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현 씨] 30년만의 외출, 그리고 기네스북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⑥ 전동휠체어 유럽횡단 세계기록 보유자 최창현
30년만의 외출, 그리고 기네스북
1995년, 처음으로 가족의 손을 빌지 않고 집 밖으로 나선 중증 장애인이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위한 보치아(목표물 가까이 공을 던지는 게임) 강습회가 인근 복지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여기 저기 연락한 끝에 함께 갈 봉사자와 연결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 세상 속으로 나간다는 두근거림보다 더 큰 것이 ‘화장실 걱정’이었다. 휠체어조차 처음 타보는 그로서는 봉사자에게 화장실 가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닷새 동안 물을 안마시고 버텼다. 그때 그의 나이 만 30세였다.
약 10년 뒤, 그는 전동휠체어를 입으로 조종해 유럽과 중동 등 세계 35개국을 횡단한다. 2006년 5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평균 시속 13km로 2만8000km를 여행했다. 그가 바로 장애인의 전동휠체어 세계 최장거리 주행 기록을 세우고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창현(43)씨다.
마침내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다
“장애인이라고 못할 일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장애가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는 선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최창현씨는 방에서만 지낸 30년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첫 외출’ 이후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1996년
장애인 인권 찾기를 목표로 내걸고 <밝은 내일회>를 설립하고, 중증장애인 독립생활지원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999년 1500km 국토종단을 시작으로 5500km 미국대륙 횡단(2001년), 4000km 일본열도 종단(2003년)까지 인간승리의 드라마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대구지부로 찾아가 만난 최창현씨는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장애가 심했다.
계속 떨리는 팔을 제어하기 위해 전동휠체어 양쪽에 붙어 있는 끈을 꼭 쥐고 있었다. 다리 또한 벨트로 발목을 휠체어에 묶어 고정시킨 상태였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지만 재활은커녕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걱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를 하셨고,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가 오셔서 우리 형제들을 돌봐주셨지요. 그냥 하루 종일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런 내가 세상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었겠어요?
스무 살 무렵까지도 이 세상에 장애인은 나 한 사람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유엔에서 장애인의 해로 선포한 1981년 이후에야 텔레비전에 장애인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으니까요.”
생명은 존엄하다
이십대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심해졌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 가족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기 싫어서
시설로 갈 결심을 했다. 라디오에서 장애인시설 이야기만 들리면 귀를 쫑긋 세웠고, 며칠을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아내 입소조건을 물었다.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최창현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침내 면담을 위해 시설을 방문한 날,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우리에 갇힌 짐승 같았습니다. 사는 게 아니라 사육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들도 나도 생명이 있는
존재다, 짐승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나도 모르던 외침이 마음 속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최창현씨는 시설 입소를 포기하고 (훗날 그곳은 비리가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그때부터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한 공부에 매달렸다. “그 전엔 장애인인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했지만, 그날 이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나를 포함한 장애인들 모두가 행복하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해 <밝은 내일회>를 만들고 최창현씨는 활동가로 변신했다. 그 과정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누가 옆에서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말을 따랐다고 할 텐데 그게 아니었어요.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고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신변처리를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 물을 마시지 않고 버텼던 숫기 없는 청년은 장애인 인권을 위한 싸움에서
삭발과 알몸시위도 마다하지 않는 투사가 되었다. 겨울에 꽁꽁 언 몸으로 군밤을 팔면서 중증장애인 자립센터를 어렵게 꾸려왔다.
장애인 이전에 나는 한 사람의 국민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장애인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장애인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혹시 의심할 수도 있겠고, 반대로 인간애라는 더 넓은 가치를 최창현씨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2만8000km 유럽 횡단에서 ‘남북통일’을 첫 번째 깃발로 내걸었다. 그는 “통일이 내게도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허리가 잘린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가 곧 장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이 되어야만 우리 국민 전체가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입으로 휠체어를 조종하며 어렵게 유럽을 횡단한 것도 통일을 바라는 내 절실한 마음이 세계 곳곳에, 북한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기 전에 나는 사람이고,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장애극복의 의지는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데, 통일 문제는 왜 중증장애인인 당신이 그 얘기를 하냐고 이상하게 보거든요.”
그는 유럽과 중동을 가로질러 35개국을 지나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동유럽을 꼽았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도 전체주의의 어둠이 아직 남아 있는 곳. 쉽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남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최창현씨의 모습만 보이면 온 동네에서 모여들었다. 젖먹이까지 들춰 업고 나와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는데 그를 취재한 현지의 한 기자가 답을 알려줬다. 기자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지금까지 마음으로 몸으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유과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점도 새롭게 느꼈다”며 몇 번씩 최창현씨에게 고맙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운 1년 7개월의 대장정은 이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듯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쉼표일 것이다. 최창현씨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뜻밖에도 그는 “이제 자신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최창현씨는 유럽과 중동횡단 때 동행했던 청년의 죽음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워낙 긴 기간인지라 네
번째로 교대한 자원봉사자였다. 숙소에 두고 온 다이어리를 찾으러 혼자 운전해 되돌아갔던 청년이 교통사고로 만리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방 안에서 30년을 살았지만 원망도 후회도 없었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고생도 했지만 보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 때문에 한 생명을 잃고 나니까 모든 도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어요. 등반가들은 동지를 잃으면 그 사람을 위해 다시 산을 오른다고 하는데, 나는 그릇이 작아서 그런지 아직 용기가 안 납니다.”
30년을 방에 갇혀 살았던 중증 장애인, 장애인 인권을 위해 앞장서 싸우는 활동가, 입으로 휠체어를 조종해 기네스
기록을 따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 이 모든 것이 최창현씨의 각기 다른 얼굴이다. 슬픔과 실의에 빠진 얼굴도 그의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의 열정과 투지는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이 슬픔에 뿌리박고 있는 건 아닐까. (끝)
글=전미영(푸르메재단 사무국장)
[인터뷰]촛불집회, 어떻게 보십니까?
-대구의 집회는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거의 매일 매일 참가하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진통제를 먹고 저녁이 되면 대구시내의 민주화광장으로 나갑니다. 분위기는 서울처럼 경찰이 폭력대응 하는 등의 그렇게 폭력적이거나 급박하지는 않습니다. 촛불문화제에서 어린 아이들이 나와서 발언할 때가 제일 가슴 뭉클했습니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반성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6월 10일에는 시민들이 제일 많이 모였는데 2000여명 정도 되었습니다. 대구시민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은 참가자 수가 많이 줄어 30여명 정도 모입니다. 하지만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촛불집회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촛불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대신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수만 명이 촛불집회에
나왔습니다. 그 분들은 자신만 수입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으로부터 막아내기 위해서 거리로 나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장애인이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민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촛불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서울지검에 고소하셨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국민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말로만 국민의 머슴이라고 했지, 국민을 완전히 마루타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광우병 쇠고기로 국민의 건강을 실험할 순 없습니다. 광우병이 예방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벌레 한 마리도 사람이 잡으려고 하면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성을 가진 사람이 오죽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전 국민이 살기 위해서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고 공권력으로 탄압하고 연행한 것은 범죄행위를 넘어서 테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유엔에도 같은 내용으로 고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UN에도 국민의 인권을 짓밟고 탄압한 이명박 대통령을 고발했습니다. 지난 7월 9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앞으로 한글과 영문 두 가지로 된 고발장을 보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헌법 제1조처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 약력
2008년 4월 중증장애인 전동휠체어 부문 세계기록 보유자로 기네스북 등재
2006년 5월~2007년 12월 유럽과 중동 35개국 2만8000km 휠체어 횡단
2003년 일본열도 4000km 종단
2001년 저상버스 도입운동 결실, 국내최초 도입
2001년 미국대륙 5500km 횡단
1999년 월드컵 성공위한 1500km 국토종단
1996년 중증장애인 독립생활지원센터 운영
1996년 밝은내일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