.


한쪽 다리를 잃은 뒤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몸’으로라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이건 분명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장애인들에게 뭔가 나누며 살라는 운명의 메시지인 것 같아 휠체어와 의수족을 모아 보내주곤 한다. 내가 모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줄 때마다 가슴에서 뜨거운 희열이 솟구쳐 혼자 이렇게 외친다.


‘살아 있어서 참 좋다.’


■ 김진희 회장 프로필


67년 인천 출생


90년 산업디자인 학사


91년 의정부 미술학원 개원


97년 출근 도중 중앙선 넘어 마주 달리던 트럭과 정면 충돌사고


2000년 절단장애인 정보교류 사이트 DECO 개설


2003년 제1회 절단장애인 모임


2006년 절단장애인협회 설립 및 캄보디아 봉사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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