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씨] 죽음의 땅 질주하며 ‘울트라’ 희망 나눕니다
죽음의 땅 질주하며 ‘울트라’ 희망 나눕니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⑪ 남극 250km 도전하는 시각장애 마라토너 송경태 씨
‘도저히 더는 갈 수 없다. 벌써 네 번째 뜨거운 사막의 모래 위에 쓰러졌다. 태양이 두렵다. 이대로 미라가 될 것 같다. 아, 졸립다. 잠이 쏟아진다. 수분부족으로 인한 졸음이다. 눈꺼풀이 닫히는 순간 나는 죽는다.’
박테리아도 살지 않는 열사의 땅 사하라 사막. 그 곳에서 5박6일간 250km를 달리는 2005년 극한 마라톤 대회. 18kg짜리 배낭을 짊어진 야윈 남자가 휘청이며 모래 바람을 헤치고 나아간다. 기온은 섭씨 50도를 넘어섰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이 사람의 얼굴은 숯처럼 메말라 있다.
울트라 마라토너 송경태(47) 씨. 그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시뻘건 태양의 열기와 숨 막히는 모래바람 속을 암흑 상태에서 걷고 뛰었다. 구간마다 맡아놓고 꼴찌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맨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런데 107명 중에 77등이라고 한다. 나머지 30명은 레이스를 포기했던 것이다.
2007년 고비사막에서 열린 대회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해발고도가 4000m를 넘나드는 고원지대. 어떤 코스는 죽음을 각오할 만큼 험난했고, 어떤 코스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간별 제한시간에 쫓겨 피가 말랐다.
“도우미가 길이 험하니까 잘 따라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별 말이 없었어요.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무작정 따라갔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300m 높이의 낭떠러지 길을 3km나 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길의 폭이 30cm 정도였다는 거예요. 주최측에서 우리보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서 왔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250km 사막 마라톤 3차례 완주
2008년 봄에 도전했던 아타카마 사막은 250km 구간 가운데 소금사막이 53km, 나머지는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길이었다. 둘째 아들이 도우미로 함께 달렸다. 주먹만 한 소금덩이가 박힌 땅을 달리자니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발목이 꺾였다.
“첫날 42km를 뛰는데 주최측이 어려운 코스를 배치한 겁니다. 포기할 사람은 빨리 그만두라는 의미였지요. 8km쯤 지날 때였는데, 아들 녀석이 ‘아빠, 보따리 싸서 가자’는 거 에요. 그래서 저는 첫날만 하고 가자고 꼬셨죠.”(웃음)
어렵사리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모든 사람들은 이들 아름다운 부자의 모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포기하자던 아들은 응원해주는 동료들의 모습에 마음을 바꿨다. 레이스 도중에 너무 힘들어서 서럽게 울기까지 했다는 송경태 씨. 제한 시간을 20분 남기고 결승지점에 들어와 아들과 포옹을 하며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주어진 물과 식량만으로 250킬로미터를 5박6일 안에 달리는 극한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죽음의 레이스이다. 4개 대륙의 혹독한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데, 이 가운데 3개 대회를 완주한 사람은 전 세계에 27명에 불과하다. 장애인으로서는 송경태 씨가 유일한 인물이다.
“불광부득(不狂不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칠 수 없다(不得)는 거죠. 처음 마라톤을 시작할 때는 이렇게 도전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를 통해서 노력하면 안되는 게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세계 최고의 장애인 극한 마라토너로
송경태 씨가 삶의 완주를 향해 달리는 ‘인생 마라톤’ 출발점은 바로 사고로 두 눈을 잃었던 1982년에 시작된다. 그가 바라보던 총천연색 세상이 암흑으로 바뀌게 된 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 때문이었다.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공학도였던 그가 대학을 마치고 입대한 지 6개월 됐을 때였다. 수류탄 폭발사고가 터졌다.
파편이 온 몸을 뒤덮었다. 6개월 동안 3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국가유공자 실명 상이용사’가 된 것이다. 반년이 넘는 병원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암흑보다 깊은 절망이었다.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세상만큼이나 어두웠다.
“2남 3녀의 장남으로 가족에게 멍에가 되는 게 싫었어요. 어머니가 남몰래 부엌에서 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어요. 차라리 죽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죠.”
화목했던 가족들이 수심에 차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 눈을 잃은 것만큼이나 슬펐다.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고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죽기로 결심했고 6번의 자살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그에게 신부님이 찾아왔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자살’이라는 두 글자를 계속 외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죽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내게 신부님이 왜 자살을 외치라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아무튼 자살을 외쳐봤어요. 그랬더니 ‘자살자살자살자살자……’ 어느 순간 ‘자살’이 ‘살자’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그때 알았죠.”
불의의 사고로 실명…한 때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송경태 씨는 그 후로 결심했다. 장애에 무릎 꿇지 않겠다고.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시각장애인으로 대학을 열심히 다니는 어느 학생의 사연을 라디오로 접하고, 나도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점자를 익혔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4학년 때 일본을 1달간 다녀왔어요. 오사카, 도쿄, 고베 등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장애인 복지수준에 감탄했습니다. 한국과 너무도 달랐어요. 그때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졸업과 함께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따고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장애 때문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월급도 받지 않기로 하고 한 점자 주간지에 기자로 입사했다. 국회든 법원이든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열심히 찾아다녔다. 취재처에서는 어차피 못 보는 것 아니냐면서 보도자료도 주지 않았다. 그럴 때는 자료를 줄 때까지 꼼짝도 않고 버텼다. 한 1년 정도 뚝심 있게 기자생활을 했더니 그제서야 ‘쓸만하다’는 얘기가 들리더란다.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일을 하기 위해서 1991년 하상복지회에 들어갔고, 하상복지관 건립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98년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장애인 복지와 환경운동에 매진했다. 2000년에는 사재를 털어 전주에 전북지역 최초의 ‘시각장애인 도서관’을 열었다.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준비할 때에 그 많은 책을 읽어댈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한 10장씩 나눠주고 녹음을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1년이 지난 뒤에 보내주시더군요.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죠. 한 번은 기말 레포트 0점을 맞기도 했어요.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제가 겪은 이런 고통을 주기 싫었어요.”
당신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전북 시각장애인 도서관’에서 하는 일은 다양하다. ‘찾아가는 이동도서관’은 물론 ‘전국여행 가이드북’과 ‘전북의 문화재’, ‘아동문학 전집’ 등을 점자판으로 제작했다.올해는 ‘촉각 점자그래픽 동물도감’을 제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국내 최초로 음성 웹사이트를 개발해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인생 마라톤’의 어려운 코스를 밟아온 그로서는 누구보다 자신과 같은 처지로 뒤따라 달려올 국내 장애인들이 걱정이다.
“내가 큰 우산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나 같은 장애인이 열심히 사는 것을 보여주고 제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힘없는 약자들이 힘 있는 사람들에게 애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테두리 안에서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2006년도에 전주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여성 장애인 출산장려금 지원 등 장애인 권익을 위한 조례제정에 힘쓰고 있다. 장애인의 대변자로 이 자리에 섰다는 생각을 하면 쉴 틈이 없다.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도서관장으로, 시의원으로 열정적인 질주에 나서고 있는 송경태 씨. 하지만 극지를 향한 그의 야성만큼은 숨길 수 없다. 50대를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 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맹훈련중이다. 바로 ‘마지막’ 대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송경태 씨는 오는 11월 19일 도우미 유지성 씨와 함께 남극으로 떠난다.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관문인 남극 마라톤(The Last Desert) 레이스가 24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사하라 사막과 고비 사막, 아타카마 사막을 완주한 사람에게만 출전권이 주어진다.
남극 마라톤은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슈아이에서 출발,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과 디셉션섬을 거쳐 남극본토 250km 구간을 달리는 대회이다. 영하 35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에 곳곳의 크레바스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야말로 죽음의 레이스로 악명이 높다.
지금까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사람은 전세계에 27명 뿐이다. 장애인은 한 사람도 없다. 이번에 송경태 씨가 완주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또하나의 ‘세계 최고’를 갖게 된다.
“제가 이번에 성공하면 기네스북에도 오를 거라고 하네요. 열심히 뛰겠습니다. 제가 본보기가 돼서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해야죠.”
극한마라톤 그랜드슬램 위해 남극행…“재활전문병원 건립에 힘 보탭니다”
송경태 씨는 이번 대회를 통해 푸르메재단이 추진중인 재활전문병원 건립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도전과 극복, 성취라는 극한 마라톤의 감동 위에 장애인 의료복지라는 사회적 의미를 더하겠다는 뜻이다. 푸르메재단은 송경태 씨가 남극을 달리는 일주일 동안 국내에서 병원건립기금과 장애환자 치료비 마련을 위한 러닝머신 달리기 등 부대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그는 지금껏 세 가지 꿈을 이뤘다고 말한다. 바로 ‘결혼하는 것’, ‘컴퓨터 잘 다루는 것’, ‘대학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 꿈을 모두 이루는데 20년 이 걸렸다고 말하는 송경태 씨의 얼굴에 순박한 웃음이 가득하다.
그는 아직도 꿈이 많다. 극한 마라톤 그랜드 슬램을 통한 ‘희망의 홀씨’ 뿌리기와 함께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 증진을 위한 여러 궁리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무엇보다 장애인과 노인 등 소외된 이웃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희망도서관’을 짓는 게 급하다. 다행히 전주 시내에 800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메마른 현실 딛고 꿈 향해 달리는 인간 송경태의 ‘인생 주법’
우직하면서도 부지런한 송경태 씨는 자신의 꿈들을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 못다 이룬 꿈들이 많다.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마라톤보다 더 고된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쉽사리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꿈을 이루어가는 그 길이 비록 사막과 같을지라도, 늘 꼴찌로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마라토너 송경태의 ‘인생 주법’이다.
*글=임승경 푸르메재단 간사
■ 송경태 씨 프로필
-1961년 전북 오수 출생
-1982년 전주비전대학 졸업 뒤 입대
-1982년 7월 폭발사고로 시력상실
-1990년 한일장신대학교 졸업
-2000년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 설립
-2001년 한일장신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2001년 전북장애인신문 창간
-2002년 올해의 장애극복상 수상
-2004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
-2005년 극한마라톤(사하라 사막)
-2006년 전주시 의원
-2007년 극한마라톤(고비 사막)
-2008년 극한마라톤(아타카마 사막)
-저서 : 시집 『삼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청동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