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창우 화백] 두 팔 잃고 새로운 꿈을 일구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⑤ 수묵크로키 개척한 의수화가 석창우


...29살에 2만볼트 전기에 감전 두 팔 잃어

‘그림’이라는 숙명과 만나 자유롭게 날다


» 의수화가 석창우씨.

여기 장애와 가난, 그리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일으켜 세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귀 질환과 중증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이 땅에 우뚝 선 장애인들입니다. <한겨레>와 푸르메재단이 공동으로 펼치는 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우뚝 선 장애인> 시리즈를 통해 이들을 소개합니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씨의 이야기 <산으로 간 ‘말아톤’>를 시작으로, 한국의 ‘스티브 호킹’이라고 불리우는 이상묵 서울대 교수, 전동휠체어로 35개국을 횡단한 최창현씨, 운동 도중 하반신 마비가 됐지만 존스홉킨스대학 재활의학과 의사로 우뚝 선 이승복 박사 등 20여명의 장애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고통을 딛고 일어선 장애인들의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들께 왜 우리 삶이 소중하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이 캠페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새로운 희망을 움켜쥐길 기대합니다.


3미터 길이의 흰 화선지 앞에 섰다. 모두가 숨을 멈췄다. 의수에 끼운 붓이 빠지지 않게 다시 한 번 단단히 조인다. 천천히 붓에 먹을 묻히고 온 몸의 기운을 화선지와 붓의 접점에 집중한다.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바람을 타고 활공하듯 온 몸으로 휘두르는 붓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인물들이 탄생한다. 이 순간 만큼, 석창우 화백(53)은 더 이상 두 팔을 잃은 장애인이 아니다. 


29살 전기기사, 2만 2900백 볼트의 감전되다


그는 1955년 경북 상주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산업을 발전시켜야한다는 생각에서 공업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전기를 공부했고, 전기기사를 천직으로 생각했다. 1984년이었다. 하늘이 높고 맑았던 어느 가을날, 전기안전 점검 중 2만2900백 볼트의 전기에 감전됐다. 전원 차단장치가 고장나있었던 것이다. 순간 갑자기 온 몸이 척 들어붙고 마치 몸안으로 불덩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그때 나이 만 29세. 둘째인 종인이가 태어난 지 불과 한 달 반 되었을 때였다.



“눈을 떴는데 양손이 없더라고요 2번 더 수술을 받고 어깨까지 양쪽 팔을 절단했어요. 양쪽 팔이 모두 까맣게 탔거든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내는 담담하더라고요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 다행이라면서요.”


» 신혼여행 당시의 석창우 화백, 부인 몰래 낚시도구를 챙겨 가 부인에게 빈축을 사야했다

두 팔이 없는 장애인의 고통은 남다르다. 두 다리가 멀쩡해서 이동하는 데 불편이 없다보니 장애의 심각성을 잘 몰라준다. 당장 입원했던 병원에서 난처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산업재해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었지만 두 팔이 없는 환자를 위한 시설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직업 재활 역시 손을 사용한 프로그램 위주였다. 석창우 화백에게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걷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옷도 혼자 입을 수 없고, 밥도 누가 먹여줘야 한다. 세수도, 용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병원에 머물렀던 1년반은 재활의 시간이 아니라 절망의 시간이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요즘도 종종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버튼식은 몰라도 ‘체온 감응형’ 버튼은 정말 난감하다. 쇠붙이로 된 그의 의수에는 ‘체온’이 없다. 입술이나 턱으로 눌러보기도 하지만 버튼에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내가 식당을 운영하느라 집을 비우면 하루가 그에게는 여전히 ‘곤란한’ 시간이다. 화실로 나오는 활동보조인 덕분에 밥을 먹을 수 있다. 어쩌다 홀로 밥을 먹어야 할 때면 밥에 물을 말아 겨우 마시거나, 아예 굶는다. 지하철은 간신히 탈 수 있지만 버스는 불가능하다. 택시도 운전사가 내려 문을 열어줘야 비로소 탈 수 있다.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도 어디에 갈 수도 없다. 


두 팔 잃고 그림과 조우하다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퇴원을 하자마자 서울집을 정리해 요양을 위해 처가가 있는 전주로 내려갔다. 의수에 볼펜을 끼우고 글씨 연습을 하던 어느 날, 4살 된 아들 종인이가 청소하는 엄마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림 그려달라고 보챘다. 짜증이 난 아내가 ‘아빠한테 그려달라고 해!’ 라고 무심코 말했다.


“아들이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데 그 눈빛이 ‘진짜 그려줄 수 있느냐’ 하고 묻는 것 같았어요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던 아들놈이 그려달라는데 ‘그래, 한번 그려보자’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어서 뭘 그려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아들 동화책에 나와 있는 새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어요. 그런데 주위 반응이 좋더라고요.”(웃음)


» 1988년 2월 1일 어린 아들을 위해 의수에 볼펜을 끼고 그린 첫 그림. 20년이 지난 지금도 빛바랜 새 그림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이때가 1988년. 사고를 당하고 4년 동안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그는 ‘나도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처음 갖게 되었다. 내친김에 미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찾았다. 하지만 팔이 없는 사람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다양한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미술인데 물감 짤 손조차 없으니...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서예였다. 서예는 먹 한 가지로 멋진 그림들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 아들과 함께 서예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원광대 서예과 여태명 교수를 찾아갔어요. 무작정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교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고요 그래서 교수님께 제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만 가르쳐달라고 했죠. 교수님은 아마도 제가 금방 포기할 줄 아셨는지 받아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포기할 수는 없었죠.”


어느 날 한 구족화가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되었다. 두 팔이 없는 장애인은 대부분 입 또는 발로 그리는 구족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우리나라에는 구족화가협회가 있을 정도로 많은 구족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석창우 화백은 두 팔이 없어 이왕 어렵게 시작하는 그림이라면 구족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해 차별화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두 팔이 없으면 구족으로 그려야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의수를 택했다.


오기로 시작했지만 의수로 그리는 작업은 생각했던 것 몇 배 이상으로 힘들었다. 식사 시간 외에 연습에만 매달렸다. 식사보다 붓을 선택했다. 의수의 갈고리에 포크와 붓을 끼우는 각도가 각각 달라 매번 각도를 조절하며 끼워야 한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아까웠다. 석창우 화백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호하게 붓을 선택했다. 항상 의수의 갈고리는 언제 어디서든 붓을 끼우기 쉬운 각도로 고정했다. 그 뒤로 식사는 늘 석창우 화백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렇게 연습에만 몰두한지 한 달 후 여태명 교수가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진정 시작이다. 꿈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 


붓과 하나 되어 화선지 위를 훨훨 자유롭게 날다


» 의수에 붓을 끼고 한 획을 그으려면 어깨, 허리, 온몸의 힘이 필요하다. 온몸의 힘을 모으기 위해 그는 늘 서서 작업을 한다

“예술과는 전혀 관련 없던 삶이었습니다. 장애를 입기 전까지는. 내 안에 그 어디에서인가 그런 감각이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삶이 180도 바뀌고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 것’이 나에게로 왔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저절로’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석창우 화백. 하지만 삶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그 길로 피땀 흘려 매진하고 있는 그이기에 그저 겸손하고 순박한 그의 심성에서 나온 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뛰어든 새로운 삶은 성공적이었다. 서예를 시작한지 햇수로 3년 되던 1991년 전라북도 서예대전을 시작으로 다음해 대한민국서예대전,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등 15회 입선, 특선,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예술에 대한 열정은 나날이 더해갔다.


“1995년도인가? 대구예술대 서예과 김태정 교수의 누드 크로키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제겐 큰 충격이었어요. 찰나에 사람의 몸이 새로운 형상으로 꿈틀거리는 정말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원래 회화에서 밑그림을 스케치할 때 사용된 기법이 크로키다. 짧은 시간 안에 대상의 주된 특징을 포착해 대략의 선으로만 옮겨 그리는 드로잉의 한 형태인 것이다. 붓 대신 연필을 끼웠다. 연필로 크로키를 몇 시간이고 연습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부터 운동하는 사람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짧은 시간 안에 특징을 잡아 그리는 연습을 했다. 연필로 그리는 크로키가 익숙해질 때쯤 붓을 다시 끼웠다. 먹에 묵을 곱게 갈아 붓을 적셨다. 적신 붓은 하얀 화선지에 숨을 멈춘 찰나의 순간,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살아 꿈틀거리는 한 생명체를 만든다. 그렇게 동양의 먹과 서양의 크로키가 만나 수묵크로키가 탄생하였다.


» 의수화가 석창우 화백의 누드크로키

미국, 독일, 중국, 프랑스, 영국 등 8차례의 해외전시를 포함해 개인전 23회, 그룹전 170여회를 진행 하며 석창우 화백은 ‘제1호 의수화가’로써 ‘수묵크로키’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우뚝 섰다.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다. 


두 팔과 헤어짐은 운명, 그림은 숙명 


사고로 29살에 두 팔을 잃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되고나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꿈으로 나타났다. 매일 밤 심란한 꿈에서 깨어나 잠자리를 뒤척였다.


“처음에는 낚시하는 꿈을 꿨어요. 단지 낚시가 그리워 꾸는 꿈이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꿈의 종류가 달라지더라고요. 모든 꿈에서 내 두 팔은 멀쩡했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갈망이 꿈을 통해 요동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고 후 10여 년이 흐른 어느 날부터 거짓말처럼 그 꿈들이 사라졌다. 연필로만 해 오던 누드크로키 작품을 화선지에 옮겨 붓으로 그리기 시작할 때쯤, 참 신기하게도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그에게 물었다. 하늘에서 건강한 두 팔을 다시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다.


 “안 받아요! 내가 양팔과 헤어진 것이 운명이라면 의수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바로 숙명입니다.”


» 지난 6월 북경 전시회, 올림픽 준비 위원회 위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진행한 역동적인 수묵 크로키 시연 모습. 중국 현지인들도 그의 작품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아직도 환상통(phantom pain)에 시달린다. 밤이 오면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아프다. 손가락의 뼛속을 날카로운 바늘 수백 개가 한꺼번에 찌르는 것 같다. 2~3분 간격으로 극심한 고통이 밀려든다. 진통제를 삼켜봐도 별 소용이 없다. 사라진 팔이 아직도 생생한 아픔을 주고 있다. 그에게 두 팔은 없으면서, 동시에 있는 것이다.


두 팔을 잃은 지 24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사라진 몸의 일부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는 운명을 딛고 일어선 승리자다. 불모의 사막이 돼버린 자신의 내면에 예술의 꽃을 피웠고, 주위에 희망의 씨앗을 선사했다.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삶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아가는 어떤 계기인 것이다.


어느덧 한국 화단의 중견화가로 자리 잡은 석창우 화백. 그는 세속적인 ‘성공’보다 더 귀한 것은 새 희망을 향한 거침없고 끈질긴 노력이라고 말한다.


글= 어은경 푸르메재단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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